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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혜 Mar 21. 2022

저주인형

동화

  “어디서 이상한 거 갖고 오지 좀 말라니까.”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보았다. 여자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남자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현주는 이런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레파스로 내 얼굴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현주가 잠에 들자 여자와 남자는 나를 두고 싸우기 시작했다.  

  “저런 거에 세균이라도 묻어 있으면 어떡하려고 애한테 줘?”

  “어휴. 깨끗해. 깨끗한 거 확인하고 가지고 온 거야. 저건 현주가 더럽힌 거지. 원래는 안 그랬어.”

  “사더라도 좀 예쁜 걸로 사지. 저게 뭐야.”

  “왜 개성 있게 생겼는데.”

  “개성 있기는. 안 예쁜 거지. 새 거 사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리고 저런 건 어쩐지 불길해.”

  여자는 못마땅해하는 남자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여자는 남자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불길하다는 말은 나를 수식하는 말로 너무 정확했고, 이렇게나 빨리 듣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몇 시간 전, 나는 단돈 이천 원에 이곳으로 팔려왔다. 여자는 나를 기분 좋은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전주인은 홀가분해 보였다.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서운한 마음을 꾹꾹 눌렀다. 쓰레기장이 아닌 다른 사람 손에 넘겨준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해야겠지.  

  “개성 있게 생겼네.”

  집으로 돌아가며 여자는 내 얼굴을 보고 중얼거렸다. 여자의 한마디에 내 미래가 더 흐려졌다. 내가 예쁘지는 않지. 예쁘지 않아서 버려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예뻤으면 좀 더 오래 나를 데리고 있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과연 이 집에서는 며칠이나 버틸까. 여자의 손아귀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 언제라도 나를 놓칠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손에 불안하게 매달렸다.

  그리고 집에 들어온 순간, 헐렁하던 손에서 벗어나 바로 엄청난 악력에 붙들렸다. 내 머리채를 잡고 소리 지른 아이는 바로 현주였다. 여섯 살 남짓해 보이는 이 아이의 눈에는 장난기가 잔뜩 서려있었다. 누가 봐도 삐쭉한 앞머리는 아이가 스스로 자른 것 같았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다 헝클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모래알이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놀이터에서 열심히 놀다 온 흔적인 듯했다.

  “새로운 부하가 생겼다!”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귀에 쿡 박혔다. 어쩐지 이곳에서의 생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쫓겨나지 않는다면 현주의 부하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네 번째로 버려진 날, 나는 한 골동품 가게에 진열되었다. 그날부터였다. 짧고 까만 곱슬머리는 이전과 달리 귀여워 보이지 않았고, 길고 진한 눈썹은 아름답기보다는 매섭고 독하게 느껴졌다. 그런 얼굴에 진한 청색 멜빵바지까지 입고 있으니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웠다. 말랑말랑한 귀여움을 무기로 사랑받는 봉제인형이 귀엽지 않다니.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 거야. 창문에 비친 내 얼굴에 그늘이 끼었다. 나 역시 더 이상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도자기로 된 토끼가 옆에서 나를 환영했다.

  “너도 드디어 이 세계에 들어왔구나.”

  이 세계는 저주인형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처음에는 그저 귀엽고 예쁘고 멋있는 인형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인형의 규칙에 따르면 네 번 이상 버려진 인형에는 저주가 깃든다. 이미 오래전 저주를 갖게 된 토끼는 이런 상황을 마냥 즐기는 듯했다. 자신의 저주 능력이 얼마나 커졌는지 자랑을 늘어놓았다. 계속해서 버려지고 내쫓기는 삶에도 설렘과 즐거움이 가득해 보였다. 그런 표정을 짓는 토끼 앞에서 저주인형 따위는 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나는 애써 내 운명을 무시하며 새로 만날 인연을 기다렸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토끼는 나를 향해 낮게 읊조렸다.

  “기대하지 마. 아이가 크면 어차피 버려져. 이렇게 된 거 그냥 즐겨. 더 이상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잖아.”

  저주인형이 되는 것은 모든 인형의 숙명이라고 말하는 토끼의 눈빛은 벅차 보였다.

  “모두가 우리를 두려워하게 될 거야.”

