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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Feb 05. 2018

사적지 선잠단지 해설

[6호] 우리 동네 문화재 이야기1|글 김소원(여성문화연구회 회장) 

뽕나무와 누에


  뿌리부터 잎, 열매까지 버릴 게 없는 나무가 뽕나무이다.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모두 주었으니 신이 내린 나무라는 별명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합성섬유가 주류를 이루는 요즘도 ‘비단’에 대한 환상을 저버리지는 못한다. 손의 촉감만으로도 그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어디다 견줄 수 있을까. 하물며 천연섬유로만 옷을 해 입었던 전근대 사회에서 비단으로 만든 옷은 단연 최고의 옷이었다. 이러한 비단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얻고, 누에는 뽕잎을 먹고 자라 고치를 짓는다.


  누에의 머리는 말처럼 생겼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옛날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 오랫동안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집에는 딸과 말 한 마리만 있을 뿐이었다. 딸은 아버지가 그리워 말에게 “우리 아버지를 모시고 오면 네게 시집갈 텐데” 하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말은 몇날며칠을 걸려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는 집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딸은 그냥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했는데 말이 사람 마음을 헤아려 아버지를 모시고 온 거라고 했다. 그때부터 말은 풍성한 음식도 먹지 않고 딸을 보면 흥분해서 날뛰었다. 할 수 없이 딸은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했다. 아버지는 말을 사위로 삼을 수 없기에 말을 화살로 죽이고, 가죽을 벗겨 뜰에 널어두었다. 딸이 그 말가죽을 걷어찼다. 그러자 말가죽이 갑자기 날아올라 소녀를 뒤집어씌우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가 딸을 찾아 헤맬 때 큰 나무의 나뭇잎 사이에서 말가죽으로 둘러싸인 딸을 찾아냈다. 하지만 딸을 이미 꿈틀꿈틀 움직이는 벌레 모양의 생물로 변했다. 그 벌레는 말 모양의 머리를 천천히 흔들면서 실을 토해냈다. 실을 토해내는 이 생물을 사람들이 누에라고 불렀고, 그 나무를 뽕나무라고 불렀다.


  이 이야기는 뽕나무와 누에 탄생의 신화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실제로 누에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뽕잎을 먹고 키우는 동안 습도와 온도를 일정하게 맞춰야 한다. 그래서 누에를 키우는 일은 짧은 시기에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쉬운 노동은 아니었다.



선잠단과 선잠제례


  서울시 성북구 성북초등학교 담장 건너편에는 뽕나무를 품고 있는 ‘선잠단지’가 있다. 붉은 홍살문이 처져 있는 것으로 보아 황실과 관련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국조오례의》‘길례’ 에 ‘선잠단은 선잠인 서릉 씨를 제향한다’고 되어 있다. 선잠이란 먼저 양잠을 했다는 뜻이니, 선잠단은 잠신에게 제례를 지내던 곳이다.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했던 조선은 ‘국가오례의’에서 정한 ‘길례’에 따라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구분해 23가지 국가제례를 지냈다. 종묘와 사직에서 지낸 대사 다음이 중사인데 선잠제례는 중사로서 뽕잎이 나

기 시작하는 음력 3월에 길인인 뱀날에 제향을 올렸다.

  인류 최초로 양잠을 하던 서릉 씨는 누구인가? 그는 중국 ‘삼황오제’ 시대 중앙의 상제였던 황제(黃帝)의 부인이다. 누조가 어느 날 차를 마시다 실수로 누에고치를 뜨거운 찻잔에 빠트렸다. 그런데 고치에서 가느다란 실이 계속 풀어져 나왔다. 그때부터 누조는 양잠의 이치를 알고 양잠을 시작했고, 백성들도 뒤따라 하였으니 선잠제는 서릉 씨에게 양잠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사》에 선잠단의 규모, 제향일, 제사의식, 폐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부터 선잠제례를 정례화한 것으로 보인다. 선잠단의 위치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선잠단이 동소문 밖 사한이(지금의 성북동)에 있다고 되어 있고, 《성종실록》에는 선잠단은 북교(北郊)에 있다고 되어 있다. 북교라고 하면 서울도성의 북문 밖 근처를 말하지만, 창덕궁 북쪽에 선잠단이 있어 북교로 인식한 듯하다. 고종 대 편찬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선잠단이 동교(東郊)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 보았을 때 지금 선잠단지가 있던 곳이 선잠단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선잠단은 단의 크기만 가로 세로 7미터였으니 전체의 크기는 옆의 성북초등학교를 넘어서는 크기였을 것이다.

  선잠제례를 지낸 날은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뽕잎이 나는 3월(음력)에 길일인 ‘뱀날’에 하였다. 하지만 뽕잎이 나지 않으면 날짜를 변경하기도 하였다. 선잠제례는 중사였기 때문에 왕이 직접 오지는 않고 관원이 대신 지내는 ‘섭사’로 진행되었다. 선잠제례에서 처음으로 술을 따르는 초헌관은 정1품 관원이,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관은 정3품 당상관이,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종헌관은 정3품 당하관이 담당하였다.



