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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Mar 28. 2018

서울시 민속자료 제10호,
이종석 별장을 찾아서

[8호]성북동 문화재 답사기|글 박진하

  성북천은 북악산 근원지에서 출발하여 성북동을 향해 곧바로 직진한다. 그러다 한 차례 휘감아 돌아 나가는 지점이 있으니 그 곳이 덕수교회가 있는 장소이며, 이곳에서 이종석 별장을 찾을 수 있다. 시냇물이 어느 지점을 중심으로 돌아 나간다는 것은 그 지역의 지세(地氣, 땅의 기운)가 좋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명당인 것이다.

  사실 이종석 별장을 찾은 횟수는 세 번이지만 제대로 본 것은 한 번뿐이다. 첫 번째 답사일은 월요일이었는데 관람 가능한 요일이 아니기 때문에 입장하지 못하였다. 다시 알아보니,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가 관람 가능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찾아갈 때는 휴관일을 피해 평일 오전 11시에 방문해서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관람 시간도 때론 변경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금요일 오후 4시쯤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찾았더니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이 문화재를 덕수교회가 구입해 영성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덕수교회를 지나 바로 다음 출입문에서 왼편으로 굽어 돌아 들어가면 좌우로 커다란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있어 들어가는 길의 분위기를 더해 준다.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노인학교를 거쳐 나아가면 화강석을 정사각형으로 반듯하게 다듬어 마름모꼴로 쌓아올린 축대가 보인다. 그 기단 위로 담장이 놓여 있고, 축대와 담장 사이의 공간을 이용해 여러 관목을 식재해 키우고 있다. 잘 자란 관목들이 담장을 가리고 있음에도 대문 가까이 다가가면 담장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각 석을 밑에 두고 그 위로 회벽돌을 쌓은 모습이다. 그 벽돌 층 사이에 십자 무늬로 투각을 만들어 집안을 슬쩍 들여다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리고 마무리는 기와로 덮개를 만들어 올렸다. 이종석 별장에 다다른 것이다.

  이 집은 여러모로 특이한 점이 많은데, 그 첫째는 출입 경로이다. 보통은 큰 도로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대문을 설치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이 가옥은 담장 옆을 지나 산 밑 공터에서 되돌아 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즉, 다른 건물과는 정반대의 장소에 솟을대문이 있고, 지금은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공터가 이른바 집 밖에 있는 바깥마당이 되는 셈이다.

  산자락을 깎아 만든 이 마당 왼쪽으로 우물터가 보인다. 그런데 이 맞배지붕 형식의 우물을 보고 있으니 그리움이 느껴진다. 요즘은 사라져버려 쉽게 볼 수 없는 추억의 장소이기에 그런 것일까? 옛 기억을 더듬어 보면 마을 어머니들이 모여 정겹게 인사를 나누던, 여인들의 사랑방 같은 장소가 우물터였다. 다 같이 사용하던 공동 우물터는 아니었지만 그만이 가지는 그리움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물은 굳게 닫혀져 있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정중앙보다 다소 우측으로 치우쳐 있다. 앙증맞을 정도로 작은 솟을대문은 큰 부호의 별장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소담하다. 그 문 우측으로 펼쳐진 담장은 단순하게 회벽돌을 겹겹이 쌓아 올린 것이며, 왼편은 화강석 조각편을 모아 만든 하단부와 십자 무늬의 투각을 중심에 두고 쌓아 만든 회벽(灰壁)으로 구성되어 있다 .

  역시 대문이 우측으로 치우쳐 있기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은 건물이 아니라 담장 옆으로 길게 가꾸어진 화단이다. 높고 긴 담장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큰 솟을대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큰 마당 저편으로 큰 건물이 위용 있게 서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배치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도 우리의 상식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젓갈 장사로 큰돈을 번 장사치의 집 치고는 다소 특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의 재산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커다란 대문과 큰 마당, 들어오는 사람을 위협할 정도의 커다란 건물 등이 있을 법한데 이 집 주인은 이런 상식을 뒤엎어 버린 것이다.

  이 집을 찾는 이들을 처음으로 반겨주는 것이 화초라는 것도 이색적이다. 빨간 백일홍 꽃을 피운 배롱나무, 말밭도리, 옥잠화 등이 수풀을 이루고 있다. 그 속으로 역시 꽃무늬 장식의 석등이 묵묵히 오는 이를 반기고 있는 모습이란! 영리에 밝은 장사치들마저 시인이 될 것 같다.

