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급이 먼저 불리는 곳에서 역할이 정체성이 되지 않기 위해
휴가 기간 동안 회사 밖의 사람들을 만났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회사라는 이름표와 직급을 잠시 내려놓은 채 과거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사람들과 함께 했다.
그런 자리에서 나는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어떤 직급인지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굳이 그런 정보 없이도 깊은 논의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이렇게 스타트업 자문을 한다.
현재의 소속이나 직함이 아니라,
과거에 했던 일들과 남겨온 결과들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그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소개가 이어진다.
돈을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자리는 나에게 다른 방식으로 분명한 의미가 있다.
그곳에서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왔고,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먼저 묻힌다.
내 경험과 통찰이 실제로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를 조용히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리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불필요한 설명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직급도, 조직도, 정치도 잠시 사라지고
문제만 테이블 위에 남는다.
분명 ‘일’을 지속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피로하지 않다.
나는 그런 자리에서 조금 더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
그 모임에는 스무 살을 막 넘긴 사람들도 있다.
나와는 띠동갑이 두 번쯤 도는 나이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나이는 더 이상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다.
그들은 나의 그대로를 반기고,
먼저 연락을 하고,
주저 없이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피드백을 요청한다.
누군가 가르치거나 책임져야 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서로의 생각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조금 더 나은 방향을 함께 찾을 뿐이다.
그 공간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는 내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나는 그곳에서
굳이 나를 연출하지 않아도 된다.
말과 행동을 조심하기보다
생각과 감각을 그대로 두고 말해도 괜찮다.
부캐란 가짜 자아가 아니라,
억눌린 자아가 잠시 숨 쉬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반면, 회사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조금 달라진다.
직급이 먼저 호명되고,
소속이 앞에 붙는다.
사람들의 눈빛에는
묘한 거리감이 생긴다.
그 거리감은
존중일 수도 있고,
경계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오해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나를 어려워하고,
나는 그들을 의식한다.
말은 한 박자 늦어지고,
표현은 한 겹 더 포장된다.
어쩌면 회사에서의 나는
‘실제의 나’보다
‘조심스럽게 관리되는 나’에 더 가깝다.
그 차이는 아주 미세하지만,
하루가 끝날 무렵
확실한 피로로 남는다.
요즘은 부모님의 병간호로
삶이 조용히 기울어질 때가 잦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하루 같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간극이 조금씩 벌어진다.
집에서는 보호자의 얼굴로
휴일 내내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회사일을 한다.
회의에 들어가고,
요구된 사안 앞에서 고심을 거듭해 결정을 내리며
내 이름 앞에 붙은 역할을 수행한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이겠지만,
나에게는 무너진 마음 위에 조심스럽게 하루를 얹고 서 있는 시간이다.
회사가 요구하는 역할은
개인적인 슬픔이나 사정을 처리할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내가 버티고 있는 것은
업무의 무게가 아니라,
무너진 와중에도 나를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마음조차 스스로 감내하며 설명하지 않는 법에 대해 익숙해졌다.
실제의 나,
내가 생각하는 나,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
이 세 개의 자아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에 따라
하루의 무게는 달라진다.
외부의 수평적인 공간에서는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세 가지 자아가
회사에서는 종종 벌어진다.
문제는 어느 쪽이 진짜냐가 아니다.
모두 '나'다.
다만 속한 환경이
어떤 자아를 더 크게 호출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모습일 때
가장 나다운가.
어릴 때부터 이 질문을 끊임없이 했었다.
직장인은 역할을 연기하는 존재가 되기 쉽다.
그러나 역할이 곧 정체성이 되어버리는 순간,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는다.
나는 회사 밖에서 만난 사람들의 눈빛 속에서
계산보다 호기심이 앞서고,
위치보다 가능성을 먼저 보는 시선을 느낀다.
그것은 내가 과거에 가졌던 모습이자,
지금도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는 나의 일부다.
자아는
고정된 결론이 아니라
지속되는 질문에 가깝다.
왜 이 공간에서는 내가 더 조심스러워지는가.
왜 이 자리에서는 내 말이 가벼워지는가.
왜 어떤 사람들 앞에서는 내가 자연스러워지는가.
이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조용히 들여다보는 과정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다시 조율할 수 있다.
직장생활은 성과를 쌓는 여정이기도 하지만,
자아의 간극을 인식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세 개의 나가 완전히 일치하긴 어렵겠지만,
그 간극을 알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며 조금씩이라도 좁혀가려는 태도는 우리의 삶을 훨씬 덜 피로하게 만든다.
나는 오늘도 회사라는 공간에서 조심스럽게 말하며 일한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지 않으려 한다.
그 두 가지를 함께 견디는 것.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끝내 하나의 얼굴로만 살기를 포기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by 제제
- 역할과 자아 사이의 간극을 조용히 견디는
- 하나의 자리보다 하나의 마음을 지키는 선택을 이어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