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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Jun 06. 2017

성북동 사람 이태준

[1호·창간호] 성북동의 예술가|글 이경돈

 삼선교에서 성북로를 따라 북쪽으로 걷다보면 나름 한다하는 맛집들을 만나게 된다. 한국인의 오랜 외식거리인 칼국수나 설렁탕은 물론이고, 택시기사님들이 자주 찾는 돈까스와 돼지불백 등 한 끼 식사로 썩 괜찮은 음식들이 즐비하다. 그 뿐인가. 최근 삼청동으로 젊은이들이 몰리더니 성북동까지 그 여파가 미쳐 고소한 커피전문점과 세련된 샌드위치 가게도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하긴 삼청동이 젊음으로 번성한다면 성북동도 뒤질 일은 아니다. 삼청동은 아기자기하지만 성북동은 그윽한 운치를 갖추고 있지 않은가.


 뜻밖일지 모른다. 맛깔 나는 음식이 코로 들어오는 사이에서 수연산방(壽硯山房)을 만나는 것은. 걷기 좋아하고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이미 보았을 것이다. 길이 좁아지고 고풍스런 운치가 시작되는 한 쪽에 오랜 세월의 색감을 띤 대문이 다소곳이 앉아 있음을. 이곳이 수연산방이다. 시원한 오미자차도 좋고 꽃마당도 예쁘지만, 1930년대 조선 최고의 소설가로 이름을 떨친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의 집이기에 더욱 기품이 난다.


 누구누구의 집이라 하면 으레 태어난 집을 말하거나 오래 살았던 곳을 가리킨다. 생가(生家)니 고가(古家)니 하는 명칭은 대개 그런 경우에 붙여진다. 수연산방은 이태준이 태어난 집도, 오래 산 집도 아니다. 


▲ 1946년 월북직후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태준 사진.


 하지만 이태준이 서른 되던 해 직접 목수를 불러 지은 집이니 진정한 이태준의 집이라 할 것이다.일본식 개량 주택이 속속 들어서던 식민지의 경성에서 한옥에 깃드는 ‘순박’과 ‘중후’를 탐내어 지었다는 수연산방은 여전한 순박함과 중후함으로 그곳에 그대로 서있다. 심지어 잘 가꾼 마당에서 오미자차를 마시는 기쁨까지 더해서.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지만, 역마살이 끼어서인지 방랑벽이 있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운명의 장난인지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했다. 그가 처음 고향을 떠나 머무른 곳은 연해주 해삼 위(海蔘) 그러니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아버지의 망명길이었으니 어렸던 그로서는 어찌할 수 없었겠지만, 몇 달 후 그곳에서 이태준은 아버지를 잃고 말았다. 아버지로 인해 떠난 길에서 아버지를 떠나보냈으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와 어머니는 귀국해 함경북도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의 가혹한 유년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몇 년 후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고 그는 고향인 철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건만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철원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함경도를 거쳐 철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9살의 고아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어린 이태준은 친척집을 전전하며 철원에서 소학교를 졸업했다. 예나 지금이나 졸업은 새로운 시작이었던 모양이다. 이태준은 길 위의 운명을 직각하고 자신의 손으로 새 삶을 열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각지를 떠돌았다.


 그러다가 이태준에게 작가로서의 길을 보여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장소는 휘문고등보통학교였다. 이 때 휘문에는 박종화, 정지용, 김영랑 등 후일 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 인물들이 수학하고 있었고 가람 이병기가 교편을 잡고 있었다. 교지에 몇몇 작품을 발표하며 문학도로 성장하던 이태준에게 세상은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5학년 중 4학년을 다니던 어느 날 그는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퇴학을 당하고 만다. 아버지의 망명과 아들의 퇴학이 나란히 놓이니, 피는 물보다 확실히 진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곧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처녀작 오몽녀(五夢女)는 이때의 산물이다.(10여 년 후 오몽녀는 나운규에 의해 영화가 된다)

 그의 등단을 도운 <조선문단>은 한국근대문학사의 첫 자리를 차지한 이광수를 비롯하여 김동인, 주요한, 염상섭, 현진건, 나도향, 박종화 등 활발하게 활동하던 젊은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던 곳이었고, 또 이름대로 조선에 처음 문단을 안착시킨 문학잡지였다. 지금에 학생들이 그들의 이름을 배울 수 있는 데에는 <조선문단>의 공이 크다. 하지만 가난한 고학생 이태준은 일본에서의 공부를 끝내지 못했다.


