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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Feb 05. 2018

선잠단지 위에 서서

[6호] 우리 동네 문화재 이야기2|글 박진하

  성북로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나아가다 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삼선교 로터리부터 시작한 큰 대로는 길게 마을버스 종점인 우정공원까지 이어진다. 또 다른 길은 선잠단지가 있는 지점에서 갈라져 길상사로 나아간다.

  선잠단지라고 특별한 볼거리를 기대하고 간다면 크게 실망할 수 있다. 두 갈래 길로 나누어지는 지점에 위치한 이 사적지는 계단과 뽕나무 밭,그리고 선잠단지라는 표지 석이 전부이다. 선잠단지는 지표면보다 높은 지단 위에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지면에서 단지까지는 계단을 이용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크게 계단은 상단과 하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래는 6개의 계단이, 위는 5개가 있다. 마지막으로 댓돌이 추가되어 총 12개의 계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단지의 높이를 이처럼 높게 만든 것은 국가에서 받드는 신위의 권위를 지키려는 의도와 계단을 올라 다가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심을 가지게 함이다.

  다 올라서면 붉은 홍살문이 앞을 가린다. 평상시에도 늘 잠겨 있어 들어 갈수 없었지만 며칠 전부터는 이 문마저도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공사를 위한 차단막까지 놓여 있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공사를 할 기미는 없이 차단막으로 외부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 너머로 뽕나무 밭과 멀리 표지석이 보인다. 홍살문과 표지석인 설치된 제단까지는 자갈길이 만들어져 있다. 그 양쪽으로 뽕나무들이 식재되어 있다. 세 줄로 나란히 서 있는 뽕 나무 밭이 자갈길을 중앙에 두고 양 곁에 있다.

  그리곤 제단이 놓일 기단은 단지와는 다소 높게 만들어져 잔디가 심어 있다. 즉 7개의 계단 위에 제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선잠단지라는 글귀가 새긴 표지석이 놓여 있다. 대체적으로 그 분위기가 엄숙하고 지나치게 단순할 정도로 모든 화려한 장식을 배제했다. 원래 제단이란 정성을 다하여 신위를 공경하는 신령스러운 장소이다. 그러니 모든 제단이 지나칠 정도로 정돈되고 단아할 수밖에 없다. 그 중 하나가 선잠단지인 것이다.

  이런 문화재는 그 단지 내의 시설물이나 장식보다는 그 주변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선잠단지가 처음 만들어질 그 당시의 풍경이나 환경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성북대로가 복개되기 전에는 큰 하천이었다. 이른바 성북 천이었던 것이다. 매우 맑고 깨끗한 하천이었다.

  비극의 왕 고종이 시종 몇 명과 함께 성북동에 온 적이 있었다. 맑은 계곡을 따라 올라오던 고종은 마침내 미륵사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의 동방대학교 뒤쪽에 위치한 산사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성북천이 범란하게 된다. 그래서 급히 수소문해서 구한 키 큰 동네 청년의 등에 업혀서 건넜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큰 하천이었다.

  또한 길상사 방향으로 뻗어 오르는 시냇물 또한 맑고 깨끗하며 물이 마르는 경우가 없었다 한다. 두 개의 하천이 선잠단지 앞에서 만나 커다란 기세로 흘러가는 것이 성북천이었다.

  종교의 나라, 인도에서는 두 개의 강이 만나는 지점을 성지로 여겨 순례지가 되는 경우가 많다. 또 우리 선조들이 믿고 따르던 풍수지리로 설명해도 두 개의 하천이 만나는 지점은 길지이다. 다만 하천이 흘러 들어오는 것은 보여야 좋지만 빠져 나가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좋다. 선잠단지에서 보면 두 개의 하천이 유입되는 모양은 보이지만 시야에서 하천이 흘러 멀어지는 장면은 안 보인다. 평지보다 단지가 높아 그렇다.



