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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Sep 11. 2018

우리 동네 성북동의 길목, 동소문동 이야기

[11호] 성북동 문화재 답사기 × 골목기행| 글 박진하

동네 입구 소공원과 한·중 위안부 소녀상 


 우리 부부가 운영하는 디미방 식당이 성북동에서 동소문동으로 옮겨 감에 따라 그 쪽 마을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져 갔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동소문동이라고 해도 그 지역 주민의 행정이나 민원 처리는 성북동과 동일하게 성북동 주민 센터에서 하고 있으니 이를 구분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으나 어찌되었던 동소문동이라는 마을 명을 가진 지역임에는 분명하다.

 그와 동시에 이 지역은 성북동에서 도심지로 나가거나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할 동네 어귀 같은 지점이다. 산촌 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들러 가는 동구나무 숲이 있는 것처럼 그것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들의 출퇴근 통로이기도 하다. 식당을 운영하는 우리도 그 성북대로를 걸어 오늘도 출근한다. 적어도 하루 두 번씩은 왔다 갔다 하는 그 길이다. 


 성북대로의 동쪽에 있는 인도로 삼선역을 향해 걸어간다. 현대 서비스 센터 앞을 지나가노라면 도로 중앙의 가로수가 오가는 방향의 차선을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버짐나무라는 우리의 고유의 한글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플라타너스라고 부르는 그것들이다. 지금은 은퇴한 세대들의 어린 시절을 회상케 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이 나무들은 그들이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많이 식재되던 가로수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교 운동장을 둘러싸는 나무들도 십의 아홉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또한 나무껍질이 희어 짙은 갈색 나무 둥지에 붙어 있는 모양이 그들이 어릴 때 영양 상태가 부실하여 생기는 피부병의 일종으로 바리깡으로 깎은 까까머리 위로 하얗게 번지는 버짐과 같다 해서 이리 불리는 것이지만 이렇게 부르지 않고 외래어로 통칭하게 된다. 

 지난해에 수모를 겪고도 살아남은 버짐 나무는 위 둥치가 뭉떵 잘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생명력을 기반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사회생으로 되살아난 두 그루의 가로수는 자기를 지켜준 주민들의 출퇴근길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로수는 여기를 기점으로 끝이 나고 도로 양편으로 자리 변경을 하게 된다. 


 드디어 성북동과 동소문동의 경계지점을 만나게 된다. 이른바 한진 아파트 입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 아파트로 향하는 도로 양쪽으로는 느티나무가 나란히 줄을 서서 오가는 행인을 반긴다. 그 건널목을 건너 지하철역을 다가가게 되면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중앙에는 삿갓지붕 형식으로 만든 나무 정자가 있고 그 밑으로는 의자들이 둥근 반원을 그리며 배치되어 있어 쉬어 갈 수 있는 쉼터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뒤로는 소나무 등으로 조성된 도시 숲이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 때인 1940년 전후에 추진되던 지구 개발 계획에 의거하면 동소문동과 돈암동 일대에 11개의 공원을 조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곳이다. 그러니 이 공원은 비록 작으나 역사가 있는 장소인 것이다. 


 여기에 일본이 우리 민족 여성들에게 행한 잔혹한 성범죄를 증언하는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특이하게도 이 소녀상은 중국인 소녀상과 함께 나란히 새겨져 놓여 있다. 이런 한·중 평화의 소녀상은 2015년 10월 28일에 세워졌는데,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왼쪽이 한국인 소녀상, 오른쪽이 중국인 소녀상이다. 
 이 소녀상은 미국 LA 외곽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본 두 중국인 예술가가 한국인 작가 부부에게 제안해 만들어졌다. 즉 한국인과 중국인 두 나라 예술가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기존의 다른 장소에 설치한 한국인 작가의 소녀상 옆에는 항상 빈 의자가 있는데, 여긴 중국인 소녀상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옆에 빈 의자가 하나 또 있다. 이는 다른 아시아 국가의 희생자들을 위한 자리라 한다.  
 

