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북 Jun 28. 2017

성북의 역사 문화유산

[2호] 글 최연

1. 동양의 자연관


  동양에서는 세상 만물을 삼재(三才) 즉,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有機的)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빛(火)과 비(水)와 바람(風)을 내려주고(天時), 땅(地)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氣運)으로 자양분(滋養分)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뭍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나누고,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관계(逆像關係)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칭할 때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또는 산천(山川)이라고 합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發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흐르는데 이를 유역(流域)이라 하며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洞)’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마을을 일컫는 동네(洞)를 달리 동천(洞天)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사람들만이 좋은 곳에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신선(神仙)들도 하늘에서 내려와 노닐던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동천(洞天)을 곳에 따라서는 동천(洞川)과 동문(洞門)으로도 표기 하고 있습니다.


  한양도성 안에 다섯 곳의 유명한 동천이 있는데 인왕산(仁王山) 아래 옥류동천(玉流洞天), 북악(北岳) 서쪽에 백운동천(白雲洞天), 북악 동쪽에 삼청동천(三淸洞天), 낙산(駱山) 아래 쌍계동천(雙溪洞天), 목멱산(木覓山) 아래 청학동천(靑鶴洞天)입니다.


  도성 밖에도 유명한 동천이 다섯 곳으로 모두 삼각산(三角山)의 산줄기에 기대고 있으며 북악의 북쪽에 백석동천(白石洞天), 보현봉(普賢峰) 아래 성북동천(城北洞天)과 정릉동천(貞陵洞天), 문수봉(文殊峰) 아래 홍제동천(弘濟洞天)과 불광동천(佛光洞天)입니다. 이중에 성북동천과 정릉동천이 성북구에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境界)이고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中心)이 됩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고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 사람들’의 소통(疏通)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希望)의 통로(通路)이기도 합니다.


  정릉동천은 도성의 북대문(北大門)인 숙정문(肅靖門)에서 동소문(東小門)인 혜화문(惠化門)에 이르는 좌청룡 산줄기와 구준봉(狗蹲峰)에서 미아리 고개로 이어지는 북악산 길(북악스카이웨이) 산줄기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이며 정릉동천은 북악산 길 산줄기와 북한산성(北漢山城)의 보국문(輔國門)에서 이어지는 칼바위 능선 산줄기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입니다. 그래서 두 동천을 나누는 구준봉에서 시작되는 북악산 길 산줄기는 성북구의 중심 영역으로 이 산줄기에 아리랑 고개와 미아리 고개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2. 성북구의 행정조건


  한양(漢陽)은 도성(都城) 안은 물론이고 도성 밖 일정 부분까지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을 도성 안은 5부로 나누고 도성 밖은 자내(字內), 성저십리(城底十里), 교(郊), 기(畿)로 나누었습니다. 자내(字內) 지역은 성벽에 붙어 있는 도성 밖 마을로 성북구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자내라는 용어는 도성을 쌓을 때 팔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고을 단위로 책임제로 성을 쌓았기 때문에 자기구역이 어느 고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며 책임자는 누구인가를 돌에 새겨 성벽에 끼워 넣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글씨가 새겨진 성이라고 그 성 주위를 자내라고 불렀습니다.

  성저십리(城底十里)는 도성으로부터 십리거리의 지역으로 홍제, 도봉, 왕십리, 용산, 마포 송파 등이 해당되고 이곳은 도성 안에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조달하는 역할들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아무 작물이나 심을 수 없고 나라에서 지정한 작물을 심는데 주로 채소농사를 하였고 산에는 소나무를 심고 가꾸기를 장려하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그린벨트지역인 셈입니다.

