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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Nov 01. 2022

네 번째 합창단과 왼손 지휘자 21

D-minor 혹은 라단조

나는 지휘자다.  거창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를 떠올리겠지만 나는 동네 아마추어 합창단을 세 개나 지휘하고 있는 생계형 지휘자다. 그것도 왼손으로 지휘하는 이상한 지휘자다. 그런 나에게 네 번째 합창단이 나타났다!



정말 한 잔만 마시는 게 맞냐고 심통을 부리던 경수와 그만 좀 하라며 웃으며 면박을 주는 주혁, 이 꼴은 안 보겠다며 조용히 일어나는 해진, 벌써 깔끔하게 먹은 것을 치우고 긴 주방장 모자를 벗은 채 같이 자리에 앉아 있는 윤성. 그저 미소를 머금은 채 반달눈을 하고 있는 상진. 결국 피우지도 못한 담배 한 개비를 꺾고는 새로운 담배를 뺄까 말까 고민하는 미향. 나는 찬찬히 이들을 둘러본다.    



그날의 월요일 이후 2주의 연습이 더 진행이 되는 동안, 목요일의 직장인 합창단의 찬조출연은 무리 없이 소화되었다. 가사가 어렵지 않으니 외워서 간단한 동작을 넣고 마치 춤추듯 노래하자고 했건만 정작 연주 때에는 인사부 과장님 한 분이 기어코 동작을 무시하고 로봇 춤을 추었다. 우리는 마치 계획했다는 듯이 놀라지 않고 가볍게 무시하면서 공연을 마쳤다. 연습 중에 특별한 변수를 만나도 놀라거나 반응하지 말라고 강조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공연 후에 과장님 때문에 가사를 잊어버릴 뻔했다는 여직원 몇의 질책이 장난스럽게 오갔고 그걸 듣고도 '오늘 내가 한 껀 했다'며 뿌듯해하는 그의 모습을 누가 미워할 수 있었을까. 나름 인상적인 공연이었는지 대표님의 금일봉을 받아 온 총무 박 과장은 '오늘은 소고기!'라고 소리르 지르고 다녔고 박 과장의 동기인 황 팀장은 '도대체 소고기를 누구 코에 붙일 수나 있냐'고 '소고기 말고 대고기로 먹자'고 말도 안 되는 아재 개그로 눈총을 받는다. 구박을 당해도 기분 좋은 황 팀장은 '대고기 안되면 중고기라도...'라며 개그를 시도하다 직원들의 거센 단체 야유를 받는다.



화요일 누님들은 단체로 관광을 간다고 한 주를 쉬었다. 관광버스를 빌렸고 지휘자도 가야 한다고 떼를 쓰긴 했지만 사실 내가 거기에 끼면 분위기는 뻔하지 않은가. 덕분에 나는 평화롭고 여유로우며 마치 시간이 멈춘듯한 휴식을 취하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나를 빼고 다 같이 동해의 어디로 가서는 바다 구경도 하고 맛있는 뭐도 먹고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합창단이 함께 놀러 가면 합창이 생긴다. 즐거운 우리들이 즐거워 노래하는데 그걸 듣는 남들이 환호하고 감동받으면 그게 노래할 맛이라고 할 것이다. 누님들은 사람 없는 바닷가 어디에 쉬려고 다 같이 앉아 있었는데 그곳이 꼭 야외 공연장 같아서 즉석에서 누가 던진 한 소절에 모두가 따라 노래하다 합창 몇 곡을 반주 없이 연달아 뽑아냈다고 했다. 그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서 사진 찍고 동영상 찍고 그랬다면서 아마 인스타나 유튜브나 뭐 그런 어디에 보면 우리 모습이 올라올 거라고 그다음 연습에서 누님들이 전화기에서 뭘 자꾸 뒤져보는 통에 그나마 젊은 내가 찾아보고 나오면 좋아요 누르겠다고 겨우 가라앉히기도 했다. 아, 물론 어디에 올라간 누님들의 동영상을 찾긴 했으나 누님들의 기억과 실제 동영상의 음악은 오래된 첫사랑의 얼굴처럼 달랐기에 못 찾았다고 둘러대긴 했다. 



금요일 합창단은 또 신입이 들어왔다. 프로골퍼인 경수는 일정상 금요일이 매우 어려운데도 대회 몇 개를 포기하면 괜찮다면서 신입으로 지원하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상진과 나 그리고 주혁이 말리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작 신입으로 들어온 건 네 번째 합창단의 베이스 광선이었다. 광선은 180cm가 훨씬 넘는 장신에 점잖은 30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허허 웃는 소리가 꼭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었지만 옷은 말끔하게 차려입고 머리는 7:3 가르마에 왼쪽 머리가 항상 하늘 위로 삐쳐 있는 스타일을 유지했다. 그가 금요일 합창단에 나타났을 때 나와 상진은 놀랐고 주혁은 반가워했다. 알고 보니 주혁이 광선에게 바람을 넣은 것이었고 광선은 금요일도 합창이 웬 말이냐며 난색을 표했지만 속으로는 '일주일에 두 번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금요일 합창단은 남성합창단이라 선이 굵은 음악을 많이 연습했다. 주혁과 광선의 합류는 실질적인 단장인 노교수님을 흡족하게 했고 교수님은 이 참에 다른 파트도 적극적으로 구인을 해보자고 했더랬다. 이 말을 들은 단원들은 화학과 제자들만 아니면 된다고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그렇게 한 주가 정신없이 음악으로 채워졌고 사람들과 함께 흘러갔다. 



그리고 나는 그다음의 월요일을 만난다. 무척 피곤하고 무거운 월요일이었다. 연습 시간이 되기도 전에 지치는 마음이었다. 

 

"우리 정기연주회는 이 곡을 하고 싶어요."

나는 모차르트의 레퀴엠(K.626) 악보를 들고 있다.


진혼곡,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곡, 모차르트의 유작 그리고... D 마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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