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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Aug 14. 2017

최순우 옛집을 답사하다

[3호]성북동의 문화재|글 박진하

  요즘 답사여행에 관련된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고 문화재가 있는 관광지는 많은 답사 객으로 넘쳐나고 있다. 아니 문화 해설사라는 제도가 있어 해당 문화재를 소개하는 정도도 상당 수준이다. 이를 듣거나 보는 이가 전공한 사람도 아닌 일반인이다. 이만큼 문화재를 보는 눈높이를 높여준 분들을 논하려 한다면 혜곡 선생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우리 문화사랑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하나로 그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우리의 수준을 한격 높였다.

  존경하고 뵙고 싶은 사람이 고인이 되었다면 그를 간접적으로나마 만나 볼 수 있는 방법으로는 생존해 있던 시기에 거처하던 생가를 방문해 보는 것이다. 특히 선생처럼 우리 문화재를 감상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사랑하게 만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당신이 마지막까지 사셨던 가옥이 우리 성북동에 있다.


  옛사람이 집을 구함에 있어 우선했던 것은 생활의 편리성이요, 땅의 기운의 성쇠를 보는 일이다. 지기(地氣)를 살펴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우뚝 솟아난 산세의 흐름을 살피는 것이다. 산세의 흐름은 지기가 흘러간 증거라 본다. 그리고 그 산세가 물을 만나 멈춘 땅을 지기가 응축된 길지(吉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지역은 그 지기의 흐름과 멈춤이 명확하여 확인하기 쉬우나 우리가 거주하는 주택지는 평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지기의 흐름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시냇물이나 강물의 형세를 보고 판단한다. 어느 땅이든지 물이 그 지역을 휘감고 도는 길지가 있다면 그곳이 지기가 가득한 명당이다. 대표적인 명당이 하회 마을이다. 그 마을을 중심으로 강물이 휘감아 돈다.

  성북천은 크게 세 번에 걸쳐 휘감아 돌아 성북동을 빠져 나간다. 그 첫 번째가 덕수교회가 있는 땅이다. 이곳을 차지하고 큰 가옥을 건축한 사람은 이종석이라는 거부이다. 마포에서 젓갈장수로 큰돈을 벌어 별장을 만든 것이다. 그의 가옥은 지금도 교회 후원에 남아있다. 두 번째는 간송미술관이다. 그 미술관을 정점으로 성북천이 크게 휘감아 돌아 내려와 다시 혜곡 선생의 가옥 앞에서 반대 방향으로 튼다. 신한은행 주변이 이 성북천이 내어 준 세 번째 길지인 것이다. 그래 선생은 이 땅에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신한 은행 성북 점을 끼고 돌아 들어가면 최순우 옛집이라 표지가 보인다. 다른 집보다 지대가 꽤나 높다. 골목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려면 돌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그 계단이 일곱이니 그 만큼 축대를 높인 것이다. 대문 좌우에 병치된 문간채는 “ㄴ”자 형태로 만들어져있다.

  좌측 문간채는 수직으로, 우측은 수평으로 배치되어 있어 대문 밖에서도 세 칸 넓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대문 밖에서 보면 좌측은 한 칸이 보이고 우측은 세 칸에 여유 공간을 더하고 있다.


  기본적인 축대는 막돌 쌓기 방식으로 만들었고 그 위에 긴 장대석을 두었다. 그리고 그 위로 담장을 쌓았다. 밑단은 5단 높이의 사각석이, 윗단은 벽돌 3단을 테두리 속에 넣어 배치했다. 또 그 위로 환기창이 보인다. 이런 구성에서 우리는 균형미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축대와 담장, 환기창을 배치한 적정 비례에서는 우아함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시멘트를 이용해 축조했다는 것이다. 이 보다 더 큰 아쉬움은 여러 개의 안내표지와 이 집을 보존하는데 기여한 사람의 명단을 대문 좌우 벽면에 새긴 것이다. 그저 최순우 옛집이라는 안내판 하나면 족하지 아니할까 생각한다. 또 기여자 명단은 고아원에 찾아가 여러 큰 선물 박스를 앞에 두고 원아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기부자를 닮아 있어 씁쓸하다.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홍살문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 비교적 화려한 장식을 배제한 대문을 밀고 서면 조그마한 마당 정원이 나타난다.