 그는 귀국하여 조선 최대의 잡지사였던 개벽사와 3대 일간지 중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박태원, 이효석, 김기림, 유치진 등과 모더니스트 작가 모임인 ‘구인회’를 만들기도 했다. 같은 해 소설 <달밤>을 간행하기도 하고 수연산방을 짓기도 했으니, 이 시기가 이태준에게는 절정기가 아니었을까? 수연산방이 지닌 그윽한 멋스러움과 근사한 운치는 조선 최고의 소설가가 최고의 절정기에 지은 집이기에 남겨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였는지는 모르되, 다음 해 그는 기자직을 버리고 전업 작가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가마귀, 구원의 여상, 제2의 운명, 황진이 등을 출간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지금까지도 문장 서술의 교본으로 언급되는 <문장강화>도 연이어 세상에 나왔다. 말 그대로 조선의 작가 이태준의 시대가 열린 때였다.


 근 10년을 착실한 기자이자 작가로 활약하던 그는 1938년 돌연 만주를 여행한다. 이 때의 만주는 일본 제국의 속국이면서 중일전쟁의 배후지 역할을 하고 있을 때이니, 그의 여행을 자발적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후로 황군위문작가단에도 이름을 올리고 조선예술상을 받는 등 제국주의 국가의 폭력에 협력한 꼴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조용히 낙향해 해방까지 칩거했던 이태준의 마음 한 켠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역사적 한 시기에 친일을 강요받았던 조선인 작가이자, 폭압적인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던 유약한 지식인이었다.


 해방 후, 이태준은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펼친다. 이 때 그는 요즘 흔히 말하는 좌파였다. 문학가동맹, 남조선민전 등에 참여하며 그는 좌익을 지지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율적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이 부풀어 오를 때였으니, 사람들은 각기 다른 꿈과 희망을 외쳤고 서로 다른 열정들이 싸움을 벌였다. 그가 월북하여 펴낸 <해방 전후>는 그러한 정황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는 소련을 방문한다. 식민지시대 작가들 중 몇몇이 세계를 일주하며 기행문을 남기기도 했지만 사회주의 종주국에 대한 문학적 기록은 이태준에게 맡겨졌다. 그가 남긴 소련기행은 지금도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핍진한 서술로 회자되고 있다. 골방에서의 창작보다 거리에서의 실천이 중시되던 때, 이태준은 작가로서의 임무를 그렇게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이태준은 곧 생명을 다한다. 북으로 간 모더니스트의 운명이 대개 그러했듯, 그도 채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가혹한 비판에 직면한다. 구인회 시절의 이력이 반동으로 낙인 찍혔던 것이다. 그래도 작가였던 그는 몇몇 단편과 작품집을 출간하며 활동했지만 결국 가혹한 숙청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 했다. 숙청 후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그도 풍문뿐이요, 이후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


 2013년 가을의 초입, 가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 수연산방의 꽃은 이미 졌을 것이다. 대신 단풍으로 피어올랐겠지. 쓸쓸해지는 바람을 타고 이태준과 그의 손때가 묻은 수연산방이 떠오르는 것은, 다만 문학을 곁에 두고픈 마음 때문은 아닐 것이다. 파란만장했던 시대와 그 시대를 온몸으로 견디며 글을 썼던 한 영혼에 대한 그리움 때문도 아닐 것이다. 그저 가을이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계절이 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태준의 수연산방은 길 맞은편 한용운의 심우장과 얼굴을 마주보고 겨울로 가는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경돈 성균관대학교 교수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호·창간호는 성북구청 2013 성북구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3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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