  그날 밤, 잠꼬대처럼 내뱉은 토끼의 그 말은 내 귓전에 맴돌며 오히려 나를 두렵게 했다. 모두가 우리를 두려워한다면 내 곁에는 누가 남게 될까. 슬쩍 옆을 보았다. 어쩐지 눈빛에 독기가 가득한 토끼와의 미래는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누군가의 손에 들려 그 끔찍한 골동품 가게를 빠져나왔다.

  “곧 적응할 거야.”

  토끼는 그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하지만 토끼의 예언은 보기 좋게 틀렸다. 그 뒤로 몇 집을 더 돌아다녔지만 여전히 나는 내 안에서 나오는 저주의 힘에 적응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 힘으로 인해 버림받는 상황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둠이 비치는 유리창으로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여자가 말하는 그 개성 있다는 얼굴은 현주의 손에서 뭉그러졌다. 양 갈래로 땋았던 머리카락은 동강 잘려 나갔고, 두 볼은 볼품없이 늘어졌다. 멜빵 한쪽은 실이 풀려서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었고, 손끝과 발끝은 새까맣게 더럽혀졌다. 봉제인형이어서 이 정도지, 구체관절 인형이었다면 어느 한 곳은 잘려나갔을 것이다. 눈 주위는 멍이 든 것처럼 보였는데 현주는 나름 내게 안경을 씌워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습은 누가 봐도 한 대 제대로 맞은 모양새였다. 

  조금 불길해 보였어도 꽤 매력적인 얼굴이었는데 지금 내 꼴은 길고양이도 주워가지 않을 모습이었다. 이제 이곳에서도 내쫓기면 내가 갈 곳은 쓰레기장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서 버텨야만 한다.     

  “지각이야. 지각!”

  남자가 아침부터 소리를 꽥 질렀다. 푸다닥 이불을 뿌리치고 안절부절못하며 집안을 들쑤셨다. 그 모습을 본 여자도 남자와 같이 허둥지둥 댔다.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먹구름이 꾸물꾸물 천장을 메웠다. 이 집에 벌써 불행이 닥쳐오고 있었다. 바로 내 존재 때문에. 하룻밤 사이 내 저주가 이 집을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저주의 힘은 통제하기 어려웠다. 먹구름은 점점 아래로 내려와 가족들의 머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여자의 눈 밑에는 그림자가 길게 내려와 힘이 없어 보였고, 남자는 잔뜩 신경이 곤두선 채로 짜증을 부렸다.

  짧은 시간 동안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반복됐다. 남자가 먼저 밖으로 나가고, 곧이어 현주가 유치원 가방을 메고 현관문으로 돌진했다. 문이 닫히며 도어락 소리가 났다. 집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제부터다. 나는 최대한 스스로를 잘 다스려야 했다.

  저주의 힘은 혼자 남겨졌을 때를 노리고 찾아왔다. 무관심이 깃든 물건들은 인간들이 없는 틈을 타 나에게 저주의 힘을 나눠주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저주의 힘은 내 안으로 모조리 흡수됐다. 그것들은 나를 향해 인간을 저주하라고 종용했다.

  비어있는 집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냉장고 속 썩어가는 가지와 양파, 거꾸로 벗어 놓은 엄마의 양말, 아직 세탁기에 들어가지 못한 유치원 체육복, 바닥에 굴러다니는 아빠의 발톱, 날파리가 알을 깐 과일 껍질,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책상, 빨래 건조대가 되어버린 사이클 운동기구, 몇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새것 같은 가계부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귀를 막고 소리를 질러대도 무관심에 상처받은 물건들은 끈질기게 제 목소리를 냈다. 형광등이 띠 띠딩, 앓는 소리를 내며 깜빡였다.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리 꾹 막아도 그 소리들은 내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속이 점점 뜨거워졌다. 이 뜨거움을 어떻게든 풀고 싶어졌다. 무언가 부수고 어지르고 울부짖고 싶었다. 누군가 괴로워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런 거에 휩쓸리면 안 돼. 나는 손바닥으로 내 뺨을 툭툭 쳤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은 어딘가로 향했다. 주방이었다. 주방은 어지럽히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날카롭고, 위험한 것들이 널려있었다. 너무나도 약한 유리들은 손쉽게 깨져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었고, 가스레인지의 불은 한순간에 이 집을 몽땅 삼켜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날이 서있는 칼은 미워하는 마음을 담아 서로를 찌를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 집의 가족들이 모두 사라지고 내가 이 집을 차지해버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름이 돋아 고개를 세게 저었다. 이렇게 쉽게 저주를 받아들이면 안 돼. 나는 현주와의 즐거웠던 놀이 시간을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떠오르는 기억은 볼을 꼬집히고, 우악스러운 손에 붙잡혀 공중을 뱅뱅 날아다니고, 기괴한 낙서들로 더럽혀진 것들뿐이었다. 

