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회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2년 전, 처음으로 회사 생활을 경험했다. 설계하는 인원만 100명이 넘는 큰 회사였다. 설계 파트는 몇 개의 부서로 나뉘어 있었고, 각자 하는 일도 달랐다. 어떤 부서는 아파트를 설계하고, 어떤 부서는 실시 설계만 담당하고, 또 어떤 부서는 현상 설계만 했다. 인원이 많아지면, 분업은 필수적이었고 그것이 당연했다.
*현상 설계 : 하나의 건축 설계 프로젝트에 여러 회사에서 계획안을 내어 가장 좋은 안으로 채택하는 방식. 공모전과 유사하다.
그중 내가 6개월 동안 인턴으로 몸 담았던 부서는 현상 설계팀이었다. 10명 내외로 이루어진 팀이었는데, 하나의 현상 설계 프로젝트가 지나가면 또 다음 현상 설계를 진행했다. 끊임없이 마감은 이어졌고, 그 방식은 학교에서 설계 스튜디오를 진행하던 방식과 비슷했다. 다만, 팀원 사이에 위계질서가 있어 내가 하는 일은 한정적이라는 점이 달랐다. 나는 각이 잡힌 틀 안에서 움직였다. 규칙은 많았고, 참고할 수 있는 사례 폴더들 사이에서 스크롤은 계속 내려갔다.
일은 재밌었고, 흥미로웠고,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다. 건축은 아직도 나에겐 더 잘하고 싶은 분야였다. 하지만 6개월 동안의 인턴 생활을 끝내고 나왔을 때,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 자리가 꼭 나여야만 했을까. 분명 나는 인턴으로서 여러 가지 일들을 했지만, 그 자리가 꼭 내 자리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른 사람이 와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자리였다.
그 회사에서는 졸업 후, 다시 연락이 왔다. 정직원을 뽑는 공채에 원서를 넣으라고 했다. 특별한 반전이 없는 한, 그 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망설여졌다. 원서를 내는 것이 회사원이 되는 것에 대한 동의처럼 느껴졌다. 회사의 일원이 되는 것. 사원이 되는 것에 대한 OK.
결국 원서는 넣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바보 같은 일이었을 수 있다. 누구나 어느 회사의 일원이 돼서 살아간다. 그런데 '회사원-01'이 되고 싶지 않아 유학을 가고 싶다는 좋은 핑계를 대며 그 제안을 반려했다.
시간은 흘러, 졸업 설계를 마치고 졸업식까지 지나갔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고민 시간이었다. 내가 뭘 하고 살고 싶은지, 쉽사리 찾아지지 않았다. 건축은 하고 싶은데, 어느 방향으로 갈 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어떤 회사로 가고 싶은지에 대한 결정이었다.
고민 끝에 내가 원하는 조건들을 추릴 수 있었다. 다섯 가지 정도였다.
현상 설계를 하는 것은 좋지만, 현상 설계만 하지는 않을 것.
진짜 건물이 지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을 것.
야근할 수 있지만, 사원들도 개인 생활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소장일 것.
월급은 많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기본적인 생활은 가능할 정도일 것.
우리 집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회사일 것.
결과론적으로 보면, 나는 다섯 가지를 모두 만족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운이 좋았다. 천년만년 백수일 수도 있었는데, 인연이 닿아 지금도 매일 출근을 한다.
다른 사람들과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이 달랐을 수 있다. 나는 돈을 많이 받기도 원하지 않았고(물론 돈은 좋은 것이다.), 유명한 작품들을 많이 설계한 사무소를 찾지도 않았다(물론 배울 것은 많을 것이다.). 그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회사가 좋았고, 사회성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개인 시간을 마련해 주는 회사가 더 좋았다. 배우는 것은 좋지만, 일을 무작정 많이 하는 것과 배움은 구분되어야 한다. 넘치는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해서, 인간적이지 못한 초과 근무는 배울 의욕마저 뺏어갈 수 있다. 탈건축으로 가는 길이다.
회사와 나의 관계는 나의 능력과 일정 시간을 돈을 받고 파는 1:1의 계약 관계이고, 갑과 을로서 하나의 약속을 맺는 것이기 때문에 회사가 여러 조건으로 사람들을 평가해 뽑듯이 나도 회사를 원하는 조건으로 고를 자격이 있다. 그저 배우기 위해 회사에 원서를 쓰려고 한다면, 고용 노동법을 한 번 들춰보는 것을 권한다. 미래의 직업으로 건축가를 떠올리는 많은 건축학부 학생들이 설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외의 것을 고려한다면 설계를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는 것처럼 여긴다. 오해다.
주위 친구들은 자소서를 쓰느라 한 차례 바빴고, 요새는 인적성 검사를 한다고 또 바쁘다. 모두 좋은 회사에 입사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 자신이 뭘 원하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있었으면 한다. 다 닳고 나면 새로운 톱니바퀴로 교체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하루의 8시간 정도는 즐겁지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