 중국인 소녀상은 땋은 머리에 단호할 정도로 팔을 걷고 주먹을 강하게 쥐고 있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국인 소녀상이 차분하고 정적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몸이 가늘고 굴곡이 더 많다. 
 한국인 소녀상 뒤에는 다른 소녀상과 마찬가지로 할머니의 그림자가 있고, 중국인 소녀상 뒤에는 의자를 향해 걸어온 발자국들이 있다. 왜 발자국이 있는지는 빈 의자 뒤 바닥에 새겨진 다음의 글이 알려 준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친구를 찾아와 옆에 앉았습니다. 
 있던 자리에선 말을 못하고 숨죽여 왔습니다. 
 친구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소곳하면서도 진지하고, 잔잔하면서도 진실 되게 이야기하는 친구와 같이하고 싶었습니다.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거든요.
 절대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 
 이제 함께 하려 합니다."


동소문동 마을 기행의 시작 


 이를 뒤로 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면 지하철역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 오른 편으로 넓디넓은 로터리가 보인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자리에 삼선교가 세워져 있었으며 그 밑으로는 성북천이 흐르고 있었다. 삼청각 뒤쪽 북악산에 시작한 성북천은 성북동을 가로지르며 흘러 내려와 이 지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일제 당시 도시 계획에 의하면 이 도로는 서울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중요한 간선도로이었던 것이다. 서울의 북쪽으로 가는 관문이었던 동소문을 해체하고 창경궁 앞과 지금의 삼선역과 미아리 고개를 잇는 큰 도로를 만들면서 삼선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때 당시만 해도 성북천은 밖으로 노출된 상태로 흐르고 있었으며 서울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큰 도로와 만나게 되면서 교각이 건립된 것이다. 그것이 삼선교이였던 것이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성북천은 먹고 살기도 바쁜 궁핍한 시절, 환경 보호라는 개념이 미약한 상태에서 방치되어 있었고 생활 쓰레기와 악취가 넘쳐나는 그런 곳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정월 대보름이면 지불놀이를 하던 우리들의 전통 놀이가 행해지던 행사장이었던 것이다. 즉 깡통 속에 불과 나무를 넣어 빙빙 돌리던 그 놀이를 이곳에서 행해졌다 한다. 삼선교 옆에 계단이 있어 이를 이용하면 성북천 옆으로 이어진 길로 내려갈 수 있었다. 아이들은 놀이의 천재들이다. 이런 시궁창을 재미있는 놀이터로 바꾼 것이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나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삼선동 주변의 성북천을 보면 예전의 삼선교와 성북동을 가로지르는 그 냇가의 정경을 그려 볼 수 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성북동 주민의 주된 동선인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 나가면 농협이 있다. 사실 그 농협은 성북동 깊숙이, 즉 지금의 앙리 동물 병원에 위치하던 곳으로부터 옮겨 온 것이다. 큰 도로에서 7번 출구를 나와 왼편으로 꺾어 들어가면 이른바 본격적인 동소문동으로의 골목 기행이 시작된다. 

 많은 성북동 예술인들의 모임터가 되고 있는 맥줏집, ‘7번 출구’를 지나 길을 건너면 왼편으로 가압장이 보인다. 가압펌프가 설치되어 있는 장소를 '가압펌프장' 또는 '가압장'이라고 하는데, 수돗물을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보내려면 가압 펌프를 사용해서 물에 압력을 가하여 높은 곳으로 보내야 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곳이었다. 이젠 그 용도가 폐기되어 그림이나 여러 예술 작품 등을 전시하는 작은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를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그 경사가 급해지고 느긋한 대각선 형태의  골목길을 만나게 된다. 아침이면 차량이 쏟아져 내려와 번잡한 도로가 되기도 하는 그곳이다. 이 비탈길 따라 올라가 평지에 이르면 오른편엔 현대식 가옥이, 그 반대편에는 커다란 벽체가 있어 소공원의 뒤편에 위치한 조그마한 숲과 맞닿아 있다. 그 벽면에는 이른바 거리 예술이라고 부르는 그래피티(graffiti) 방식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알파벳 글자와 구상화 형식의 벽화가 우리를 반긴다. 요즘 도시 속 담장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이런 종류의 그림들이 눈에 거슬리는 경우가 많으나 여기에 있는 것은 화려한 색상의 대비가 선명한 것이 좋아 보인다. 또 다른 벽면에 그려진 푸른 하늘빛과 붉은 저녁놀이 어우러져 있는 황혼과 커다란 달 항아리 실루엣은 볼수록 호감이 생긴다. 