  그때, 도어락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현주의 크고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에는 신경질적인 여자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아니 갑자기 이러면 애는 누가 봐요!”

  여자는 휴대폰 너머의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서 한숨을 푹 쉬었다. 

  “현주야. 몇 시간만 혼자 있을 수 있지? 누가 오면 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얌전히 책 보고 놀고 있어. 엄마 금방 올게.”

  여자는 그 말만 하고 휙 뒤를 돌아 나가 버렸다. 현주는 여자를 붙잡지도, 울지도 않고 닫힌 문을 향해 손을 신나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곧 거실을 종횡무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마냥 즐거워 보이는 현주와 달리 나는 이 상황을 즐길 수 없었다. 이건 바로 본격적으로 내 저주가 시작된 것이었다. 아이 혼자 남은 집에서는 그 무엇이든 위험해질 수 있었고, 그것은 이 집안을 절망 속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현주는 주방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너 왜 여깄어?”

  그 말 한마디에 심장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이렇게 벌써 들켜버리는 건가. 하지만 현주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나를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 요리해주려고?”

  아, 잊고 있었다. 사람들이, 특히 어린아이들이 인형에게 말을 거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현주가 건네는 말은 당연히 일방통행이었다. 내가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잠시 마음을 놓았는데…… 그 사이, 현주는 어느새 개수대로 올라와 찬장의 문을 열었다.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개수대 위로 올라오려고 밟은 현주의 발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그냥 놔두면 다칠 거야. 찬장에는 현주가 들기 무거운 도자기와 유리로 된 식기들이 많았다. 어떡하지. 나는 현주를 말릴 수도, 가만 놔둘 수도 없었다. 현주를 말리는 순간, 내 정체가 들통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내 안에서 악마의 속삭임이 계속 울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주의 힘은 자꾸만 나에게 현주가 다치는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쨍!

  불길한 상상은 왜 항상 현실이 되는 것일까. 투명한 유리컵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반짝였다. 현주도 깜짝 놀란 것 같았다. 그러면서 바닥으로 내려가려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안 돼!”

  나를 돌아보는 현주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재빨리 바닥으로 뛰어 내려갔다. 현주는 이미 맨발로 유리 조각을 밟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현주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우는 바람에 정적은 금방 깨져버렸다.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 어쩐담. 나는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서랍을 모조리 열고 반창고와 약을 찾았다. 그 사이에도 현주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안방 화장대 서랍에서 반창고를 겨우 찾아내고, 현주에게 달려갔다. 현주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발바닥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조각이 박히거나 상처가 깊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상처 부위에 약을 바르고 어설프게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주는 울먹이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 혹시…….”

  아뿔싸. 너무 생각 없이 행동해 버렸다. 그래, 이 모습을 보고도 모를 수는 없지. 이제 와서 평범한 인형인 척할 수는 없었다. 현주가 놀라고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는 그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현주가 부모님한테 말하는 순간 나는 내쫓기겠지. 아니면 현주가 나를 내던져 버릴지도. 그러다 문득 현주의 작달막한 손을 보았다. 어쩌면, 부모님이 어린 현주의 말을 안 믿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도 현주가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는다면 버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렇다면…… 그냥 협박해 버릴까. 한 번쯤은 나의 무서움을 이용해도 괜찮겠다는 비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난 사실…….”

  “살아 있구나!”

  현주는 해맑게 웃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말하고 움직이는 인형이라고 해서 다 저주가 깃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행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밖에 생각 못하는 내 처지가 한심스러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나 진짜 부하 생긴 거네!”

