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尺絲綸直下垂(낚싯줄 드리우고 앉았으니)/ 德誠
千尺絲綸直下垂 [천척사륜직하수] 기나긴 낚싯줄 드리우고 앉았더니
一派才動萬波隨 [일파자동만파수] 작은 물결 하나 일자 수만 물결 따라 일어나네.
夜靜水寒魚不食 [야정수한어부식] 고요한 밤 강물도 차가워 고기는 입질도 않으니
滿船空載月明歸 [만선공재월명귀]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가노라.
이 시는 당나라 말의 선승 덕성(德誠) 선사의 선시이다. 1연에 기나긴 낚싯줄을 드리운다는 것은 깊은 물속에 사는 큰 고기를 낚기 위한 것으로 보다 큰 것, 보다 많은 것들을 추구하는 속세의 욕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마음속에서는 번뇌로 인하여 잔 물결이 일고 그 잔 물결은 더 많은 물결을 몰고 와서 마음속(心淵)은 번뇌로 가득 차게 된다(2연). 욕망과 번뇌와 오래 싸우는 가운데 하루가 다 가고, 밤이 오자 모든 것을 체념하고 돌아오는데 빈 배(빈 마음)를 가득히 채우는 달빛을 보며 "텅 빈 충만", 니르바나를 깨우쳤다는 이야기이다. '비울수록 채워진다'는 삶의 큰 지혜에 공감하거나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많은 것들을 오래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이 시는 월산대군(月山大君)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어 월산대군은 이 시를 번안한 시조를 한 수 남기기도 했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드리오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無心)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월산대군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의 맏아들로 태어나서 장차 왕위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의경세자가 20세에 세상을 떠나자 이때 불과 4세였던 월산대군은 세손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당시 7세이던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후에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1468년 세조가 병세가 깊어져 왕위를 물려주자 예종은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예종이 즉위 14개월 만에 피부염이 악화된 패혈증으로 황망하게 승하하자 왕위 계승이 많이 복잡하게 되었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3세에 불과했고 세자 책봉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마땅히 예종의 형님 의경세자의 맏아들이자 세조의 적장손이었던 월산대군이 보위에 오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월산대군의 친동생 잘산군(乽山君)의 장인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자신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서 세조의 비 정희왕후와 손을 잡고 잘산군을 예종의 양자로 입적하며 보위에 올리고 말았으니 이분이 성종 임금이다.
따라서 월산대군은 보위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무척 컸지만 여러 가지로 일들이 꼬이면서 왕좌를 친동생에게 빼앗긴 셈이다. 형 대신 왕위에 오른 성종과 우애가 돈독하였고, 월산대군은 불만이나 서운함을 내비친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동생이 신경 쓰일만한 교우 관계나 정치적 행동을 극도로 조심해 종친의 모범으로 받들어졌다. 하지만 德誠선사의 한시를 애송하여 시조까지 남긴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내비친 적이 없었던 마음속 깊은 곳의 안타까움과 끝없이 피어오르던 마음속 번뇌와 아픔을 다스려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수행의 흔적이 느껴진다.
월산대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시 짓는 것도 즐겨서 많은 시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시와 문장이 명나라에까지 명성이 높았다. 일성록에 따르면 정조는 월산대군의 시를 "고상한 운치가 애연이 넘쳐흘렀다"라고 칭송하며 많은 종친들의 뛰어난 작품 중에서도 월산대군의 작품들을 가장 으뜸으로 꼽고 있다. 월산대군은 침착 담백한 성격으로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여 자연 속에 묻혀서 시를 쓰면서 풍류를 즐기며 살다가 비교적 이른 나이인 34세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