 왼편으로는 공동 주택이, 오른편으로는 한옥 형태의 집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이전에는 이 경계선을 중심으로 이 밑으로만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기존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대단위 재건축 사업을 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기에 획일적이라기보다 각자의 편리에 따라 이리 변경하고 또 저리 고쳐서 그야말로 어지러울 정도의 다양한 가옥의 집합군락이 된 것이다. 그에 비해 채마밭으로 이용되거나 푸른 나무숲이 있던 윗동네는 민가가 거의 없었기에 근대화 물결 속에서 싹 밀어내고 새로운 집단 가옥을 건립하기에 용이했을 것이다. 그러니 비교적 고도가 높은 지역을 중심으로 대형 아파트나 번듯한 빌라 건물이 들어설 수 있었던 마을이 동소문동인 것이다.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보게 되면 산 위 채마밭을 지나다가 거름 밭을 밟아 온통 오물을 뒤집어쓰고 그 속에 빠진 고무신을 찾을 수 없게 되는 낭패스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하는데 바로 이런 곳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이젠 그런 채마밭도 푸르른 숲도 사라져 버리고 대형 아파트나 공동 주택가로 변해 상전벽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청룡암과 바둑판 모양의 골목길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한 블록을 지나다보면 청룡암이라는 암자를 만나게 된다. 솟을 대문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행랑채를 배치한 양반가의 가옥이다. 그런데 보다 자세히 살펴보니 행랑채와 본채가 길게 이어진 ‘T'자 형 기와집이다. 본채 왼편에 있는 칠층석탑이나 창건 기념비가 없다면 일반 가정집처럼 보인다. 이 암자도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당초 이 청룡암은 현재 삼청각이 있던 위치에 있었다. 당시 최고의 세도를 누렸던 안동김씨 가문의 영의정에 의해 1853년에 창건된 것이다. 대웅전과 요사 채를 갖춘 제법 큰 사찰이었으나 당시는 그곳이 숲이 우거지고 짐승이 오가는 깊은 산속이었다고 한다. 한 때 춘원이 여기에 머물며 작품을 쓰기도 했단다. 그렇게 위세를 떨치던 그 암자가 이렇게 변해 이 곳으로 옮겨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추억담을 읽어보면 그가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끌려 이곳까지 왔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하며 사월 초파일에는 전국에서 모여드는 신도들로 가득했다 한다.     


 한편으로는 삼선 중학교의 축대들이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주택들이 도로를 가운데 두고 병치되어 있다. 이처럼 동소문동의 마을길은 모두 일직선이다. 대체로 성북동의 마을길과 같은 미로가 없는 편이다. 이쪽으로 가면 큰 길이 나오겠지 하고 갔다가 곧 낭패를 보는 경우가 다반사인 곳이 성북동이지만 여기는 그렇지 않다. 

모든 골목길은 직선과 격자로 도시화 계획에 의해 잘 정돈된 마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까닭이 있다. 

이 지역은 일제 당시에 도시화 계획에 의해 정돈된 공간이다. 서울에서 가장 먼저 주택 단지로 개발된 지역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신도시하면 분당이나 일산을 이야기 하겠지만 가장 먼저 신도시로 개발된 지역이 동소문동을 포함한 돈암 개발 지구이었다. 

 개발 시점에는 평산 목장이라는 초목 지와 그 주위에 토막을 짓고 살던 빈민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당시의 이 곳 정경을 기록한 문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성내의 혼잡함은 찾아 볼 수 없는 한적하고 공기 맑은 지역이다. 새로 닦은 아스팔트 큰 길, 평지는 드문드문 소나무가 서있으며 야외이기는 했으나 올라가 놀기 좋은 나지막한 산, 그 산 밑으로 솟아오르는 샘물이 곱게 고이는 맑은 우물, 살기도 좋으려니와 걷기도 더 좋은 곳이다. 길의 흙까지도 깨끗한 흰 모래, 동네 전체가 햇빛을 듬뿍 담아 언제나 밝은 곳이다.’

