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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May 23. 2017

한양도성

[1호·창간호] 성북의 역사 문화 유산|글 최연

1. 천도지(遷都地)의 선택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권력을 잡은 이성계는 개경(開京) 수창궁(壽昌宮)에서 국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보통 왕조가 바뀌면 국호(國號)를 새로 짓고 수도(首都)을 옮기는 것이 전통적인 관례이기도 하였습니다만 개경은 본래 구 왕조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근거지였기에 새로운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새로운 도읍지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크게 유행했던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개경은 오백년의 도읍지로 그 기운이 이미 다했다는 것입니다. 

 마침 권중화(權仲和)가 천도의 후보지로 공주 계룡산(鷄龍山)을 추천하자 태조는 큰 관심을 보이며 계룡산을 직접 답사하고 산수의 형세를 심사한 결과 이곳을 천도지로 삼을 결심을 하여 수도건설의 역사를 진행시켰습니다.

 그런데 당시 풍수의 대가였던 경기도 관찰사 하륜(河崙)이 계룡산의 위치가 남쪽에 편재하여 동북, 서북방과 너무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풍수상으로도 계룡산의 지형이 길흉정방에 있어서 길지(吉地)가 되지 못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공사가 중단 되었습니다.


 그래서 태조는 고려시대 이래 서운관(書雲觀)에서 소장해 오던 비록(秘錄)을 하륜에게 주고 새 도읍지를 물색하도록 명하니 하륜은 천도의 후보지로 한양의 무악(毋岳) 아래 현재 신촌과 연희동 일대를 지목하였고 태조는 당시 좌시중이었던 조준(趙浚)으로 하여금 현지를 답사케 하여 도읍지로서 적합한지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하륜을 제외한 모든 신하들이 적당하지 못하다고 반대 하였습니다. 할 수 없어 태조가 군신을 거느리고 무악 현지를 직접 두루 살펴보았으나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무악천도(毋岳遷都)는 결국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고려 시대부터 풍수 지리적으로 비보(裨補)의 요지로써 지목되어 왔을 뿐 아니라 고려 말 우왕, 공양왕 대에는 한때 천도의 후보지로 결정된 일도 있었던 남경(南京)을 새 도읍지로 마음에 두고 있다가 신하들과 고려 남경의 옛 궁궐터를 살펴보고 산세를 관망하면서 동행한 지사 윤신달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국내에서는 개경을 상지로 하고 이곳을 그 다음으로 치지만 서북방이 낮고 수천이 고악하여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태조는 만족하여 왕사(王師) 무학(無學)에게 물었더니 “이곳은 사면이 고수하고 중앙이 평탄하여 도읍으로 삼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지만 여러 사람의 의견에 쫓아서 결정함이 좋겠다.”라는 신중론을 진언하자 하륜을 제외하고는 모든 신하들이 반드시 천도를 할 바에는 이곳이 가장 적합하다고 하여 한양천도는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한양천도와 함께 궁궐의 조성과 도성의 축조 등 그 시설이 차례로 완성되어 정치적,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납니다. 

 신의왕후(新義王后) 한씨(韓氏) 소생인 방원이 계비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이숙번(李叔蕃) 등 자기의 사병을 동원하여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아들인 세자 방석과 재상(宰相) 중심의 신도정치(臣道政治)를 주장하는 정도전, 남은 등의 세력을 제거한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에 태조는 골육상잔에 실망한 나머지 9월에 왕위를 새로운 세자에게 물려주니 이가 곧 정종(定宗)입니다.


 이 사건 이후 한양에 불길한 징조가 잇달아 일어나 민심이 흉흉해지자 서운관에서는 이를 이유로 글을 올려 피방 하기를 주청 하였습니다. 이에 정종은 즉위 년 1399년에 종친과 공신들을 모아 어가를 옮기는 문제에 대해 가부를 물었는데 모두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해서 개경으로 환도를 실행하였습니다.

 개경환도 이후 1년도 채 못 되어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상왕인 태조의 윤허를 얻어 당시의 실력자 정안군 방원을 세자로 삼고 곧 이어 같은 해에 왕위를 그에게 넘겨주었으니 이가 곧 태종(太宗)입니다.

