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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May 25. 2018

11월 13일 : 故 배정학 활동가를 추모하며

[10호] 지역공동체 특집 × 주민 기고|글 황선영 ·사진 홍수만

  그날 우리가 가장 많이 떠올린 말은 아마도 “왜?”였을 것이다. 스스로 에게도 묻고, 서로에게도 물었다. 말없이 있다가 젖은 눈길로 마주칠 때마다 물었다. 


왜 이렇게 된 거죠? 
왜 우리는 여기 있는 거죠. 
왜 우리는 이런 일을 맞이하게 된 거죠. 
왜 우리는 그분을 이렇게 떠나보내야 하는 거죠.


  누가 잘못한 일이냐고 따져 물을 사람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르겠다. 속 시원한 답이라고는 구할 수 없는 왜라는 질문의 끝은 결국, 그러면 내 잘못인가, 곁에 있을 때 좀 더 잘해주지 못하고 잘 챙기지 못한 내 탓인가, 하며 스스로를 겨누었다. 같은 마음으로 가슴을 뜯은 이들이 많았으리라.


  11월 13일 아침 11시 경, 카톡방으로 배정학 장수마을주민협의회 대표님(이하 ‘배 대표님’)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처음 날아들었을 때만 해도, 가벼운 걱정만 했지 큰일을 예상하지는 않았다. 병원에 갔으니 좀 아파도 치료를 받고 금세 나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문병을 가서 ‘그러게 몸을 좀 챙기시라니까’는 핀잔 섞인 위로를 나누며 웃게 될 것이라고.

  헌데 그 외의 일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뭔가 잘못된 거야. 누군가 잘못 알려 준 거야.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을 거야.

  때 마침 병원에서 가까운 성북구마을사회적경제센터에 있었던 나는 정오를 조금 넘겨 응급실에 도착했고, 그래서 배 대표님과 마지막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응급실 앞에는 소식을 듣고 먼저 달려온 십여 명의 지역 활동가와 대표님의 친동생이 같이 계셨다. 나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거기서 마주하였다. 실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얀 시트를 젖혀 그 아래 누운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용기가 차마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 믿을 수가 없기에, 직접 보고 나면 믿어질까 싶어 가까스로 걸음을 옮겼다. 하얀 시트로 덮인 침대는 그 아래 누군가 있다고 알려주기에는 너무나 평평해 보였다.

“어떻게 저리 작아 보이는지….”

내 옆에 있던 누군가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의사가 유가족에게 사인을 설명하는 동안 모두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믿을 수 없던 일이 눈으로 확인한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응급실 앞을 떠나 장례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망 확인과 장례 수속 절차를 밟는 동안 우리는 소식을 듣고 하나 둘 찾아오는 사람들과 대전에 계시던 고인의 가족들을 모시면서 지인들에게 부고를 전했다. 또, 옆에 있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도록 따뜻한 차 한 잔을 권하고, 곧이어 들어올 조문객들을 위해 장례식장 입구에 휠체어용 경사로 설치를 부탁했다.

  오후 3시쯤 분향소로 자리를 옮겼다. 입구에 들어서서야 영정사진 생각이 났다. “영정 사진이…” 옆에 계신 분들도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조문객들이 장례식장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영정 사진, 그게 이제야 생각이 나다니. 장례식장 내에 사진 인화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니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이 있으면 바로 넘겨달라는 직원의 말을 듣고 다들 카톡이며 페이스북을 열어 급히 사진을 찾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우리가 그 분을 보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이렇듯 갑작스럽고 허망한 이별을.