  일반적인 답사에서는 행랑채를 먼저 보고 안채를 살펴보게 되어있지만, 이 가옥에서는 이 집이 이끄는 방식으로 따라 가 보기로 했다. 화단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누마루 밑 장대석이 눈에 띤다. 그곳에서 왼편으로 가면 평지를 약간 높인 곳에 크고 작은 장독들을 하나 가득 모아둔 장독대가 있다. 장독대를 누마루 장대석 밑과 옆으로 보이게 함으로서 멋진 장면을 연출해낸다.

  그 뒤로 정사각형의 화강석으로 하단 부를 만들고 그 위로 화초를 식재해 두고 있다. 경복궁 후원 담에서 보던 화단과 같은 형식이다. 안채에서 뒷문을 열어젖히고 바라보면 딱 그 눈높이에서 화단을 볼 수 있도록 한 구조다. 그 화단 뒤편으로는 보다 작은 크기의 사각 석과 회벽돌로 꾸민 담장을 배치하였고, 그 층간은 흰 회벽과 벽돌로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어 장식하고 있다. 흰 바탕에 회벽돌을 작은 크기로 잘라 넣어 멀리서 보면 점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보다 조금 큰 벽돌을 넣은 부분은 점선으로 보이기도 한다. 안채로 들어가 화단과 아름다운 미장의 어울림을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젠 본격적으로 이 가옥의 주인 격인 안채를 만날 시간이다. 이곳에서도 특이함은 계속 이어진다. 대문에서 볼 수 있는 벽면은 측면이고, 정면은 오히려 담장 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건물 전면에는 기다란 화강석을 양측으로 각각 3개씩 놓아 만든 계단이 있어, 출입문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정면은 전체적으로 6칸이다. 중앙 3칸은 안채이고 좌측 2칸은 부엌과 찬방, 그리고 나머지 우측 1칸은 이 건물의 가장 특별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누마루이다. 보통 양반가에만 허용하던 누마루를, 마포에서 젓갈로 큰돈을 번 부호가 이런 형식으로 안채에 붙여 만들었던 것이다. 경회루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누마루에 비하면, 이곳은 크기 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이 건물이 왜 이렇게 특이한 구조인가를 알아보려면 ‘집주인이 이 별장을 무슨 목적으로 건립했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해 보아야 한다. 그의 본가는 장교동에 따로 있었다 하니 이 가옥은 일상적인 거주 공간이 아닌, 여유를 즐기기 위한 별장 용도로 건축된 건물이었을 것이다. 경치 좋은 장소에서 한시를 짓고 이를 서로 나누던 양반들과는 달리, 당시 상인들이 유희로 즐길 수 있는 놀이라고는 주로 먹고 마시는 것이었다. 사람이 먹은 음식으로 그의 성격이나 생활 습관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집을 보면 그 주인의 성격이나 생활방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집을 건립한 사람은 마포 나루에서 젓갈로 부호가 된 이종석이라는 장사치였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왕실의 소유였던 것을 이 거부가 인수한 것이라 하지만, 여러 가지로 살펴보건대 이 건물은 젓갈장사꾼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 가옥은 대단히 효율적이고, 과감할 정도로 기존 전통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안채는 전체적으로 “ㄴ” 자와 “ㄱ” 자를 결합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 중앙에는 안채가 3칸 넓이로 차지하고 있으며 그 좌측 두 칸은 부엌과 찬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부엌이 차지하고 있는 두 칸은 후원쪽으로 세로로 한 칸 더 길게 되어 있어 음식을 만들고 요리하던 공간은 보다 넓다.

  그 반대편에 있는 누마루 한 칸은 앞 쪽으로 한 칸 더 넓게 나아가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마루 밑이 텅 비도록 장대석을 기둥 삼아 원두막 같은 방식으로 건립되어 있다. 아마도 유희 공간으로 쓰였을 것이다. 이 누마루에는 ‘일관정(一觀亭)’이라는 당호가 붙여져 있었다 한다. 이 누마루에서는 넉넉히 흘러 내려가는 성북천의 도도한 흐름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맞은편에는 미륵사라는 절이 있었고, 미륵당 옆에는 정자가 있었다. 그 옆으로는 폭포가 있었고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 있어 운치가 있었다. 그곳의 경치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이런 풍경을 바라보며 술 한 잔 마시는 장면을 상상하면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피어난다.