여성의 부덕, 길쌈


  태조는 ‘농업과 양잠은 의식(衣食)의 근원이고 백성의 생명에 관계되는 것’(태조실록)이라고 말했다. 전근대사회에서 경제의 양축은 농업과 양잠이었다. 농업으로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양잠으로 입을거리를 마련했다. 조선시대 국가의 중요 산업은 ‘권농상(勸農桑)’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이 말을 풀면 농업과 뽕나무를 키우는 일을 권장한다는 뜻이다.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던 일은 《삼국사기》에도 나오는데 고대사회부터 중요한 국가사업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에서는 여러 가지 베 가운데 왜 양잠을 장려했을까?

전통사회의 직물은 무명, 삼베, 모시, 비단이 있었다. 무명을 얻기 위해서는 목화를, 삼베를 얻기 위해서는 마를, 모시를 얻기 해서는 모시풀을 경작해야 한다. 그런데 뽕나무는 따로 경작하지 않아도 산과 들에서 자라고 있었다. 따로 땅이 필요 없고, 누에를 키워 비단을 얻는 데까지3월부터 5월까지 약 40~50일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여 단기간에 수확할 수 있는 일이었다. 뽕잎을 따고, 뽕잎을 누에에게 먹여 키우는 일은 농사를 지어야 하는 다른 의료작물과 달리 여성의 노동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남경여직(男耕女織)은 남자는 농사짓고, 여자는 베를 짠다는 말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견우직녀’ 이야기에서도 남경여직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견우직녀’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 베를 잘 짜서 왕비가 되었다는 민담에서 고대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에 여성의 길쌈 노동과 그 생산물인 직물은 신성성까지 부여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길쌈 노동의 신성성은 사라지고, 여성 노동을 상징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적 가부장제가 정착되면서 여성의 역할은 가정으로 축소되었다. 그 시기 여성의 덕목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길쌈과 바느질

은 빠지지 않았다.


  조선전기 여성 교훈서인 《여사서(女四書)》에는 ‘농부는 밭가는 일에 힘을 써야 하고 선비는 배우는 일에 열심이어야 하며 여자는 베짜는 일에 힘써야 한다. 농부가 게으르면 오곡을 수확할 수 없고 선비가 게으르면 학문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여자가 게으르면 베틀이 놀게 되어 가정살림이 궁핍하게 된다’ 했다. 부인은 베 짜고 옷 짓는 일을 아름답게 여기라고 하여 여성이 길쌈에 힘쓸 것을 강조하고 있다.

  길쌈은 한 가정의 자급자족을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가난한 가정에서는 길쌈의 생산물을 팔아 가정경제를 이끌어 갔다. 군포를 내기 위해 길쌈을 해야 했다. 선잠단은 양잠만이 아니라 여성의 노동이었던 길쌈과 바느질을 대표한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왕은 친경례를 왕비는 친잠례를


  선잠단을 이야기할 때 나란히 짝을 이루는 곳이 선농단이다. 선농제는 농경신 염제 신농씨에게 제를 올린다. 신농씨가 남신인 반면, 서릉씨는 여신이다.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선농단에서 제사 지내고, 왕은 친히 농사짓는 ‘친경’을 했다면, 양잠을 위해서 선잠단에서 제사 지내고, 왕비는 친히 양잠하는 ‘친잠’을 했다.

  왕비의 친잠례는 왕비가 중심이 되어 내·외명부의 여성들을 거느리고뽕잎을 따고 누에에게 뽕잎을 먹이는 모범을 보이는 행사이다. 이는 일반 부녀들에게 양잠을 권장하는 의식으로 친경례와 더불어 중요한 국가의례였다. 친잠례는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드러내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친잠례를 할 때에는 잠모(蠶母)라는 양잠 기술자가 동참하였다. 잠모는 태종 16년에 조종잠실과 미원잠실에 배치하였다는 기록이 처음인데 관비에서 선출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양잠을 장려하고 양잠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모범 양잠소라 할 수 있는 ‘잠실’을 두었다. 잠실은 크게 세 가지인데, 궁궐에 두었던 궐내잠실, 한양 인근에 두었던 경중잠실, 각 도에 두었던 도잠실이 그것이다. 이들 잠실에는 잠모가 배치되어 양잠 기술을 가르쳤던 것이다. 잠모는 궁녀, 의녀처럼 조선시대 공적인 영역에서 일했던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의 지킴이 활동


  여성문화유산연구회에서는 선잠단지에서 지킴이 활동으로 격주로 금요일에 무료해설을 하고 있다. 양잠 농가도, 길쌈하는 일도 사라진 지금 선잠단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선잠단은 종묘에 배향된 왕비들을 제외하고 여성이 국가제례의 대상이 되는 유일한 곳이다. 여성이 행사의 주체가 되는 친잠례 역시 그 의미를 새롭게 찾아야 한다. 전통사회에서 여성은 공적인 일에서 제외되었지만 길쌈의 결과물은 군포를 대신하였고, 여성의 부덕으로만 취급되었던 길쌈 노동은 우리 사회의 의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현대에 와서는 제사가 기계공업으로 바뀌기 시작해도 누에고치를 지어 공판장에서 팔아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화학섬유가 등장해 가내수공업적인 양잠과 길쌈이 사라지는 가운데 피복노동자가 되었던 여성들이 있었다. 화학섬유가 대거 등장하면서 길쌈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사람이 사라지고 있기에 선잠단에서 전통의 계승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성문화 유산연구회는 2004년 동아리 ‘여성문화 해설사회’로 출범한 비영리 민간단체이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양성 평등 입장에서 해석하고 연구하는 모임으로 매주 2, 4번째 주 금요일에는 선잠단지에 관한 무료해설을 하고 있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6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5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5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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