 태종이 즉위한 다음 달에 개경의 수창궁에 화재가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다시 천도론이 대두 되었고 태종 2년에 왕이 하륜 등 문무 대신들을 모아 한양천도의 가부(可否)를 물었더니 구도개경론(舊都開京論), 신도한양론(新都漢陽論), 무악이도론(毋岳移都論) 등의 3가지 의견이 나왔으나 대부분이 개경에 머물자는 의견이므로 천도문제는 보류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뒤 태상왕(太上王)인 태조가 천도 문제에 적극적인 열의를 보이자 태종도 이에 동조하여 무악 일대를 친히 살펴보기도 하였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태종은 개경, 한양, 무악 이 세 곳을 놓고 종묘(宗廟)에서 군신들과 더불어 척전(擲錢)으로 점을 쳤습니다.

 신도한양이 이길일흉(二吉一凶), 개경과 무악이 이흉일길(二凶一吉)이란 결과가 나왔으므로 왕은 한양재천도론의 최종적 결정을 내려 태종 5년에 개경을 버리고 한양에 입성하여 창덕궁(昌德宮)에 입어함으로서 여러 해를 두고 분분했던 천도문제는 완전히 결말을 보게 되었습니다.



2. 한양의 풍수 지리적 입지


 중국식으로 지명을 정하는 원칙 중의 하나로 ‘산남수북왈양(山南水北曰陽), 일지소조왈양(日之所照曰陽)’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산의 남쪽, 물의 북쪽이면서 햇볕이 잘 드는 곳을 양(陽)이라고 한다고 하니 한양(漢陽) 이란 ‘북한산 마을’의 양지 바른 곳으로 한강의 북쪽, 삼각산의 남쪽 기슭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양은 삼각산에 기대고 한강을 품에 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典型)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양은 한강을 중심으로 북으로 삼각산(三角山)이 남으로는 관악산(冠岳山)이 동쪽 끝머리에는 아차산(峨嵯山)이 서쪽 끝머리에는 행주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 덕양산(德陽山)이 큰 울타리를 쳐주고 있으니 이를 일러 외사산(外四山) 즉 한양의 바깥 경계라고 합니다.

 그리고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세봉우리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보현봉에서 솟구쳐 형제봉을 지나 보토현(補土峴)에서 내려앉았다가 다시 솟아오른 곳이 북악(北岳)으로 한양의 주산(主山)입니다.

 조선의 정전(正殿)으로 그 권의와 위용을 떨쳤던 경복궁(景福宮)이 기대고 있는 산이 바로 주산(主山)으로서의 북악이기도 합니다.

 북악에서 동쪽으로는 낮은 산줄기가 이어지다가 조그만 봉우리가 아주 낮게 봉긋 솟았으니 이름하여 매 봉우리인 응봉(鷹峰)으로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 성균관(成均館) 그리고 종묘를 품고 있습니다.

 응봉을 지나 동쪽 끝머리에 타락산(駝駱山)이 있으니 지금의 낙산(駱山)을 말합니다.

 북악에서 서쪽으로는 불끈 솟아올라 인왕산(仁王山)을 일구었고 무악재(毋岳)에서 내려앉았다가 안산(鞍山)으로 다시 솟구쳐 서쪽 끝머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남으로는 남산(南山)이라 불리는 목멱산(木覓山)이 부드럽게 엎드려 있는데 그 생김새가 누에와 비슷하다고 잠두봉(蠶頭峰)이라고도 부릅니다. 주산인 북악(北岳)에는 백악신사(白岳神祠)를 모셔 진국백(鎭國伯)으로 삼았는데 이런 연유로 달리 백악이라고도 부르며 남산을 목멱산이라 달리 부르는 것은 그곳에 목멱신사(木覓神祠)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한양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어떻게 어우러져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물줄기를 살펴보면 도성 안 즉 내사산 안에 있는 물줄기를 내수(內水)라고 하는데 청계천(淸溪川)의 이름이요 이는 모두 외수(外水)로 흘러 들어가고, 내사산 밖 외사산 안에 있는 물줄기를 외수(外水)라고 하며 한강(漢江)의 이름입니다.