  보통 우리 한옥 구조를 살펴보면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로 만들어져 있다. 즉 누마루가 있는 사랑채와 부엌과 안채가 있는 공간이 별채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집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한 공간에 배치되어 있다. 부엌에서 만든 음식상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실내로 이동하여 누마루까지 다가갈 수 있다. 진탕 술을 마시다 피곤하면 바로 옆 공간에 있는 안방으로 옮겨가 쉴 수 있다. 이 얼마나 편리한 공간 배정법인가! 이 얼마나 실용적인 방식인가! 보다 편리하고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는 상인이 아니고서는 이런 창의적인 공간 배치 방식을 찾아 실현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답사기를 쓰기에 앞서 이처럼 독특한 구조의 집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이 주인공의 일생을 밝히는 일은 녹녹치 않았다. 우리의 역사 연구가 정치사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어 경제사, 사회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마포에서 젓갈 장사로 큰돈을 번 부호라는 간단한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 상인들의 활동을 연구한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국사편찬위원회)’라는 서적에 의하면 마포는 용산과 송파 나루와 더불어 한강변에 설치된 상인들의 주요거점이었다. 당시는 한강을 이용한 선상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산물이 이 강을 통해 한양으로 유입되었고 황해도와 평안도 산물들도 이 한강을 경유하여 서울로 집결되었다. 이들 상인을 강경상인이라 하였고 마포나루는 생선, 건어물, 젓갈이 주로 거래되었던 장소였다. 그나마 이것이 이종석에 대해 추측할 만한 유일한 부분이다. 혹시 몰라 조선조 말기 상인들의 활동상을 사실에 근거하여 엮어낸 김주영 장편소설 『객주』라는 작품도 다시 살펴보았다. 역시 그곳에도 없다. 다만 이들의 삶이 녹녹치 않았고, 이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승리를 쟁취한 거상들의 배포는 보통이 아니어서 전쟁터를 누비던 장수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선비 못지않게 처절한 삶을 영위했음을 짐작해 볼 따름이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추정컨대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거상이 된 이종석은 엄청난 용기와 지혜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그만한 역량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이런 실용적이고 창의적인 건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리라.

  또 특이한 점이 있다. 전체 토지 면적에서 건물이 차지하는 건폐율이 높다는 것이다. 거의 빈 공간이 없이 가득 채워 넣은 건물이 29.8평을 차지하고 있다. 정말로 토지 활용성을 최대한 높인 가옥 구조다. 또 모든 창호는 대체로 격자무늬 창살을 하고 있으며 지붕 구조는 팔작지붕 방식에서 약간 변형된 형태를 하고 있다. 어찌 보면 지극히 소박하다 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건물인데, 이 건물이 건립 초기에 화려하다 비난 받았다 함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지금의 규모나 외부만 보고는 그렇게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규모에 비해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이 현저하게 축소되었다면 이해할 수 있다. 아니면 외부에 비해 내부 구조가 화려했다든지 하면 그 또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내부 구조를 확인해 볼 수 없다. 아니 직접 들어가 본다 해도 특이한 점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한옥에서 내부 인테리어의 가장 큰 부분은 가구가 차지하고 있고, 어떤 가구를 가져다 놓느냐에 따라 그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부 장식이나 가구가 사라진 상태일 것이다. 아니 내부 편리를 위해서 변형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를 관람하고 나오면 입구 오른 쪽으로 행랑채가 보인다. 그 구조는 ‘T’자 구조이다. 부엌과 찬방은 보다 길게 세로로 배치되어 있다. 이 건물에 가로로 붙인 세 칸의 행랑채가 있다. 네 개의 여닫이 출입문으로 드나들 수 있는 방이 두 칸, 하얀 회벽 가운데에 두 개의 여닫이 출입문을 설치한 방이 한 칸이다.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면 평이했을 공간을 이렇게 형식을 달리한 방 배치로 그 미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후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뒤뜰로 돌아가 보면 두 개의 큰 문과 보다 높은 위치에 만들어진 창문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행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중문이 있어 이를 통해 드나들 수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다.

  전체적으로 이 건물은 빈틈이 거의 없다. 약간의 빈 공간이라도 있으면 초목을 식재해 두었다. 역시 이 별장은 옛 주인의 의도대로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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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하는 성북동의 명소인 작은 식당 ‘디미방’을 부인과 함께 운영하고 있고, 요가와 명상 전문가이기도 하다. 우리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성북동을 사랑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는 진정한 성북동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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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8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6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6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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