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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Sep 06. 2023

이제야 알게 되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호암미술관


경주에 대한 첫 기억은 그다지 감명 깊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중고등학교 수학여행에서 학생들의 관심은 불국사나 석굴암이 아니라 저녁때 있을 레크리에이션에 있기 마련이다. 버스에서 내려 만나게 되는 유적지에서 나는 퍽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고, 언뜻 돌아본 불국사의 정경은 흐릿하게만 기억에 남고 말았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 다시 찾은 경주는 내가 어슴푸레 기억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대릉원의 불룩한 잔디 위로 떠오르는 달의 모습에 경탄하고, 새빨갛게 물든 단풍 사이를 걷다 만나게 되는 불국사의 공간들을 소중히 눈에 담았다. 경주는 전통을 가득 머금고 여전히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천년의 도시임을 긴 세월이 지나서야 알게 된 셈이다.


뒤늦게 경주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은 건축을 공부해서일 수도, 도시를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달라져서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뒤늦게 발견되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다시 발견할 아름다움이 경주가 아닌 용인에도 있다. 리모델링을 마치고 '한 점 하늘_김환기'전과 함께 돌아온 호암미술관이 그곳이다.




햇볕을 가득 머금은 정원, 희원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 차량에서 내려 호암미술관까지 향하는 과정엔 2만 여평 규모인 전통정원인 희원이 있다. 고요하고 정갈하게 정돈된 일본의 정원이나, 완벽한 대칭으로 기하학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프랑스의 정원과는 다르게 우리나라 전통 정원은 마치 오솔길처럼 자연스럽게 산책하는 사람을 반긴다. 이곳저곳 경계를 두지 않고 피어있는 고사리와 계절의 꽃들은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퍽 당당한 자세로 풀숲 사이에 숨어 있는 작은 돌장승들은 그 귀여움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희원은 걸을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마치 영화의 장면과 장면 사이를 넘어가는 것처럼, 궁궐에서 볼 법한 문을 지나 숲을 거치고, 담장을 넘어, 정자를 만나고, 연잎이 가득한 연못에 도달한다. 하늘을 향해 굽이치는 연잎의 표면과 그 뒤로 보이는 구불구불한 산새, 그리고 그 사이 숨어있는 검은 기왓장이 눈에 들어왔다. 호암미술관은 희원의 높은 곳에 앉아 마치 정원을 내려다보듯 자리하고 있었다.




전통과 근대 양식의 공존



호암미술관에 다가서며 경주를 떠올렸던 것은 호암미술관 옆에 자리한 다보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아래처럼 건물의 진입부에 자리 잡은 석재 아치의 형태 때문이었을까.



호암미술관의 1층은 현대의 건물에서는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 두터운 석재의 기단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입구성을 강조하고, 2층은 섬세하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서까래와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뻗어 오르는 청기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어, 언뜻 묵직한 권위가 느껴지기도 하나 크게 열린 아치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내부로 이끌었다.



내부의 구조는 단순하다. 입구와 마주 보고 있는 계단은 이곳을 사람들이 모이는 홀로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진입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2층으로 시선을 주고, 2층에서 내려오는 사람 또한 계단을 이용하게 되니 호암미술관의 중심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암미술관의 시작부터 함께 해 온 화강석과 대리석은 리모델링 이전처럼 그대로 유지되어 바닥과 계단을 이루며 공간에 묵직함을 선사한다. 석재 난간을 장식하고 있는 금속의 무늬 난간대와 목재로 따뜻하게 마감된 새로운 안내데스크와 2층의 휴게 홀은 리모델링을 통해 호암미술관이 전통과 근대의 양식을 어떻게 공존하게 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눈여겨볼 공간은 2층의 전시관 사이에 위치한 휴게 홀이다. 1층과 2층을 수직적으로 잇는 계단의 건너편 휴게 홀은 건물의 전면에 위치한 전통정원인 희원을 마주하고 있다. 통창 너머로 희원의 모습이 그대로 내부로 들어오게 되며, 이곳엔 풍경을 공간 내부로 끌어드리는 전통 건축 기법인 차경이 쓰였다. 넓은 마루를 연상케 하는 휴게 홀에서 기와 아래로 펼쳐진 희원을 바라보며 전시와 전시 사이 사람들은 원하는 만큼의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한국적인 선과 면은 본래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돋보이려는 강력한 의지도 없고, 공간을 구분 짓는 날카로운 선과 면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저 우유부단하게 물에 물 탄 듯 공간을 어루만진다. 그래서 자연을 대하는 수더분한 태도와 자연에 녹아 공간을 만드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기가 어려워진다. 경주의 아름다움을 내가 첫눈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한국적인 것은 오래 보아야 그 진가를 눈치챌 때가 많다. 호암미술관이 그렇다. 오래도록 꾸준하게 가꿔온 정원과 묵직한 근대의 건물 속 세심하게 매만진 공간들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은 이제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샘터 2023년 9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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