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북 Feb 04. 2018

시인 김광섭과『성북동 비둘기』

[6호] 글 박미산

  시인 김광섭(金珖燮, 1905~1977)은 1935년 『시원』을 통해 시 「고독」을 발표한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을 부단히 시작활동에 전념하여 『동경』(1938), 『마음』(1949), 『해바라기』(1957), 『성북동 비둘기』

(1969), 『반응』(1971) 등의 시집과 『김광섭 시 전집』(1974), 그리고『김광섭 시 선집- 겨울날』(1975) 등 전집과 선집을 포함하여 모두 7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그는 1905년 함경북도 경성 어대진이라는 바닷가 근처에서 태어났다. 중동학교와 1933년 와세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모교인 중동학교의 교사로 부임하는 한편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한다. 그는 모교인 중동학교에서 10년간 교단에 섰는데, 1941년 중동학교 학생들에게 아일랜드 시를 강의하면서 반일과 민족사상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3년 8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해방을 맞이한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한국문단은 좌우를 막론하고 온통 친일의 흔적으로 얼룩져있었다. 김광섭은 해방 후 우익 문학단체인 ‘중앙문화협회’ 창립을 주도하고, 이 단체의 후신인 ‘전조선문필가협회’의 총무부장으로 활약했다. 또한 미 군정청 공보국장을 지내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공보비서관을 지낸다.

  그는 1951년 관직을 떠나 경희대학 교수로 임용되면서 1955년 1월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과 ‘한국자유문학자 협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김광섭은 1956년 조연현의 『현대문학』에 맞설 수 있는 기관지 『자유문학』을 창간한다.

  그는 1961년에 서울 성북구 성북동 168번지 34호에 집을 지어 입주하는데 이곳이 그의 대표작인 「성북동 비둘기」의 산실이다.

『자유문학』이 1964년에 재정난을 겪다가 마침내 휴간에 들어가며 김광섭은 그 여파로 고혈압 증세를 보여 1965년 4월, 60세의 나이에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지던 경희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야구경기를 관전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진다. 그는 투병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정들었던 성북동 집을 팔고 성북구 미아동으로 이사한다. 그는 1969년 그때의 추억을 더듬어 네 번째 시집인 『성북동 비둘기』를 간행한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삶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전문, 『성북동 비둘기』(1969, 범우사)



그는 「성북동 비둘기」를 쓰게 된 모티브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뇌출혈로 메디칼 센터에 입원하여 오랜 혼수상태를 겪으면서 사경을 헤맸어요. 그 후 성북동 나의 집 마당에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따스한 훈풍이 불고 꽃이 피어 있었어요. 뇌일혈이란 말을 듣고 내 시적 생명은 끝났다는 절망감을 안고 있었지요. 그때, 하늘을 바라보다가 아침마다 하늘을 휘익 돌아 나는 비둘기 떼를 보게 되었어요. 
「성북동 비둘기」의 착상은 거기에서였지요. 돌 깨는 소리가 채석장에서 울리면 놀라서 날아오르는 새들, 그러나 저것들이 우리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 줄 것인가. 돌 깨는 산에서는 다이나마이트가 터지고 집들은 모두 시멘트로 지어서 마음 놓고 내릴 장소도 없는 저것들이란 데 생각이 머물렀어요.”
- 김광섭, 『김광섭시선집』, 일지사, 1974


  이 시는 서울의 성북구 성북동이라는 구체적 ‘장소’가 폭력적으로 개발되어 적대적이고 비정한 장소로 변화되는 장소 상실을 노래한 작품이다. 1960년대를 기점으로 진행된 급속한 도시화는 도시인구의 과밀화, 지방 중소도시의 상대적 침체, 농촌 노동인구의 절대 부족, 도시 주변의 항구적인 빈곤지대 형성, 도시의 교통·위생 등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성북동의 자연경관이 파괴된 것도 1960년대 이후 이루어진 산업사회로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도시개발과 연관된다.

  도시개발은 사람들로부터 거주할 장소를 빼앗고,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생업을 박탈하고, 자아정체성을 붕괴하고, 그들의 마음에서 사랑과 평화마저 빼앗아 가버린 비인간적이고 타자 지향적인 개발이라는 것을 ‘비둘기’라는 상징을 통해서 시인은 노래했다. 「성북동 비둘기」는 ‘성북동’이란 구체적 장소를 통해 폭력적 도시화 과정에서 경험하는 원주민의 뿌리 뽑힌 느낌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광섭은 1945년부터 1960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단을 만들고 이끌어간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김광섭을 한국 문단의 건설자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시인이라는 측면에서 기억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김광섭을 「성북동비둘기」의 시인으로 기억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시인으로 시작해서 시인으로 생애를 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대부분 시인들이 활동 초기에 가장 뛰어난 작품을 남기는 우리 문단의 일반적 관례와는 달리 만년에 인생에 대한 달관과 원숙미를 과시하며 훨씬 훌륭한 작품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독과 고요를 동경하는 시인으로 출발한 그가 뇌출혈로 쓰러져 문단 정치 일선을 떠나 실존의 세계로 돌아온 것은 역설적이게도 축복이 되었다.


* 참고문헌

「김광섭, 시인이란 기억 뒤의 문단건설자」, 홍정선

「김광섭 후기 시에 나타난 장소 이미지와 생태적 상상력」, 송명희


박미산은 2006년 ‘유심’,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 ‘태양의 혀’(서정시학, 2014)을 냈다. 성북동에 살고 있으며 지역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 또 서울디지털대학 초빙교수로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6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5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5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성북동의 숨은 보물찾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