 한강의 북쪽 즉 한양에서 외수인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는 크게 보아 세 갈래인데 그 하나는 삼각산(三角山)의 문수봉(文殊峰)과 보현봉(普賢峰) 사이의 계곡으로 흐르는 홍제천(弘濟川)과 비봉(碑峰)과 수리봉 서쪽능선으로 흘러내리는 불광천(佛光川)이 지금은 거대한 두 개의 산으로 변한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이지만 예전에는 참으로 아름다웠던 섬인 난지도 옆 월드컵경기장에서 합류하여 한강에 스며들고 다른 하나는 도봉산(道峰山)의 동쪽 능선과 수락산(水洛山)의 서쪽능선이 부려 놓은 모든 자그마한 물줄기들을 한데 모은 중랑천(中浪川)이 상계, 중계, 하계의 대형 아파트단지로 변한 마들 평야를 알맞게 적시고 한양대 앞 살곶이 다리에서 청계천과 합류하여 한강에 안기고 마지막으로 인왕산에서 발원하여 도성 안을 동쪽으로 가로질러 살곶이 다리에서 중랑천과 합류하여 한강에 안기는 청계천(淸溪川)이 그것입니다.

 세 갈래의 물줄기중 내사산 안(도성 안)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청계천 뿐이므로 청계천이 한양의 내수임에 분명합니다.

 내수인 청계천은 북악과 인왕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경복궁을 휘둘러 나오는 금천(禁川)과 삼청동에서 발원한 중학천(中學川)을 받아 안고 도성 밖으로 흘러나가 북악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드는 성북천(城北川)과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드는 정릉천(貞陵川)을 아울러 마침내 한강으로 스며드는 물줄기입니다.


 한양 도읍지의 물줄기를 풍수 지리적으로 살펴보면 내수(內水)인 청계천은 도성의 서쪽인 인왕산에서 발원하여 동진(東進)하고 외수인 한강은 동쪽 끝 백두대간에서 발원하여 서진(西進)을 하다가 살곶이 다리 앞에서 서로 아우르며 하나가 되는데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다가 어우러지며 한 방향으로 바뀌는 절묘한 수태극(水太極)의 형상이니 이를 길지(吉地)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각산(三角山)을 종산(宗山)으로 북악(北岳)을 주산(主山)으로 좌청룡을 낙산(駱山)으로 우백호를 인왕산(仁王山)으로 안산(案山)을 목멱산(木覓山)으로 조산(朝山)을 관악산(冠岳山)으로 하는 지형은 풍수 지리적으로 몇 가지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첫째는 종산인 삼각산의 기운이 주산인 북악에 전해지는데 있어 그 길목이라 할 수 있는 지금의 북악터널 위쪽이 너무 낮아서 병목현상을 이루는 것이고, 둘째는 좌청룡인 낙산이 우백호인 인왕산에 비해 무척이나 허약함이요, 세째는 조산인 관악산의 화기(火氣)입니다.

 이렇듯 문제가 있는 곳에는 항상 보완해줄 묘책이 있기 마련인데 풍수학에서는 너무 허(虛)한 기(氣)의 땅을 보완(補完)해 주는 것을 비보(裨補)라 하고 너무 강(剛)한 기(氣)의 땅을 이완(弛緩)시켜 주는 것을 압승(壓勝)이라고 합니다.


 지세가 갑자기 좁아져 병목현상이 나타나는 북악터널 위쪽 부분을 비보하기 위하여 매년 날을 정해 백성들을 동원하여 흙을 퍼다 날라 오목한 곳을 메우는 행사를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곳을 매년 흙을 더하는 고개라고 보토현(補土峴)이라고 불렀습니다.

 좌청룡의 동쪽 산줄기가 허약한 것의 비보책(裨補策)으로는 낙산의 산줄기를 조금 더 뻗어나가게 하기 위하여 동대문 역사공원 자리에 가산(假山)을 쌓았고 사대문의 이름이 모두 세 글자인데 동대문만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네 글자로 이름 지었으며 흥인지문 앞에는 한겹을 더 둘러친 옹성(甕城)을 설치하였습니다.