  1934년 발간된 경성부사에 실린 사진을 보면 당시의 선잠 단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좁다란 길과 길 양변에 식재된 미루나무로 추론되는 가로수들이 보인다. 그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창경궁에서 출발했다면 낙산 계곡을 거쳐 동소문을 지났을 것이다.

  이 낙산계곡은 예로부터 수석이 좋고 꽃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배꽃이 만발하여 서울의 시민과 문인들이 즐겨 찾던 명소이었다. 선잠제라는 것은 본격적으로 누에를 키우기에 앞서 지내는 제사이었다. 그러니 봄철에 올해 누에 농사가 잘 되도록 기원하는 행사이었던 것이다.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인 것이다. 왕비를 비롯해 비빈들이 모여 누에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사실 전적으로 이들이 뽕 잎을 따고 누에를 키우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징적인 의미이었을 것이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입장에서는 뽕 나무를 가꾸고 누에를 키우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한 일인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 늘 선비의 고고한 기품과 정신만을 강조할 것만 같은 유교 경전에서도 뽕나무를 키워 민생을 돌볼 것을 기술하고 있다. 즉 맹자에 그런 기술이 나온다.

  집 주변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키워야 한다. 그래야 소외될 수 있는 50대 이상 노인들에게 가볍고 따뜻한 비단 옷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뽕나무를 가꾸고 누에를 키우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또 이런 민생을 돌 볼 의무가 임금에게 있었으니 왕을 대신하여 여성 대표로 왕비가 나서서 누에 신에게 제사를 지내 그 해의 누에 농사가 풍요롭게 되기를 기원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선잠제이다.

  그러니 그 시기가 본격적인 누에 농사가 시작하기 전인 음력 3월이었다. 이를 위해 궁궐을 나선 비빈들을 실은 가마행렬은 때 맞춰 피어 오른 이화 꽃이 한창인 낙산을 지나 동소문(혜화문)을 지나갔을 것이다. 성문을 빠져 나가면 복숭아꽃으로 붉게 물든 성북동의 아름다운 경치도 볼 수 있었다.

  성북동은 성북 천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중심으로 복사꽃이 만발하여 붉은 색의 구름과 안개가 가득 메운 것처럼 보인다 했다. 구중 궁궐에 갇혀 지내던 왕비와 비빈들에게는 이런 것이 그야말로 최고의 나들이이었을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일반 서민들에게는 이 화려한 가마 행렬이 또 하나의 구경거리이었을 것이다.

  그 행로가 큰 대로가 아닌 시골 길 같은 좁은 협로이었으니 그 해방감을 더욱 컸을 것이다. 선잠단지에 도착해 보니 두 갈래 냇가 사이로 뽕나무 밭이 있고 제단이 준비되어 있었다. 주변에 인가하나 없이 조용하던 산골이 순식간에 축제의 한마당이 되어버린다. 잠시 들떠 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례를 행하게 된다.


  이런 장면을 그려 보아야 선잠단지의 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출입 계단을 올라 홍살문에 도달하면 큰 도로 밑으로 흐르는 성북 천을 상상으로 재현하고 길상사 방향에서 내려오는 지천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아야 한다. 저 멀리 성북초등학교 뒤편으로는 후일에 마전터가 만들어졌을 당시 생마를 말리는 장소로 활용되던 푸른 잔디도 보인다. 그리고 하천 주위에는 붉은 복사꽃이 화려하게 피어있어 눈이 부시다. 뽕나무가 도열해 있는 광경 또한 장광이다. 그 넓이가 현재보다 꽤나 넓었다 한다. 넓게 펼쳐진 뽕나무에서는 노란색 어린잎도 보이고 제법 자란 푸른색 큰 잎도 보인다. 이것이 선잠단지인 것이다.

 이처럼 상상력을 동원해야만 보이는 것이 선잠단지이다.


박진하는 성북동의 명소인 작은 식당 ‘디미방’의 주인장이며, 요가와 명상 전문가다.

우리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성북동을 사랑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는 진정한 성북동

사람이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6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5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5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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