이런 자연 경관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내려가면 도심지로 나갈 수 있는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무엇보다 매력적인 대중교통 수단이었던 전차가 지상으로 다니고 있었다. 지금의 삼선역에 전차역이 있었으며 이 전차역은 다음 역인 미아 종점까지 통행하는 남북관통 전철 노선에 속해 있었다. 그야말로 신도시를 건설하기에 최적지였던 것이다.           

  다만 이곳에 살던 토막민이라고 지칭했던 도시 빈민층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들은 지면을 파서 그 단면을 벽으로 삼거나 혹은 땅 위에 기둥을 세우고 거적 등으로 벽을 삼고 양철이나 판자로 지붕을 만든 원시 주택, 즉 토막에 거주하고 살았다. 이들에 대한 철거는 1939년에 추진되기 시작하여 7월에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200여 호를 경관 30여명이 현장을 지켜보는 가운데 인부 수십 명에 의해 일시에 철거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리된 토지를 분양하고 새로운 건물은 건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모든 골목길은 직선이고 장방형으로 정리된 도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경성 총독부는 내선 일체라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이 신도시에 일본식 주택과 우리의 한옥을 50:50으로 하여 건립하게 하여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살도록 하려 했으나 이런 정책은 실패했다. 전체의 98.6%가 우리 한국인이었으니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한옥 단지가 되어 버린 셈이다.     

 이렇게 건설된 신도시를 “한 발 바깥으로 나가면 도로에 면하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본래 산이 지닌 모습을 정원을 통하여 만끽할 수 있고, 밖으로 바라보면 이웃들이 녹지에 둘러싸여 있고 거주자들이 편히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렇게 개발된 지역이 이곳인 것이다. 그래서 길은 곧고 골목은 격자 형태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도시로 기획되고 개발되는 과정에서 신설된 학교가 있었으니 그것이 돈암 초등학교이고 쇼핑 편의시설로 만들어진 것이 돈암 시장이었다. 지금도 대규모 신시가지를 개발할 땐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이 학교 시설이고 쇼핑 등의 편의시설인 것처럼 당시도 그러했다.



 백사 선생과 이웃 마을  


 다시 걸어 한 블록을 지나면 끝나는 지점 쯤 ‘양한재(養閑齋)’라는 양옥집이 보인다. ‘양한재’라 ‘몸과 마음을 닦으며 한가로움을 즐기는 집’이라는 의미일까? 작은 격자 철망 대문 뒤로는 등나무 넝쿨이 보인다. 그것이 자라 넝쿨 터널을 이루고 있다. 그 뒤로 빨간 벽돌로 만들어진 집은 네모난 굴뚝을 중심에 두고 좌우 대칭되는 붉은 기와지붕을 가진 양옥인 것이다. 그것도 완전 대칭이 아닌 왼쪽 지붕은 겹치마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고 다른 쪽은 홑 지붕 형식을 하고 있어 약간의 파격이 느껴진다. 측면은 경사가 급한 또 다른 골목길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그 비탈을 활용하여 3층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정면에서 보면 단층이나 측면에서 보니 3층인 것이다.

 다소 특별해 보이는 이 건물이 위치한 이 장소가 소설가 겸 국문학자로 활동하신 전광용 선생의 집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60년대 초에 성북동을 거쳐 이 마을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그의 집을 가려면 꽤 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으며 이층 양옥과 단층 기와집이 되어 있었고, 마당에는 감나무와 영산홍이 있었다 한다. 

 그는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실향민이며 다른 사람들 보다 늦게 서울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고 그곳에서 교수가 되셨다. 그러다 1936년『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입선하였으며, 1955년『조선일보』에 「흑산도」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셨다. 1962년에는 단편소설 「꺼삐딴 리」로 제7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한국현대문학연구회 회장, 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창작과 문학 연구의 활성화에 기여하기도 하셨다.            