  많은 분들이 분향소를 찾아주셨다. 처음 그 분을 만났을 때 그는 사회적 기업 ‘동네목수’의 대표셨고, 후에 알게 된 것은 나와 같은 노동당원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알던 그 분의 활동은 마을과 노동 영역에 중심이 있었는데, 그 분이 떠난 후에 찾아오는 이들을 통해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해 오셨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노동, 장애, 인권, 빈곤 퇴치, 마을공동체 활동… 온 몸으로 이웃을 끌어안으며 살아오신 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장님으로 평생을 살아 온 고인의 행적은 분향소가 비좁을 정도로 찾아오는 많은 분들이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나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배정학 대표님은 언제나 선한 미소를 띠고 있던 분이다. 언뜻 보기에 말수가 적은 듯하지만 재치 있는 말로 사람들을 유쾌하게 해 주셨던, 그리고 그 자그만 체구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끌고 나가나 싶게 언제나 바지런히 무언가를 하고 있던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신 분을 더욱 아프게 기억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최근 몇 년간 지역 활동가로서 고인이 겪던 어려움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문제든 공모사업 중심의 지역 공동체 활동 자체의 한계든, 배정학 대표님에게는 그러한 힘겨움이 누적되는 상황을 뚫고 나갈 돌파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찾으려고 몇 배로 노력을 하다가 결국 이렇게 되셨다는 점이, 남은 우리들에게 더욱 아픈 자책으로 남는 이유기도 하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왜?’라는 질문 밖에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분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셨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남게 되었을까.

  동네 친구이자 동료 활동가를 잃은 슬픔을 두고서 그 어떤 다짐이나 결론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곁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슬퍼하는 것조차 죄스러운 마음이 들 때, 나는 올해 3월 성북의 동네 친구 6명이 함께 다녀온 대만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 보았다.

  귀국하기 전날 우리 부부와 배 대표님은 다른 일행과 나뉘어 타이페이 국립박물관과 지우펀 구경을 하고 왔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호텔 근처의 유명한 훠궈집에 가서 여행 마지막 저녁을 즐겼다. 그때 사진들을 찾아보는 동안 대만에서의 대표님 모습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국립박물관에서 도자기를 들여다보던 진지한 얼굴이며, 지우펀의 야경을 함께 보고 즐거워하시던 그 모습들. 우리에게 함께 했던 즐거운 추억이 남아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이제야 살아남은 사람들은 산 사람의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감히 어떻게 그 분이 떠난 빈자리를 채운다는 말을 할까. 그의 삶을 누가 대신해 줄 수 있을까. 다만 그 분이 온몸으로 기둥이 되었던 자리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허망한 일만은 막기 위해서 그 하던 일을 되짚어 보고 힘을 보태야겠다는, 그래야 떠난 분에게 덜 죄스럽겠다는 조심스러운 결심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느꼈던 허망함을 두 번 겪지 않기 위해 할 일이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왜 우리는 그 분을 잃었는지 생각해 보고, 또 다른 동료를 그렇게 보내지 않기 위해서 크게는 제도적인 문제부터 작게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더 챙기는 일을 해야 한다고. 그것이 고인을 우리가 평생 추모하는 방법일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는 것이다.


“편히 쉬십시오. 대표님은 가셨지만 대표님의 뜻은 꺼뜨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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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영(주호)은 문화기획을 하고 글도 쓰고 공동체 활동도 한다. 지금은 삼십육쩜육도씨의료생활협동조합의 기획자, 성북마을살이연구회 운영위원, 성북구마을사회적경제센터 마을지원활동가를 겸하고 있다. 성북동에서 곰서방과 귀동이와 달고나와 언제까지나 살고 싶은데 언제까지일진 잘 모르겠다.




지난 11월 13일, 성북동 이웃동네인 삼선동 장수마을에서 2009년부터 지역활동에 참여해오신 故 배정학 활동가가 급작스레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이에 고인을 추모하고자 평소 고인과 함께 활동해왔던 분께 원고를 의뢰하여 싣게 되었습니다.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편집위원회와 성북동천은 이웃으로서, 그리고 지역사회 일원으로서 성북의 지역공동체를 위해 헌신해오셨던 고인을 함께 기리고 추모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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