  현주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흔들어댔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나에게 이것저것 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현주가 목마르다고 하면 물을 떠다 주었고, 그림 그리고 싶다고 하면 종이와 색연필을 가져다주었으며, 배고파할 때는 냉장고에서 삶은 계란을 꺼내 껍데기까지 까주었다. 내 몸 크기만 한 물건들을 나르고, 두툼한 손으로 서투르게 계란 껍데기까지 까고 나니 금세 진이 다 빠져버렸다. 하지만 현주는 여전히 부족한지 나를 또 불렀다.

  “우리 밖에 나가자!”

  현주는 현관문으로 질주했다. 유리에 베인 발바닥이 아프지도 않은지 엄청난 속도로 뛰어갔다. 나도 다급하게 현주의 뒤를 쫓았다. 

  현주는 까치발을 들고 현관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문이 잠겨 열리지 않았다. 현주가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이 난관을 해결해줄 거라고 믿는 듯했지만 이번만큼은 현주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바깥에 아이 혼자 나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인형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현주가 나를 끌고 현관문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장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현주는 빨리 해달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현주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거실로 돌아와 현주에게 등을 돌리고 못 듣는 척했다. 그저 현주가 지칠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현주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왜 그래? 죽었어?”

  참 나, 죽다니. 죽음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란다. 아가야. 아니, 잠깐만. 갑자기 머릿속에 빛이 번뜩였다. 

  죽은 척하기. 

  인형에게 움직이지 않는 척은 숨쉬기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죽은 인형은 현주의 부하 노릇을 할 수도 없었고, 그러면 이런 난감한 상황도 오지 않을 터였다. 나는 곧바로 깨꼬닥 넘어가는 시늉을 하며 쓰러졌다.

  하지만 현주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집 안에는 조용한 공기만 흘렀다. 실눈을 뜨고 현주의 모습을 확인했다. 작전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현주는 많이 놀랐는지 몸도, 표정도 다 굳어있었다. 내 장난이 너무 심했나. 얼어붙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때 갑자기 현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막상 거실에 덩그마니 혼자 남겨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난 그저 현주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오히려 일을 그르친 것 같았다. 살아 움직이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이 얼마나 매력 없을지는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살아난 척해볼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다시 밖에 나가려고 들 텐데.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고 있는 사이, 방에서 현주가 하얀색 상자를 들고 나왔다. 나는 얼른 다시 눈을 감고 죽은 척했다. 현주가 내 앞에 앉아 무언가 덜그럭 댔다. 곧 차가운 플라스틱이 내 배 위에 얹어졌다. 나는 곧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현주가 가지고 온 것은 병원놀이 장난감이었다. 

  몇 분간 나는 장난감 청진기로 진찰도 받고, 장난감 주사도 맞고, (입 옆으로 흘러내리긴 했지만) 장난감 약도 먹었다. 현주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일어나라는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마지못해 흘러나오는 미소를 숨기며 살아난 척 연기했다. 현주가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어다녔다. 병원놀이에 동원된 적은 있었지만 막상 아이가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살아난 걸 이렇게나 좋아하다니. 울컥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현주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방금 일어난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또다시 현관으로 데려가는 것을 보고 아차 싶었는데, 때마침 현관문이 열리며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잊고 있었다. 주방 바닥에 유리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는 것을. 여자가 날이 선 목소리로 현주를 불렀다. 그리고 현주는 자신을 추궁하는 여자의 말에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야! 얘가 했어!”

  배신당했다. 나름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바로 팔아넘기다니.

  “진짜야! 그치?”

  현주는 나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흥, 내가 대답해줄 리가. 게다가 여자에게까지 살아있는 모습을 들킬 순 없었다. 다행히 여자는 현주의 말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늦은 저녁, 현주의 아빠가 축 처진 모습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남자가 신발을 벗기도 전에 할 얘기가 있으니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아무래도 현주 돌봐줄 사람을 구해야 할 것 같아.”

  남자는 인상을 찡그리며 양말을 벗었다.

  “애를 혼자 놔둔 거야?”

  “오늘만 그랬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이 얼마나 바쁘고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를 목이 터져라 설명했다. 날 선 대화들이 공기 중에 불편하게 떠다녔다. 대화는 엉망진창인 집 상태와 서로의 무관심함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고, 결국에 그 화살은 나에게까지 와버렸다.

  “어쩐지 저 인형 때문인 것 같아.”

  “지금 진지한 대화 중이잖아.”

