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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Sep 25. 2016

벽 헤는 밤

[7호] 성북동 문화 아지트 | 글·사진 최나현

  성북동은 감정에 바람이 자주 이는 이에게 여러모로 좋은 동네다. 발끝만 보고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안내자 역할을 묵묵히 해주는 성곽길의 돌담이 있고, 몸을 숨겨 걷기에 부족함이 없는 굽이굽이 마을길과 생각이 머물다가는 오래된 가옥, 외딴 목과 맞닿아 있는 고갯마루, 침묵과 위안의 시간을 건네는 큰어른 길상사까지. 담이 높든 낮든 차별하지 않고 집집마다 하늘이 들어앉은 이 동네에서 나는 전시 프로젝트 [한벽한달]을 진행해오고 있다.


  서시(序詩)


  2010년 여름, 큐레이터가 주인공인 음악극을 준비하면서 나는 현장의 큐레이터 몇 분을 소개받아 인터뷰를 진행했고, 실제로 그분들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시작이 수월해서였을까, 대본이 중반부를 넘어서자 자력으로 글이 잘 풀리지 않는 날이 많아졌고, 그럴 때면 책상 앞을 떠나 한정 없이 걷다가 발길 닿는 곳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한 선생님의 조언으로 미술관에서 꼬박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작품들 저마다 가진 매력이 다른 것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날의 나는 넓은 벽에 걸린 아주 작은 크기의 어떤 그림에 이끌려 그 앞에서 유독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그날부터 근 한 달을 일주일에 두세 번씩 그 그림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돌아오곤 했다.


  한 작품 앞에 긴 시간 머물러 있는 게 지루하지 않을 수 있구나 했고, 구석에 마련된 자리에서 전시장 안의 여백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는 날도 차츰 늘었다. 주어진 무대를 어떻게 채울까 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나를 향해 흰 벽과 흰 벽 사이의 빈 공간에서 사유의 바람이 불어왔다. 몰아치듯 다만 부끄럽게 완성된 극은 큰 탈 없이 무대에 올랐지만, 그 이후로 나는 어쩐지 다음 대본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롭게 시작할 예정이었던 일이 어그러지며 느닷없이 백수가 된 2013년 여름에는, 길상사의 점심공양에 꽤 많은 신세를 졌다. 법정스님의 의자가 놓인 진영각으로 오르는 길가에 앉아 풀숲냄새에 몸을 숨기고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게 식후사(食後事)였고, 오후에는 절 아래 단골 찻집에서 주인의 외출을 거들며 대신 자리를 보는 것이 나머지 일과였다. 그러니 찻집의 빈 벽을 유심히 보게 된 것도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벽마다 흔한 명화 모작이라도 하나 걸려있을 법한데, 벽 한 쪽이 그저 텅 빈 자체로 하얗게 그 단아함을 뽐내고 있었다.


  저 벽이 누군가에게 무대가 될 수 있다면, 그 누군가가 정말 ‘누구라도’ 된다면 참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 곳은 결국 내 무대도 될 수있지 않을까. 조용히 살자던 다짐과는 다르게 생각이 자꾸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다. 찻집의 주인마저 기꺼운 마음으로 지지자가 되어준 덕에 이 프로젝트는 금세 [한벽한달]이라는 이름을 달 수 있었다.


한벽한달 @동네공간


  벽 하나에 나 하나


  벽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마주 선 사람과 말이 안 통해 답답하다는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사람들을 만나 한벽한달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함께 벽 앞에 서면, 답답하기는커녕 특유의 담담함과 편안함에 이야기가 절로 풀렸다. 세상에, 벽으로 소통을 하게 될 줄이야!


  볼펜으로만 반복된 그림 작업을 하신다는 분, 종이에 실로 꽃을 수 놓는 분, 20대 시절을 채운 여행 사진을 갖고 온 분, 사랑하는 사람이 만든 버튼(뱃지)을 주섬주섬 꺼내놓으며 이걸로도 전시를 할 수 있겠냐던 분까지, 정말 다양한 이야기와 여러 형태의 아트워크들이 바쁘지 않은 간격으로 모여 들었다. 이 작은 벽 하나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놓는다는 게 신기하고, 또 그런 상황에 감사했다. 일상의 나를 잠시 벗어두고, 예술적 감성을 가진 나로 살 수 있는 한 달이 생기는 것. 나만 알고 있었던 나를 텅 빈 벽에 그리는 것.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그 벽을 앞에 두고 함께 이야기하고, 오가는 사람들이 또 그 벽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


  그 달의 전시 철수를 위해 작품을 거둬들이는 날이면 나는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떠올린다. 그림자가 드리웠던 시기에 나를 쉬게 했던 그의 시처럼, 이 벽도 작품을 건 사람에게나 보러온 사람에게 작은 ‘그 무엇’이라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랬다. 백석 시인이 앞서 일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흰 바람벽에 있다고. 그들은 사실, 하늘이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존재들이라서 이리도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이라고.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인생은 적어도 한번은 쓸쓸하며, 가난은 모두의 고민이다. 그러니 지금 여러분들도 생의 한 점을 꺼내들고 벽 앞으로 오셨으면 한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든, 공들여 만든 작품이든, 몇날 며칠을 밤새워 끙끙대며 쓴 잡문이든 좋다. 아니 좋고 나쁨을 가르는 것이 이미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누구든 보라고 벽에 거는 용기부터가 이미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누구든 시인이고 사진가며 화가이자 흰 바람벽이 되는 것이니까.


김여행 여행展(2015) @아지트 아이슬란드, 상수동


  오늘밤에도 벽이 바람에 스치운다


  성북동 동네공간의 한벽 귀퉁이에 이런 글이 적혀있다.


[한벽한달]은 창작집단미러의 월간전시프로젝트입니다. 한달 동안 벽 하나를 채우거나 비울 수 있습니다. 유무형의 아트워크를 통한 자기표현을 지지합니다. 방황과 방랑 그 사이 어디쯤이어도 좋습니다.


  방황하고 방랑하는 우리를 지지한다. 오늘밤에도 벽이 바람에 스치운다.



최나현은 경남 통영 출생. 대학 입학 이후로 2013년까지 정릉-길음-삼선-돈암을 거치면서 성북주거투어를 지속하는가 싶었지만, 그만 월세에 밀려 북으로 올라간 뒤 다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창작집단미러의 대표로 [한벽한달]과 [한벽극장] 프로젝트를 동네공간 및 17717과 함께 하고 있다.

전시 및 공연 기획 문의 enter.mirror@gmail.com




성북동천은 성북동 주민과 지역에서 활동하는 민간 법인·단체, 비영리조직, 전문가 및 예술인들이 모여 설립한 주민 공동체로, 성북동에서 마을잡지 발간, 마을탐방 진행, 교육·문화 프로그램 기획, 지역 내 공론의 장 마련 등 마을공동체 형성과 주민간 연대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는 성북동천 내 마을잡지 편집위원회가 발행하는 마을잡지이며, 7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의 '2016 마을미디어 활성화 주민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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