대표작 ‘꺼삐딴 리’의 STORY 


 꺼비딴은 CAPTAIN의 노어식 표현이다. 의사인 주인공은 식민지시대에는 철저한 친일파였으나 해방 직후엔 친소파로 돌변한다. 이북에 있던 그는 해방이 되자 재빨리 노어를 배웠고 또 소련군 장교를 치료해서 환심을 산다. 그러나 1 · 4후퇴 때 월남해서는 어제까지의 친소파가 갑자기 친미파로 돌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해 가면서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국무성 초청을 받기 위한 교섭을 벌인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언제나 시류에 편승해서 현실적 영화를 누리는 카멜레온 같은 인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상징하는 노예적 인간상을 고발하고 동시에 그러한 인간상의 배경이 되는 한국민족의 비극적인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선생과 관련된 일화는 많다. 사회 풍자적 소설을 썼던 그는 어떤 권력 앞에서도 당당했다. 당시 최고의 권력을 구사하던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되어 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1956년 대통령의 양자이자 실권자의 아들인 이 강석이 부정편입 논란 속에 서울법대에 입학해 있을 때이었다. 국문과 교수였던 선생은 시험 때 그의 고교동문들이 조직적으로 그를 돕는 것을 보고, 호통과 함께 내쫓았다. 그 이후 그는 그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고 육사로 재입학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이강석이 어떤 인물인가? 그의 이름만 대어도 벌벌 떠는 그런 시대이었다. 그를 사칭하며 벌인 사기사건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가 학교를 그만둔 그 다음 해인 1957년, 경주에서 갑자기 자신이 이강석이라고 사칭하는 청년이 나타났다. 이 청년은 경주 경찰서에 들어와 "아버지의 밀명으로 풍수해 피해 상황과 공무원들의 기강을 알아보려 왔다"고 말했고, 그 소식에 경주 경찰서장은 물론 경주 군수까지 버선발로 뛰어와서 새파랗게 어린 청년에게 "귀하신 몸이 여기까지 왕림하시니 광영이옵니다."라면서 극존칭을 써가면서 극진히 대접했다.
 경주 경찰서장은 이 청년을 극진히 대접하고 경호차까지 내서 경주 일대를 둘러보게 했다. 그 다음날에는 경주 옆의 영천으로 갔고, 영천에서도 영천 경찰서장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이 극진하게 대접했다. 이어 안동으로 이동해서 지역 유지들을 만났는데 지역 유지들에게 수재의연금 좀 내라고 눈치를 주자 알아서 갖다 바쳤다고 한다.
 이 청년은 사흘째 되던 날, 경북도청 소재지인 대구에 도착했다. 경북도경 사찰과장이 직접 나와서 안내했고 도지사 관사에서 머무르게 했다. 그러다 그 정체가 드러나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사칭하고 다닌 지 3일만의 일이었다.

이런 세월을 지낸 선생은 ‘주막(酒幕)’이라는 동인을 구성할 만큼 술을 즐겨 마셨다 한다. 술자리에서 흥이 나면 우렁찬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고향 민요를 부르곤 했다. 


 여기에서 우측으로 돌아 내려가면 경사가 가파르다. 좌우로 공동 주택들이 나란히 있다. 이는 이 마을이 근대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이 변해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래도 예전의 흔적은 잔존해 있는 법이다. 빨간 벽돌 담장 너머로 품격 있는 한옥의 측면이 보인다. 담장이 높아 그 내부를 자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었다. 다만 정원수로 가꾸고 있는 향나무가 단정하게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행랑채와 본채를 분리하는 정형적인 한옥 배치 구조를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채의 기둥에는 주인이 좋아하는 한시나 문구를 새긴 주련들이 보이고 그 지붕은 팔작지붕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면서 전제적으로는 대문을 향해 ‘ㄷ’형태를 띠고 있었다. 


 한쪽 모퉁이에 위치한 그 집을 뒤로하고 차로로 나와 걷다 보면 ‘한국요가 연수원’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오래 전 매일 같이 찾아다니던 그 수련원이다. 요가와 명상을 배우기 위해 몇 년이고 다니던 수행처이기도 하다. 그를 지나면 수제 만두로 유명한 만두집이 있고 이어 염색 전문점도 나타난다. 필요한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면서 운영하는 전문점이라면서 비전문가들이 하는 염색방과는 구분해야 한다며 자부심이 대단한 이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멀리서 오는 단골들이 많은 걸 보면 그 말이 일리가 있다 싶다.

