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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Jan 24. 2017

붉은 걸음

후시미이나리 신사, 교토

교토를 떠올렸을 때 붉게 떠오르는 이미지 하나. 끝이 보이지 않도록 이어지는 붉은 문들의 연속. 교토 여행이 결정되고 나서 책을 얼른 뒤졌다. 글자들을 읽지도 않고 휘리릭 넘겼다. 눈으로는 붉은색을 찾기 시작했다. 아마도 교토의 그 많은 이미지들은 결국 한 장소 이리라. 확신이 있었다.


금세 찾았다. 이름은 후시미이나리. 신사였다. 신사의 입구를 상징하는 토리이(鳥居)가 그렇게 많으니 신사가 아닐 수 없었다. 교토에서 가장 찍고 싶은 장소였다. 누구나 찍고 돌아오는 장소지만 그래도 내 카메라로, 내 렌즈로, 내 눈으로 담고 싶었으니까.




01 끝이 없는 붉은 문


후시미이나리 신사에 발을 딛는 순간, 당신은 이렇게 이번 여행에서 이곳의 사진 찍기는 실패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후시미이나리의 토리이만큼이나 사람들이 많다고 느낄 테니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트립어드바이저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1위를 했다고 소개하는 글들이 먼저 관광객들을 반긴다. 어느 길인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모두 같은 장소로 걸어가고 있으니까,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초조해할 필요도 없다. 붉은 토리이들을 만나자마자 사진을 찍겠다고 덤벼들지 않아도 된다. 필요한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꾸준함이다.



후시미이나리의 붉은 문은 말 그대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정상까지 1시간 반에서 2시간. 돌아오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2시간에서 3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대한 등산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입구에서 바글바글하던 사람들은 15분 여 정도를 계속해서 오르자 눈에 띄게 그 수가 줄었다. 금세 다시 뒤를 돌아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방문했던 때는 어느 가을 날,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맑은 날이었다. 붉은 토리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은 선명한 그림자를 남겼고, 바닥에 새로운 무늬를 새겼다. 사람이 없어질 때까지 걸었다. 비록 정상까지 오르진 않았지만, 원하던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웬만하면 정상까지 한바퀴 둘러보고 오겠지만, 오르는 데에만 2시간이나 걸릴 줄 모르고 시간 분배를 잘못한 탓이다.



높이가 5m 쯤 될까. 같은 크기이지만, 미묘하게 기둥의 두께와 높이가 어긋난 채로 마치 동굴에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마저 주는 이곳은 문들의 연속이지만, 벽과 천장으로 둘러싸인 것과 같은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햇빛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눈이 내려 산행하기엔 위험한 계절인 겨울에도 이곳, 후시미이나리 신사는 열려 있다.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토리이가 햇빛과 눈을 동시에 막아주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에는 흰 배경에 붉은 토리이가 더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02 언제, 누가 이 문들을 세웠나


이나리 산으로 오르다, 뒤를 돌았다. 다시 뒤를 돌아 내려가기로 했다. 뒤를 돌아보자, 앞과는 다른 점이 보였다. 검은 색 글씨로 토리이마다 깊게 새겨진 날짜와 이름들이었다. 아, 이 토리이들은 모두 사람들의 작은 소원이 모여 이렇게나 많아진 것일까. 어떤 마음으로 이 토리이들을 하나씩 세워나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치 절에 가면 기이할 정도로 높게 쌓아올려진 돌탑들을 봤을 때처럼, 경외심이 들었다.



검게 아로새겨진 글씨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토리이의 뒷면이 더 마음에 들었다. 문 하나를 지날 때마다, 누군가의 소망 하나를 지나 걷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 탓이다.





우리는 반복된 노동에 경외심을 느낀다. 정성이 반복되며 쌓이면, 시간이 들여지면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손으로 만든 것들이 특히 그렇다. 화가는 셀 수 없이 반복되는 붓터치를, 조각가는 멈추지 않는 정과 망치를, 작가는 끊임 없이 글을 써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건축이 때때로 마음에 강한 여운을 남길 때는 바로 이런 노동의 흔적들을 마주했을 때다.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반복되었을 땀과 노력이 1300년 동안 이곳에서 이어진 것이다.


다음에 방문하면, 시간을 넉넉히 잡고 끝까지 올라가보리라. 듣기로는 이나리 산의 정상에서 교토의 도심 풍경이 그렇게 잘 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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