 관악산의 형세(形勢)는 화성(火星)으로 예로부터 ‘왕도남방지화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화기(火氣)의 산으로 보았는데 이를 누르기 위한 압승책(壓勝策)으로 남대문 밖에 남지(南池)를 조성하였고 관악산 옆에 있는 호압산에는 한우물이란 연못을 설치하였으며 관악산 주봉인 연주대에는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단지를 놓아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대문의 글씨를 모두 가로로 썼는데 남대문만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세로로 썼는데 이것은 숭례문의 예(禮)는 5행(行)의 화(火)에 해당되고 숭(崇)은 불꽃이 타오르는 상형문자(象形文字)이므로 숭례(崇禮)라는 이름은 세로로 써야 불이 잘 타 오를 수 있고 이렇게 타오르는 불로 맞불을 놓음으로서 관악의 화기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야말로 불로서 불을 제압하고(以火制火) 불로서 불을 다스리는(以火治火) 셈입니다.

 그런데 매년 흙을 더 보충해야 할 보토현에는 그 밑으로 아예 커다란 구멍을 뚫고 도로를 냈고 가산을 더욱 높게 쌓아야 함에도 오히려 남아 있던 가산마저도 밀어버리고 운동장을 만들었고 남지도 메우고 도로를 놓았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관악의 화기를 잡아야할 숭례문은 그 기운이 다 했는지 스스로 불타 버렸습니다


 다음으로 산세를 살펴보면 주산인 북악에서 왼쪽으로 동향(東向)하는 응봉과 타락산의 산줄기를 좌청룡이라 하고 오른쪽으로 서향(西向)하는 인왕산의 산줄기를 우백호라 합니다. 

 그런데 한눈에 보기에도 좌청룡 보다 우백호가 우람하고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풍수 지리적으로 좌청룡은 적자(嫡子), 장자(長子)를 뜻하고 우백호는 서자(庶子), 지손(枝孫)을 뜻하고 불에서도 좌(左)는 체(體)요, 우(右)는 용(用)을 뜻해 왼쪽을 근본으로 오른쪽을 쓰임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조선 오백년 동안 장자가 임금이 되어 제대로 왕 노릇을 한 사람은 선조(宣祖)와 정조(正祖) 둘 뿐인데 그나마 선조 때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나라가 위태로웠고 정조는 그리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장손으로 왕위에 올랐던 이들은 거의가 단명했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는데 세종의 아들 문종은 병약하여 단명했고 그의 아들 단종은 삼촌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했고 세조의 아들 예종도 단명했고 적자가 아닌 성종이 예종에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성종의 맏아들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났고 연산군을 쫓아낸 중종의 맏아들 인종도 단명했으며 효종의 장자 현종도 숙종의 장자 경종도 단명했습니다.

 그리고 주변 국가로 견주어지는 안산(案山)으로서의 목멱산은 주산인 북악과 너무 가까이 있고 그 위세 또한 주산인 북악보다 강하여 늘 주변국의 침략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형국입니다.

 이렇듯이 문제가 많은 풍수적 조건을 갖고 있으면서 왜 굳이 이렇게 도읍을 정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자학의 이념에 기초한 도읍의 건설이라는 대의를 가진 삼봉 정도전(鄭道傳)의 고집 때문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궁궐의 좌향(坐向)에 대하여 삼봉(三峰)과 무학(無學)이 보이지 않는 알력이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절대군주가 살고 있는 궁궐이 어디에 위치하고 어디를 향하는가(坐向)는 도읍 전체의 구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풍수적으로 문제가 있다 해도 주군은 남쪽을 향해 통치해야 하고 신하는 북쪽을 향해 주군을 섬겨야한다는 성리학이념으로 궁궐의 좌향(坐向)이 정해졌습니다.


 이에 반하여 무학(無學)은 으뜸산인 조산(朝山)은 삼각산(三角山)으로 하고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北岳)을 좌청룡으로 목멱산(木覓山)을 우백호로 타락산(駝駱山)을 안산(案山)으로 삼아 궁궐이 동쪽을 바라보는 좌향을 대안으로 내놓았습니다.

