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첨밀밀(1996)>에서 본토 우한에서 홍콩에 온 순박한 시골뜨기 리샤오쥔(黎小軍, 여명)과 광저우에서 온 리챠오(李翹, 장만옥)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마음으로 의지하는 친구가 됩니다. 리챠오는 가진 돈을 다 털어서 음반(CD) 장사를 시작했지만 경험이 없어서 돈만 날리고 망하고 말지요. 리샤오쥔은 상심한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만두국을 끓여서 함께 먹습니다. 좁은 공간에 남녀가 함께 있다보니 그렇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무슨 충동 때문이었을까요? 둘은 함께 밤을 보내고 말죠.
리샤오쥔은 고향에 샤오팅(小婷)이란 약혼자가 있었고, 오로지 부자가 되려는 꿈을 좇아 홍콩에 온 리챠오에게 촌스럽고 순박하기만한 리샤오쥔은 그저 남자인 친구일 뿐이었죠. 의도하지 않게 리챠오와 선을 넘었기에 혼란스럽고 쑥스럽기만한 리챠오쥔에게 리챠오는 지난 밤에 있었던 둘 간의 일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덤덤하게 이야기해 줍니다.
"괜찮아. 우리는 그냥...... 서로를 따뜻하게 해준 것 뿐이야.
춥고 비도 내리고, (춘절인데도) 고향집에 돌아갈 수 없어서
(어젯밤) 우리 두 사람은 너무 외로웠던거야."
그말에 리샤오쥔은 비로소 얼굴이 밝아지며 신년 인사말을 서로 하나씩 교환하고 두 사람은 웃으며 헤어지죠. 그렇게 우연(偶然)처럼 선을 넘은 일이, 앞으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들을 몰고 올지 미쳐 모르는 채......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떠올랐던 시가 쉬즈모의 우연(偶然)이었어요.
偶然/ 徐志摩
我是天空裡的一片雲 나는 하늘에 떠도는 한 조각 구름
偶爾投影在你的波心 우연히 당신의 물결치는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웠죠
你不必訝異無須歡欣 놀라지도 말고 기뻐하지도 마세요
在轉瞬間消滅了蹤影 눈 깜빡하면 사라질 그림자일 뿐이니까
你我相逢在黑夜的海上 당신과 내가 칠흑 같은 밤바다에서 만났을 때
你有你的我有我的方向 당신에겐 당신의, 그리고 나에겐 나의 갈 길이 있었죠.
你記得也好最好你忘掉 기억해도 좋지만 그냥 모두 잊어 주세요
在這交會時互放的光亮 우리 함께한 그 때, 우리 서로를 비춰주던 그 빛들을......
첨밀밀에서 리챠오의 대사는 이 시의 내용과 많이 닮았죠. 각자의 갈 길이 정해져 있는(你有你的我有我的方向) 두 사람이 우연히 너무 가까워지고, 운명처럼 정해진 이별이 찾아왔을 때, 그 동안 쌓인 친밀함의 무게 때문에 상대방이 힘들어 할까봐 애써 관계의 농도를 희석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나간 추억들은 모두 눈 깜빡하면 사라질 그림자(瞬間消滅了蹤影)일 뿐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혀질 것이라고......
이 시를 쓴 쉬즈모는 중국 현대시 운동을 이끈 인물입니다. 서구 유학파였던 그는 전통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랑과 낭만을 노래했어요. 1926년에 발표된 이 시에 도시 지식인, 대학생, 신여성,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이 열광했었죠. 당시 젊은이들은 구습과 제도, 부모와 사회의 압박 속에서 숨 막혀하다가, 보다 가볍고 보다 자유로운 연애를 표방하는 것 같은 이 시를 접하고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며 생각이 많아집니다. 어느덧 우리는 함께 하며 온기를 나누는 것보다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함께 있는 일의 고단함을 견디기보다, 헤어지는 것의 편리함에 더 익숙해 진 것은 아닐까요? 마음이 시릴 때 우리를 진정으로 데워주던 온기는,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듯 쉽게 구하고 쉽게 버려도 되는 것들이었을까요? 우리가 잊어도 좋다고 내던진 그 '서로를 비춰주던 빛들'은 정말 잊어도 되는 것들이었을까요? 춥고 외로운 밤, 누군가의 온기를 잠시 빌렸던 우리들 자신에게 새삼 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