그 앞에 있는 ‘돈가래(豚家來)’는 이름부터가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 집이다. 언젠가 주인장이 ‘자기는 어릴 때부터 맛있는 고기를 파는 주점을 해 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즐겁게 살아가려고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쯤은 길게 시간을 내어 스키 투어를 다녀오신다고 한다. 운영 철학이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를 구워내는 그 마음으로 서비스하기에 늘 많은 사람이 모여드나 보다.


 드디어 삼선 중학교로 가는 큰 길을 만나는 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무슨 까닭에 차선이 여기에서 꺾여 'T'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방향을 전환해 하교 때가 되면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그 길을 따라 비탈길을 올라간다. 거의 학교 앞까지 다다르게 되면 우아한 공동 주택을 만나게 된다. 5층 건물로 만들어진 이 건축물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빨간 색과 대비되는 하얀 베란다, 부드럽게 구부린 유리창과 더불어 전체적인 벽체도 우려한 곡면으로 몇 번에 걸쳐 변화를 주고 있어 보는 이를 편하게 한다. 공공 주택이라도 이 정도라면 작품이다 싶다. 여기쯤 가톨릭 신부들이 거주하는 사제관이 있다 했는데 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측면이나 후면을 보면 보다 건축 면이 단순해진다. 엘리베이터가 있음직한 높은 ‘ㄱ’ 첨탑 중심으로 붉은 계통의 슬레이트 지붕을 한 건물을 양편으로 붙여 두었다. 좌우 대칭이 아닌 한 쪽은 한 칸만을 배치하고 나머지는 다른 쪽에 몰아붙이는 방식이다.


아름다운 추억의 마을 그리고 돈암장 


 여기에서 조금 더 오르면 삼선 중학교이다. 정문을 향하다 옆으로 내려다보면 이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하지만 고층 건물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탁 튀인 전망을 기대할 수는 없다. 다만 상상으로 볼 뿐이다. 

 서울을 지키는 주산, 즉 북악산이 동으로 흘러 북악 스카이웨이를 따라 내려온다. 그러다 남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흘러 보낸 것이 낙산이고 이는 성북동의 서쪽을 보호해 주는 우백호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조금 더 동쪽으로 내려가다 개가 쭈그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구준봉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려 내려오는 지맥이 있으니 그게 성북동의 좌청룡의 역할을 하는 또 다른 산세인 것이다. 이 산세는 가장 먼저 생태 숲이라는 도시 속 자연 환경을 제공해 준다. 한진 아파트와 홍익 중학교 사이에 있는 이 작은 산은 우리 성북동의 허파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 마을의 공기가 맑은 것은 성북천이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푸른 숲이 있기에 그러하기도 하다. 조금만 다가가면 자연 숲을 거닐 수 있는 건 우리의 기쁨이다. 이 생태 숲은 지나 지맥은 한진 아파트를 가로질러 남으로 내려와 삼선 중학교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면 성북천이 성북동에서 빠져 나와 삼선교를 지나서 이 지역을 에워싸며 한강을 향해 흘러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삼선교라는 지명의 유래를 제공하게 된 옥녀봉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 봉에서 한 옥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세 신선과 더불어 놀았다고 하는 데에서 삼선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지금은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앞에 놓인 여러 고층 건물로 인해 볼 수 없지만 예전엔 여기에서 그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동소문동에 태어나서 자란 작가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에세이 집‘놀이의 천국’을 보면 그는 ‘몽마르트의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회화 작품들을 삽화로 사용하고 있다. 이 위트릴로는 국내에서는 아직 유명하지 않지만 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가장 간직하고 싶어 하는, 몽마르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엽서 속 풍경들을 그린 프랑스 화가이다. 그는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어린 시절과 추억이 깃든 이 동네의 기억을 위트릴로의 그림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이 마을이 북악산에서 흘러 내려온 하나의 산세를 기반으로 한 동네이기에 그렇다. 즉 산에서 급격하게 내려가는 비탈길을 중심으로 양측에 건물을 배치한 것이 위트릴로의 그림 속 정경과 닮아 있다. 그래서 그는 그 그림 속에서 옛 고향, 동소문동을 보게 된 것이다.