 주산으로서의 인왕산은 북악 같이 푸석돌이 아니라 단단한 암반으로 형성되어 있고 마주보는 안산(案山)인 타락산(駱山)보다 매우 높고 세력도 출중해 능히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를 뜻하는 좌청룡인 북악과 지손(支孫)과 서자(庶子)를 뜻하는 우백호인 목멱산을 비교해 볼 때 좌청룡의 기세가 크고 길어 장남이 그 아우들을 세력으로 능히 아우를 수 있는 형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학의 대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혁명에 성공한 일등개국공신인 삼봉(三峰)과 몰락한 왕조의 지배이념이었던 불교의 왕사인 무학(無學)의 정치적 입지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봉(三峰) 정도전과 무학(無學) 대사의 궁궐의 좌향(坐向)에 대한 논란은 의상(義湘)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에 다음과 같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한산(漢山)은 금국(金局)이라서 궁궐을 반드시 동향(東向)으로 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가 쇠약해진다. 터를 고르는 자는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마라.

    동쪽은 허(虛)하고 남쪽은 낮으니 북악산 아래 터를 잡지마라.

    검은 옷을 입은 도적(倭賊)이 동쪽에서 쳐들어올까 두렵다.

    도읍을 정하려는 자가 스님 말을 들으면 나라의 운수가 좀 연장된다.

    그러나 만약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걸면 5대도 못가서 왕위를 뺏는 변고가 생기리라. 

     또 2백년 후에는 대환란이 닥쳐서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삼가 조심하라.”


 이처럼 <삼한산림비기>에서는 스님의 말을 따르라고 했건만 결국은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북악 아래 남향으로 궁궐을 지었고 그 결과는 예언한 바와 같이 되었습니다.

 5대도 못 내려가 왕위를 찬탈하는 변고가 일어났고(세조가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는데 세조는 태조의 증손자이니 왕위로는 7대지만 가계로는 4대입니다.) ‘200년 후의 대환란’은 임진왜란을 가리키는데 한양으로 천도한지 198년 만의 일입니다.



3 .한양도성 쌓기


 도읍의 위치가 정해지고 나면 제일 먼저 궁궐(宮闕)과 종묘(宗廟) 그리고 사직단(社稷壇)을 건설하게 됩니다.

 임금의 자리가 세습되는 고대사회는 임금을 낳은 조상들을 기리는 사당(祠堂)인 종묘(宗廟)와 백성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도록 농사가 풍년이 들어야하므로 튼실한 씨앗과 비옥한 농토를 바라며 토지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직단(社稷壇) 그리고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宮闕)을 우선적으로 지었습니다.

 그 위치는 중국의 관습에 따라 임금은 배북남면(背北南面)하여 통치행위를 하므로 궁궐은 남향으로 좌향(坐向)을 잡고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왼쪽인 동쪽에 종묘(宗廟)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社稷壇)을 건설하였습니다.

 궁궐, 종묘, 사직의 건설을 끝내고 다음으로 도읍의 방위를 위해 도성을 쌓게 되는데 평소 태조는 “성은 국가의 울타리요 강폭(强暴)한 것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며 도성의 구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는데 이러한 태조의 뜻에 따라 개국공신 정도전은 한양에 궁궐(宮闕)을 짓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그리고 관아(官衙), 도로(道路), 시전(市廛) 등을 차례로 건설하고 다음으로 도성을 쌓기 위해 성터를 잡으려고 무수히 애를 썼으나 결정을 하지 못하고 노심초심하고 있는데 어느 날 눈이 내려 산에 올라보니 지금의 성이 둘러친 곳에는 눈이 녹았고 다른 데는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눈이 녹은 선을 따라서 도성을 쌓았고 이 때문에 한양도성을 달리 설성(雪城)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때 확정된 도성은 북악(北岳), 낙타산(駱駝山), 목멱산(木覓山), 인왕산(仁王山)의 소위 내사산(內四山)을 연결하는 59,550척으로 지금의 도량형(度量衡)으로 환치시키면 대략18km 쯤 되는 길이입니다. 한양의 성곽은 태조가 처음 축조할 때는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이 섞여 있었으나 세종이 중수할 때 전부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숙종 때에는 사괴석을 사용하였습니다.


