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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Aug 12. 2019

오랜 친구 같은 북한산 자락길

[플랫폼성북] 창간호|태그에세이

권남옥


멀리 외출을 했다가 우리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면, 먼저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콧구멍 속에 달콤한 아카시아 꽃내음이 가득 들어오면 비로소 집에 도착한 실감이 난다. 자동차 매연에 시달리며 여행을 하고 돌아온 날은, 차창을 한껏 열고 숨을 크게 쉰다. 청량한 나무 냄새가 차 안 가득 들어오면 우리 동네이다. 아무리 공기 좋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다녀와도 내가 사는 정릉동이 주는 개운함은 남다르다.


북한산에 이끌리듯, 이곳 정릉동으로 이사 온지 8년차다. 여기로 이사 올 즈음에 나는 피부병으로 갖은 고생을 하고 있었다. 결혼하여 첫 아이를 낳아 키우던 때에 지병인 피부병이 눈에 띌 만큼 심각해졌다. 새댁이 아이 한 명을 길러내는 일만해도 보통일이 아닌데, 나는 피부도 함께 살펴야 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손에 습진이 생기도록 씻고 닦을 일이 태산인데, 내 손은 피부병으로 얼룩덜룩해서 손에 물을 대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욕심과 건강한 피부를 갖고 싶은 바람과는 달리,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고되기만 했고, 피부는 더욱 심각한 상태가 되어 갔다. 피부과와 한의원을 전전했다. 돈과 시간을 상당히 소비하며 시달렸지만 어디에서도 상한 피부를 치료하지 못했다. 


친정어머니가 북한산에 놀러오셨다가 산 밑에 아파트가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셨다. 남편과 나는 아파트를 보러 왔고, 그 날로 계약을 했다. 집을 보러온 날, 난 창밖의 경치에 반해 버렸다. 창밖으로 북한산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생태 공원과 놀이터 그리고 멀리 보이는 북한산의 경치에 홀린 것처럼, 집의 다른 상태는 보지도 않고 덜컥 계약을 했다. 이 집에 살기 시작한지 8년이 되지만, 지금도 창문을 활짝 열고 내다보면 기쁘다.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던 지난 봄, 느닷없이 차가운 바람이 불더니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집으로 온 아이들에게 겨울 잠바를 다시 꺼내어 입혀야겠다고 생각한 그날에, 뒤 베란다 창문을 바라보며 넋이 빠지는 일이 생겼다. 베란다 너머로 하얀 눈이 나풀나풀 날리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눈이 점점 불어나 함박눈이 되어서 포슬포슬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저 멀리 산을 내다보니 청록색의 잣나무 숲이 눈꽃 옷을 소복이 입고 있다. 추운 겨울이 이미 지나간 한봄, 잣나무가 하얀 눈옷을 두툼히 입은 모습이 황홀경이다. 어떤 화가가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그려낼 수 있을까? 실력이 최고인 예술가가 좋은 재료를 쓴들 이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 앞 베란다 창문으로는 어느덧 진눈깨비가 차가운 비로 변해 있지만, 뒤 베란다 창문에는 눈이 쏟아지며 절경을 만들어 낸다. 자연이 만들어 주는 예술을 넋 놓고 한참을 바라본다. 날씨가 추워졌지만 괜찮다. 이런 경치를 매일 바라볼 수 있다면 충분하다. 


아이들을 낳고는 미술관이나 공연장을 가기가 녹록치 않다. 인위적인 아름다운 것을 감상하러 다닐 여력은 없지만, 집 뒤 북한산 자락길을 반시간 남짓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매일 변하는 숲의 모습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둥글둥글 숨어서 무엇이 들어있을지 궁금증을 일으키던 조그만 나무눈에서 연둣빛이 도는 여린 잎이 나오더니, 하루가 다르게 녹음이 짙어진다. 봄볕이 따뜻해지면 개나리가 꽃잎을 틔운다. 개나리가 흐드러질 무렵이면 진달래도 고개들 든다. 땅바닥을 보면 애기똥풀 밭이 넘실거리고 민들레가 여물어간다. 해가 기울 때는 변하는 빛에 따라 장관이 펼쳐진다. 눈부신 햇살이 잣나무 사이로 환하게 들어오며 솟아난 잣나무 뿌리에 음영을 드리운다. 비는 산을 짙은 색으로 단장시킨다. 비온 날의 산은 청량하게 세수를 한 모습이다. 흐릿한 황토색 낙엽들은 한층 붉게 톤업(tone-up)되어 생기가 돈다. 


북한산을 바라보는 집에서 아이들이 훌쩍 자랐다. 이제 초등학생이 된 두 아이들은 봄이 되면 북한산 개울물에서 개구리알과 도롱뇽알이 자라는 모습을 관찰하며 쫒아 다닌다. 정릉동의 뒷산인 북한산에 아이들과 틈나는 대로 올라가 누비고 다니는 사이에 아이들은 부쩍 자라고 나의 피부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북한산은 아이들에게 어미의 넓은 품이 되어주고, 나에게 의사가 되어주었다.


지난 며칠간 심한 감기로 산에 오르지 못했다. 한동안 발걸음을 하지 못한 북한산 자락길에 가며, 혹시 자락길이 낯설면 어쩌나, 어색하면 어쩌나 염려도 잠시, 북한산 자락길은 가장 아름답고 다정한 모습으로 나를 반갑게 품어준다. 북한산은 소곤소곤 귓속말을 속살거리듯이 진해진 나뭇잎의 모습 하나하나와 꽃잎의 이 모양, 저 모양을 보여준다. 나는 일상 속에서 북한산과 자락길을 마주하는 정릉동에 살고 있다. 



권남옥

편집 「플랫폼성북」 편집위원회  


성북구 시민협력플랫폼 구축사업(2차년도)는/은 성북구 지역시민사회의 자생적 활동 생태계 조성을 위해 활동주체들의 역량을 강화하고 지역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 네트워크 구축을 비전으로 여성·아동 복지 실현을 목표로 하는 지역단체 성북나눔연대, 동 기반 주민모임 성북동천, 성북의 지역활동가 단체 성북마을살이연구회, 성북구 대표 지역법인 함께살이성북사회적협동조합이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추진하는 사업입니다. 

"자치구 시민 주체의 성장을 통한 지역 협치 실현"이란 핵심비전을 갖고 추진되는 서울시 시민협력플랫폼 지원사업에 2017·2018 연속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추진중입니다.  (지원 : 서울특별시,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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