  교(郊)는 도성으로부터 백리까지의 거리로 양주, 파주, 양천, 과천, 광주 등이 해당되며 도성 주위를 에워싼 고을들로서 도성의 위성도시 역할을 했으며 서울교외(郊外)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기(畿)란 도성으로부터 오 백리까지의 거리로 지금으로 말하면 경기도(京畿道) 일대입니다. 경기(京畿)라는 명칭은 도성(京)로부터 오 백리(畿) 지역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중국의 <주례(周禮)>에 따른 것인데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 그대로 적용이 되지 못하고 기(畿)는 이백 리에서 삼백 리 정도의 거리이고 한양의 위치가 서쪽으로 치우쳐 있어 서쪽으로는 이백 리도 채 못 되는 거리입니다.



3. 성북구의 지형조건


  백두대간(白頭大幹)이 그 산줄기를 남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분수령에서 갈라져 서쪽으로 한북정맥(漢北正脈)으로 이어지고 삼각산 영봉(靈峰)에서 남쪽으로 그 방향을 돌려 삼각산 즉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를 일구고 보현봉(普賢峰)에 이르러 동남향하면서 형제봉(兄弟峰)과 구준봉(狗蹲峰)을 지나 마침내 한양(漢陽)의 주산(主山) 북악(北岳)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산줄기의 흐름을 풍수 지리적으로는 내룡(來龍)이라고 하는데 산의 기운(氣運)이 산줄기(龍)의 뻗침과 함께 전해져 온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헌걸찬 정기(精氣)가 산줄기의 뻗음을 타고 한양의 주산인 북악에 와서 맺혀 그 기운을 한양 도읍에 불어 넣어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봉에서 북악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양의 입수(入首)목에 해당되는 보토현(補土峴)에서 잘룩져 병목현상을 일으키고 있어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하였기에 나라에서는 세검정에 있었던 총융청(摠戎廳)에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특별한 날을 잡아 백성들을 동원하여 잘룩진 곳에 흙을 퍼다 날라 메꿈으로서 산의 기운이 원활하게 이어져 전해지도록 하였는데 흙을 보충한 고개라는 의미로 이곳을 보토현(補土峴)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더욱 북돋워 주어야 할 보토현 아래에는 북악터널이라는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으니 좋은 기운이 서울 장안까지 펼쳐지기는 이젠 글렀는가 봅니다.


  북악의 동쪽으로 뻗어 있는 능선에 있는 숙정문 바깥 골짜기로부터 그 흐름이 시작되는 성북동천(城北洞天)은 도성 밖의 경치 좋은 곳으로 ‘자하문 밖’과 함께 으뜸으로 꼽히는 곳으로 이 일대를 북둔(北屯)이라고도 부릅니다.

  도성 수비를 맡은 군대인 3군문(三軍門) 즉, 훈련도감(訓練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중에서 어영청(御營廳)의 북쪽 창고(北倉)가 있었던 곳이라 북둔이라 불렀습니다.

  북둔 일대는 복숭아나무가 많아서인지 홍도동, 도화동, 복사동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복숭아나무는 보이지 않고 그 명칭이나마 동명(洞名)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은 인왕산(仁王山)의 살구꽃, 서대문 밖 서지(西池)의 연꽃, 동대문 밖 동지(東池)의 수양버들, 세검정 근처 탕춘대(蕩春臺)의 수석(水石) 그리고 성북동의 복숭아꽃(北屯桃花) 구경을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아쉽게도 서지의 연꽃과 동지의 버드나무 그리고 탕춘대의 수석은 그 자취를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메꾸어지고 복개되어 원형 복원이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인왕산과 북둔 일대는 지금도 찾는 이들이 많이 있으니 이곳에다 살구나무와 복숭아나무를 많이 심는 것을 지자체에서는 정책적으로 시행하여 옛 정취를 살려보려는 노력을 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4. 성북구의 역사 문화유산


  한양도성(漢陽都城) 중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과 동소문인 혜화문(惠化門)이 성북구와 인접해 있습니다.