  “그러니까. 나 지금 진지해. 오늘 아침에 지각한 것도, 부장님한테 깨진 것도, 그리고 현주가 혼자 집에 있었던 것도, 그래서 다친 것도 다 저거 때문이라니까!”

  “당신,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한껏 날카로워진 둘은 서로를 비꼬았다. 나는 이 싸움 역시 내 저주 때문인 것만 같았다. 천장에 먹구름이 가득 끼면서 점점 더 어두워졌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내 저주의 힘도 함께 커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천장에서 무언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물이었다. 내 눈에만 보이는 먹구름이 정말 비를 쏟으려는 것일까. 벽지가 축축하게 젖더니 볼품없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남자가 소리쳤다.

  “뭐, 뭐야!” 

  “뭐긴 뭐야 누수지.”

  여자는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비도 안 오는데 갑자기 무슨 누수야.”

  “당신이 계속 그런 불길한 말 해대니까 그런 거 아냐.”

  “불길한 건 내 말이 아니라 저거라니까!”

  남자가 나를 노려봤다.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다. 버려지기 직전의 상황이라는 것은 그동안 쌓인 감각들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집이 잘못 지어진 걸 왜 가만히 있는 인형 탓을 해. 관리소에나 전화해 봐.”

  “뭐야. 휴대폰은 또 왜 안 터져.”

  남자가 화를 내며 휴대폰을 이불 위에 내팽개쳤다.

  “이 상황이 말이 돼? 저 인형이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건데! 현주야, 그거 내려놔. 버리게.”

  현주는 그 말에 나를 꽉 껴안았다. 나는 현주 품에서 쪼그라들었다. 남자는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었다. 불안한 듯 다리를 떨며 방을 두리번거렸다.

  “집게 같은 거 없어? 저 불결한 걸 맨손으로 잡을 순 없잖아.”

  “어휴, 알았어, 알았어. 현주야. 그거 그냥 버리자. 이리 줘.”

  여자는 남자에게 졌다는 듯이 현주에게서 나를 떼어 내려했다. 여자가 내 머리를 꽉 잡았을 때, 순간적으로 내 몸은 차가워졌다가 다시 뜨거워졌다. 오전에 나를 향해 속삭이던 무관심에 깃든 물건들이 내 안에서 다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현주가 악을 쓰며 나를 잡아당겼지만 여자의 손아귀 힘은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여자의 손에 넘어갔다.

  그때였다. 여자가 방을 나서려는 순간, 문이 쾅 닫혀버렸다. 창문이 열려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방문이 제멋대로 닫혀버리니 두 사람 모두 몸이 얼어붙었다. 그 틈에 현주는 나를 다시 자기 품으로 가지고 갔다.

여자는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금방 아무렇지 않게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남자가 열어보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여자도 이번에는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휴대폰은 여전히 먹통이었다.

  “창문으로 나갈까?”

  “여기 십일 층이야.”

  “그거 있을 텐데. 완강기.”

  “인형 하나 버리자고 이 시간에 창문으로 밖을 나가겠다고?”

  “아…… 창문도 안 열려.”

  “119 불러. 긴급통화는 되지 않아?”

  두 사람의 대화는 다급하고 어수선했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현주는 무슨 생각인지 검은색 매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나를 거꾸로 쳐들고는 내 발바닥에 무언가를 새겨 넣었다.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어눌한 손놀림으로 선을 몇 번 긋더니 절망에 빠진 두 사람을 향해 내 발바닥을 들이밀었다. 

  “현… 지…?”

  “응! 내가 얘 이름 지어줬어. 그니까 버리면 안 돼!”

  현주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현주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여자는 현주가 글자를 쓸 줄 안다는 사실에 놀라느라 여념이 없었고, 남자는 여전히 방문과 씨름 중이었다. 현주와 나는 이 공간에 우리만 있는 것처럼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놀랍게도 점점 먹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형광등 빛은 눈부실 정도로 밝아졌다. 물론 물도 더 이상 새지 않았고, 휴대폰도 다시 켜졌다. 방문 손잡이를 잡아당기던 남자는 갑자기 열린 문에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러웠던지 여자와 현주는 눈물 빠지게 웃기 시작했고, 남자는 스스로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들 사이에 낯선 웃음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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