 성곽을 처음 축조할 당시 전국에서 민정 약12만 명을 동원하였는데 지역별로 경상도 49,897 명, 전라도 18,255 명, 강원도 9,736 명 동북면(함경도의 함흥 이남) 18,255 명, 서북면(평안도 안주 이남) 29,208

명 이었습니다.

 성곽 전체를 97구간으로 나누어 백악 동쪽을 1구간으로 하여 그 당시 사용되던 천자문의 글자 순으로 하늘 천(천)에서 시작하여 낙산, 목멱산, 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는 97번째 천자문인 조문할 조(弔)로 끝났습니다.

 한편 책임시공을 위해 실명제를 실시하였는데 구간마다 책임자와 감독자의 이름, 차출된 지역의 군명(郡名), 천자문 97자에 해당하는 각각의 자호(字號)를 성벽에 새겨 넣었습니다.

 이렇게 축조한 도성은 삼군문(三軍門)에서 수비(守備)와 수축(修築)을 맡았는데 훈련도감(訓練都監)은 숙정문 동쪽에서 돈의문 북측까지, 금위영(禁衛營)은 돈의문에서 광희문 남쪽까지, 어영청(御營廳)은 광희문에서 숙정문까지를 담당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성곽으로 둘러쳐진 도성에 사람들의 왕래를 위해 문(門)을 만들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네 대문(大門)을 내고 그 사이사이에 소문(小門)을 내어 모두 여덟 개의 문을 냈습니다. 

 이들 성문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는데 문 이름에 유교국가의 정치 이념인 인의예지(仁義禮智) 4대 덕목을 결부시켜 조선왕조 수도의 상징으로서의 위상을 여실히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사대문을 그냥 멋없이 동서남북의 방향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인 오상(五常),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가운데 인의예지 한 글자씩을 붙여서 명명하였으니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으로 이름 지었고 그렇다면 북대문은 지(智) 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숙정문(肅靖門)이라 한 것은 숙정문을 세운 뒤에도 사람의 왕래가 적어 대문으로서의 역할을 못하여 문루도 세우지 않은 유일한 대문이기 때문에 약간의 변화를 준 것 같습니다.

 이후 숙종(肅宗) 때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으면서 그 정문의 이름을 홍지문으로 명명하여 새롭게 보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소문(四小門)의 이름은 동소문이 혜화문(惠化門)으로 지금의 혜화동에 복원이 되어 있으며 동소문의 처음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으나 성종24년(1493년) 창경궁(昌慶宮)을 조성하면서 그 정문이 홍화문이라고 하여 혼동을 피하려고 혜화문으로 개명하였고 서소문은 소의문(昭義門)으로 덕수궁 앞 서소문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서소문도 처음에는 소덕문(昭德門)이라 했으나 성종3년(1472)에 예종의 비(妃)를 장순왕후로 추존할 때 시호에 ‘소덕(昭德)’이 들어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 개명하였고 남소문은 광희문(光熙門)으로 지금도 동대문과 장충동 사이에 우뚝 서 있고 북소문은 창의문(彰義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 불리며 세검정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서 있습니다.

 한양의 성곽은 태조 5년(1396)에 도성 축조를 마칠 때 대체적으로 성문과 문루가 만들어졌으며 성문은 모두 아래쪽에 월단(月團, 아치형 문) 즉 돌로 홍예(虹霓)를 만들고 그 홍예문 위에는 누각 즉 문루를 세웠습니다.

 임진왜란 때 문루는 모두 불에 타 없어졌고 월단만 남았다가 숙종과 영조 때에 문루가 중건되는데, 북대문인 숙정문은 여전히 문루를 세우지 않다가 최근에 복원 되었습니다.




최연 프레시안 서울학교 교장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호·창간호는 성북구청 2013 성북구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3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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