숙정문은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백성들이 드나들기 어려워 거의 사용하지 않아 문을 닫아 두었으나 혜화문은 북방의 여진족(女眞族)이 조선에 사신(使臣)이 올 때 이문을 통해 도성에 들어와 여진족이 머무는 숙소인 북평관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혜화문은 함경도로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군사독재 시절에 삼청각(三淸閣)과 대원각(大苑閣)은 권력자와 기업총수들이 서로 만나 정경유착(政經癒着)의 야합(野合)을 하던 요정(料亭)으로 이 두 곳이 모두 성북동천 상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성북동천이 권력의 중심인 청와대와 가깝고 그만큼 풍광이 수려하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삼청각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음식점과 예식장으로 바뀌었고 대원각은 주인이 법정(法頂)스님에게 기부하여 지금은 길상사(吉祥寺)라는 멋진 도심 속의 사찰로 바뀌었습니다.

  대원각의 소유주였던 김영한(1916-1999)씨는 16살 때 조선권번(朝鮮券番)에서 궁중아악(宮中雅樂)과 춤과 노래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되었고 그 이후 월북시인 백석(白石)(1912-1995)과 사랑에 빠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라는 아명(雅名)까지 받았으며 1953년에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소유’ 라는 책을 통하여 법정 스님을 알게 되고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기증하고 법정 스님으로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法名)을 받았는데 이런 연유로 길상사라고 절 이름을 지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가진 것을 모두 보시하고 몸은 화장하여 길상사 뒤편 언덕에 산골(散骨)하였으니 그야말로 정신적인 스승인 법정스님의 가르침인 ‘무소유’를 철저히 실천한 것 같습니다.


  성북동천 하류에 있는 성락원(城樂園)은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相應)의 별장이었으며 의친왕 이강(李堈)이 별궁으로 사용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성락원은 자연적 지형을 잘 이용한 별장으로 생활(生活), 수학(修學), 수양(修養)의 기능을 하는 앞뜰과 후원(後園)의 역할을 하는 뒤뜰로 구성되어 있으며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비롯한 행서체(行書體)의 좋은 글씨가 바위에 많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사유지로서 일반인의 관람이 불가능하여 전해지고 있는 낡은 사진으로만 그 일면을 엿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북향(北向)을 한 독립지사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尋牛莊)이 조촐하나마 의기(義氣)가 서린 아담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만해는 결국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광복 1년 전에 죽어 지금은 망우리 독립열사 묘역에 부인과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심우장에 걸려 있는 오도송(悟道頌)은 거침없는 만해의 기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장부는 가는 곳마다 고향이거늘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사람들은 시름속의 나그네로 오래도록 보내네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한소리 큰 할로 삼천 대천세계를 깨뜨리니

설리도화편편비(雪裏桃花片片飛)

눈 속 복사 꽃잎이 펄펄 날리네


  그리고 성북동천이 한양도성의 바깥쪽을 휘감고 돌아가는 곳에서 선잠단지(先蠶壇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선잠단지는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를 많이 생산하기 위해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를 배향하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왕비(王妃)가 친히 행차하여 양잠(養蠶)의 시범을 보여주던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풍요로운 먹을거리(食)와 입을거리(衣)를 얻기 위해 백성들에게 농사(農事)와 양잠(養蠶)을 권장하는 행사를 왕과 왕비가 직접 나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왕은 전농동에 있는 선농단(先農壇)에서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행사(親耕行事)를, 왕비는 성북동천 아래에 있는 선잠단(先蠶壇)에서 누에치는 시범을 보이는 친잠행사(親蠶行事)를 주관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백성들의 노동력이 늘어날 것이고 늘어난 노동력만큼 생산도 많아져 백성들의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풍요롭게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성북동천 하류에 있는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선생이 전 재산을 투척하여 건립한 간송미술관과 월북 작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 고택 등도 둘러보면 좋은 곳입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종로에서 아흔 아홉 칸의 대부호의 집에서 태어나 휘문고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문화재가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미술품과 문화재의 수집과 보존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하여 서화(書畵)뿐만 아니라 석탑, 석불, 탱화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데 힘썼습니다. 1966년 보화각을 그의 호를 따서 간송미술관으로 개명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이곳은 문화재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만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에 보관된 문화재는 국보 70호인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原本)을 비롯한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그리고 겸재(謙齋) 정선(鄭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작품 등 5천여 점이 소장 되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복개되어 자동차 도로로 변했지만 예전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하였던 성북동천에 기대고 있는 마을들은 물줄기를 경계로 해서 남쪽과 북쪽이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양도성 밖 북쪽 성벽에 기대고 북향을 하고 사는 남쪽마을은 서민들의 삶이 물씬 풍기는 6, 70년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구준봉(狗蹲峰) 아래 양지바른 언덕에 둥지를 틀고 남향을 하고 사는 북쪽마을은 재벌 회장들의 대저택이 들어섰었는데 그 재벌들이 목멱산(木覓山) 남쪽 기슭인 이태원으로 옮겨감에 따라 지금은 외국대사(外國大使)들의 저택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가까운 곳에 외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한 외교 타운도 세워져 있습니다.