 경비실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커다란 한옥건물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그 유명한 ‘돈암장’이다. 지금은 개인 저택으로 되어 있어 그 내부로 들어가 살펴 볼 수 없으니 이 지점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커다란 한옥 본채는 팔작지붕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때부터 권위 있는 건축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지붕형태로 규모에 관계없이 중심건물은 이렇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두 개의 지붕면을 앞뒤로 배치하고 측면에는 삼각형의 합각벽이 생기게 되는데 여기를 길상무늬로 장식했다. 그 후원 또한 넓은 공간으로 노송 등의 수목들이 식재되어 있어 집의 풍격을 더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건물이 ‘돈암장’이라는 역사적인 건물이 된 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여기에 기거하면서 붙여진 당호인 것이다.

 1945년 10월 16일 맥아더 원수의 전용기로 70세의 노 망명객, 이승만 박사는 105인 사건을 계기로 망명길에 오른 지 34년 만에 귀국하였다. 그는 처음 조선호텔에 머물며 여러 인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이승만 신드롬’에 휩싸였다. 신문들은 그를 ‘건국의 아버지’ ‘우리의 최고지도자’ ‘독립운동의 선구자’ ‘혁명전선의 거인’이라고 호칭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의 삶에 대해 보도했다. 매일같이 이승만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조선호텔로 몰려들었다. 

 같은 조선호텔에서 근무하고 있던 미군정 요인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 없다 해서 옮긴 거처가 이 ‘돈암장’인 것이다. 하루에도 300~600명이 ‘이승만 박사’를 뵙겠다고 몰려들었고, 갓을 쓴 시골노인들은 화장실을 찾지 못해 아무 데나 방뇨하는 일까지 있었던 까닭이다.
  이 집을 내준 조선 타이어 사장은 광산업으로 치부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집을 빌려준 것은 같은 황해도 출신인 한민당의 장덕수의 부탁 때문이었다.   
   1938~1939년에 지은 돈암장은 건축학적으로 의미가 깊은 건물이다. 돈암장의 한옥 건물을 지은 사람은 당대 최고의 대목장이었다. 창덕궁 대조전을 지은 목수의 제자로 무형문화재 74호였던 이 사람은 생전에 “돈암장을 지을 때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짜서 지었으며, 서까래와 내실 기둥 등은 모두 백양목을 사용했다”고 증언했다. 건축학과 전문가에 의하면 “돈암장은 가운데에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 온돌방의 3면을 마루가 돌아가는 형식으로 보아, 궁궐의 침전을 본뜬 형태다. 조선왕조가 망한 후 궁실 건축을 담당하던 목수가 민간으로 나간 근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결과”라고 한다. 

 이 박사가 이 저택으로 옮겨 온 이후 이곳은 해방정국의 중심지가 됐다. 당초 이 저택을 보유한 사람처럼 일제하에서 치부했다는 약점을 가진 자들이나 친일했던 세력들이 자신의 보신을 위해 이승만 박사에게 접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하나가 이 저택을 제공한 행위이다. 이들의 후원으로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정권을 획득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로 인해 끝까지 친일파를 척결하는 활동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우습게도 이들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신탁통치 반대투쟁이 이 ‘돈암장’에서 결정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미군정과 충돌이 발생했다. 즉 이승만 박사와 미군정이 충돌하게 되자 이 저택의 소유자는 불안해졌으며 이승만에게 집을 비워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시대 마지막 르네상스인과 이웃들


 이 돈암장을 뒤로 하고 또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그 옆집은 일본식 가옥으로 건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이다. 이어 나타나는 것이 큰 교회당이다. 시멘트 소재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살려 만든 장방형의 사각 기둥과 그 위로 길게 이은 붙인 담장은 그 안쪽으로 조성된 소나무 정원 등을 외부로 드러내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계단과 외부로 도출된 현관까지 적용되고 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곡면을 처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용된 소재도 그러하다. 시멘트의 거친 표면도 그러하고 본당의 건물에 사용된 빨간 벽돌도 그러하다. 또 본당 상부에 배치된 창문도 예사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 공간을 자치하고 있는 하얀색 원기둥 장식물은 쉽게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가느다란 검은 세로 선을 이용하여 예수의 형상을 만든 작품 또한 좋다. 이런 예닮 교회의 건물은 우리 마을의 품위를 더해 주고 있다. 


 이 교회당 앞에는 송산 아파트가 있다. 이곳이 이 마을의 또 다른 문화 예술가, 안 동림 선생이 거처하던 주택이 있었던 장소이다. 2014년까지 여기에서 사신 그는 그의 전공인 영문학보다 클래식 애호가로서의 명성이 더 크신 분이다.  '클래식 음악의 교과서'로 통하는 '이 한 장의 명반' 시리즈로 유명하다. 

 1932년 평남 평원군에서 태어나 6·25 동란 당시 19세인 약관의 나이에 단신으로 남쪽으로 피란을 왔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실향민의 아픔을 간직했던 분이었다. 음악평론가, 나아가 음악애호가인 선생은 영문학자이자 고전번역가, 소설가, 출판기획자, 기자로 활동한 '우리 시대의 마지막 르네상스인'이었다. 1950년대에 소설가로 등단했으나 소설보다는 ‘장자’와 ‘벽암록’을 번역하고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면서 음악 에세이를 썼다. 
   특히 출간 이래 20여 년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이 한 장의 명반 클래식'을 비롯해 '이 한 장의 명반', 1970년대 후반에 집필한 '불멸의 지휘자'와 '내 마음의 아리아' 등으로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꾀했다. 

 요즘 아이들이 새로운 게임이나 스타들을 좋아하는 만큼 클래식 음악을 사랑했다고 한다. 새로운 음반이 출시된다는 소식이 있으면 밤을 새워 기다렸다가 구입하곤 했다한다. 이처럼 클래식 음악에 매료된 것은 그의 어린 시절에 기인된 것이다. 그의 부친이 가장 아끼던 소장품은 축음기였다 한다. 귀히 여기는 까닭에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런 유년 환경 속에서 자란 선생이 가장 좋아했던 음악은 모차르트의 자장가와 광란의 아리아 등이라고 한다. 특히 광란의 아리아는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실화로 만든 작품이다. 그 오페라 속에서 비극적인 정략결혼을 한 여주인공이 신랑을 찔러 죽인다. 피투성이가 된 채 미쳐서 실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착각하며 17분간에 걸쳐 부르는 대작이다. 가장 비극적인 장면일 뿐만 아니라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게 한다. 선생은 이런 음악을 들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모차르트의 자장가 속에 그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실향의 아픔을 달래려 했을 것이다.

 이젠 이곳에서 발길을 돌려 내려간다. 중간에 난 큰 길을 따라 삼선 역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남원 추어탕 집이 있다. 그곳에서 좀 더 대로 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골목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가다 보면 그 옛날의 정경들이 남아있다. 한옥도 보이고 담장 너머로 보이는 감나무도 보인다. 공해가 있는 곳에서는 자랄 수 없다는 나무 중 하나인 감나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시 큰 길이 나오면 왕복 6차선 길로 나오게 되고 오랜 전통을 가진 중국집 송림원이 있는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 길은 김밥 천국으로 이어진다. 이 작은 골목길을 기점으로 대로 쪽으로는 상가 건물이 있었고 그 뒤로는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그럼 우리의 골목 기행은 이것으로 끝이다. 왕복 6차선의 대로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근대식 야유회 겸 체육대회를 개최하던 벌판이기도 했으며 또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의 병정들이 말을 타며 활을 쏘거나 훈련을 하던 훈련장이 되기도 한다. 이젠 많은 차량 통행으로 출퇴근 시간에는 항시 정체되는 그런 도로로 바뀌게 되었다.

시간이 그렇게 흘러온 것이다. 성북동의 어귀, 동소문동은 앞으로 어떤 변화를 또 겪게 될까? 늘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정겨움과 편의성이 공존하는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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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하는 동소문동의 명소인 작은 식당 ‘디미방’을 부인과 함께 운영하고 있고, 요가와 명상 전문가이기도 하다. 우리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성북동을 사랑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는 진정한 성북동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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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1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8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8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8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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