  70년대 당시 소위 ‘도둑촌’이라 불렸던 이곳에 재벌 회장집들이 들어설 때 현지 주민들의 내몰리는 모습을 비둘기에 빗대어 노래한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는 그때의 광경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최근에는 뉴타운 개발로 쫓겨나는 서민들의 신산스런 삶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 중략 -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이자 조선왕조의 최초의 왕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으로 본래 경운궁(慶運宮) 서쪽 지금의 주한 미국대사관저 뒤편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도 그때의 석물(石物) 일부가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태조의 신덕왕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으면 그의 묘를 사대문 안에 두고 그 동쪽에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願刹)인 흥천사(興天寺)를 지금의 서울시 의회(과거 국회의사당) 쯤에 170여 칸 규모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소생들과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등 개국공신들을 참살(慘殺)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 분묘(墳墓)는 지금의 이곳 정릉으로 이장시키고 정자각(丁字閣)은 헐어버려 그 목재와 석재를 가까이에 있는 중국 사신이 머무는 북평관(北平館)의 북루(北樓)를 짓는데 썼고 신장상(神將像)이 새겨진 병풍석(屛風石)은 홍수로 떠내려간 광통교(廣通橋)를 돌다리로 다시 놓는데 쓰게 하였습니다.

  그 병풍석은 청계천(淸溪川)이 복개(覆蓋)되면서 지하에 묻혀 있다가 청계천 복원공사로 훤히 그 모습을 드러내 지금은 청계천 광통교(廣通橋) 밑에 가면 언제라도 볼 수가 있습니다.


  큰 규모로 지어진 흥천사도 정릉의 이전에 따라 아리랑 고개 초입에 작은 규모로 옮겨져 ‘새로 지은 작은 흥천사’라는 뜻으로 신흥사(新興寺)라 부르면서 주변의 회갑잔치를 하는 많은 음식점 때문에 유명해졌다가 최근에 본래의 이름인 흥천사를 되찾았습니다.

  아리랑 고개는 정릉으로 가기 위해서는 넘어야만 하는 고개이기에 본래 정릉고개로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에 항일의 내용을 담은 영화인 나운규(羅雲奎) 감독의 아리랑을 이곳에서 촬영함으로서 그때부터 아리랑 고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미아리 고개는 인왕산과 안산 사이에 나 있는 무악재와 함께 한양 도성을 나와 북으로 향할 때 넘는 고개로서 무악재는 조선이 사대(事大)하던 중국으로 통하는 길이고 미아리 고개는 조선이 오랑캐라 칭했던 여진족(女眞族)이 드나들던 고개였습니다.

  그래서 달리 되너미 고개라 불렀고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 또는 호유현(胡踰峴)이라 표기했습니다.




최연은 프레시안 서울학교 교장이다. 서울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울 전문가다. 이 글은 지난 호 <한양도성>에 이어지는 성북구의 문화유산 이야기 2편이다. 성북구의 행사에 자료로 주신 글을 수록한 것이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2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4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4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이 멈춰있는 문방구 할아버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