  소나무와 여러 화초가 심어진 뒤쪽으로 사랑방이 보인다. 대문 전면에 선생이 기거하던 서실이 위치한 것이다. 그걸 살짝 가리는 병풍역할을 담당한 것이 정원이다. 대문 좌우에 있는 문간채는 각각 3칸으로 되어 있으며 2칸은 칸막이를 터서 거실처럼 사용했고 한 칸은 방으로 만들어 문객이 이용하도록 했나보다. 대체로 방문은 이중문으로 되어있다. 그 안쪽은 비교적 단아한 용(用)자 살 무늬의 미닫이로 그 바깥은 흔히 한옥에서 볼 수 있는 띠살 형식의 여닫이문으로 되어 있다. 겨울 추위에 대비하여 이중으로 방문을 만들었나 보다. 거실과 방 사이에도 방문이 있어 거실에서 한담을 나누다 곧바로 객실로 들어가 쉴 수 있게 했다.

  대문 오른 편 문간채를 지나면 조그마한 공간이 있다. 문간채와 안채 사이에 일정 공간을 두어 격리했다. 작은 문인 상 한 쌍과 앵두나무처럼 보이는 나무가 있다. 이곳에 펌프를 두면 운치를 더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우물은 마당 정원에 있었다. 이 위치에서 후원에 있는 장독대를 바라보면 이 집 최고의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 안채와 담장 사이에 통행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디딤돌을 두어 비 올 때 젖은 땅을 딛지 아니하고 갈 수 있도록 했다. 또 중앙에 놓인 이 돌들이 만든 직선은 이 공간을 보다 넓게 보이게 만들어 협소함에서 오는 갑갑함을 해소시키고 있다.

  그 왼쪽으로는 따님이 거처하던 건넛방과 거실의 벽면이 있으며 그 오른쪽으로는 기와를 이용한 장식 담장이 보인다. 평면 기와를 깨서 수평으로 점선을 몇 겹으로 그었다. 이처럼 너무나 단순한 장식의 담장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너머로 장독대가 보인다.

  우린 곧바로 선생과 가족이 거주하던 안채로 가지 아니하고 뒤뜰로 나아갔다. 장독대를 두 단으로 만들어 그 높이를 달리해 크고 작은 장독을 배치했다. 그 뒷담은 빨간 벽돌담으로 되어 있어 옹이와 잘 어울리게 했다. 또 후원 한편으로는 돌로 만든 원형 테이블에 의자 일곱 개를 놓아 한담을 나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뒤 뜰 정원을 만들어 운치를 더했다. 맑은 물을 담아 두는 돌로 만든 물받이 통과 화초들이 무성하다. 그 사이로 조성된 길에는 역시 돌 디딤돌을 두어 다닐 수 있게 했다. 그 중 가장 으뜸은 문인 상이다. 전체적으로 문인 상이 3쌍이 있다. 그 가운데 선생이 가장 사랑하신 문인 상을 여기에 둔 듯하다. 꼭 돌하루방을 닮아 있다. 단순한 사각형 돌을 옆만 조금 깎아 관모로 새기고 큰 귀는 홈을 깊게 한 것이 전부이다. 옷 모양은 선 3개를 그은 것으로 마무리 했다. 이것은 단순한 선 몇 개로 모든 아름다움을 표현한 현대 추상화를 닮아있다. 감사합니다. 이런 아름다운 석

물을 찾아 여기에 두신 것에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그 뒤 담장에는 하단 중간을 앞으로 돌출되도록 해 화초를 심었다. 텅 빈 공간보다는 담장 중간에 화초가 있고 그 사이로 담쟁이가 있어 안채에서 바라다보는 풍치를 아름답게 한다.

  안채도 문간채와 유사하게 “ㄱ”자 구조로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터진 “ㅁ”자가 되었다. 수평으로 5칸과 수직으로 3칸인 것이다. 2칸은 터서 거실 겸 사랑방으로 만들어 선생이 사용했고 나머지 3칸은 안방이 되었다. 안방과 따님의 기거하던 건너 방 사이에는 2칸 넓이의 거실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방과 안방이 있는 본채 뒤편으로 긴 툇마루가 있다. 그 곳에 앉아 여름날의 더위도 식히며 하늘 높이 떠오른 보름달도 감상할 수 있을 듯하다. 기단 위에 놓인 댓돌과 툇마루, 인방과 방문 그리고 창방, 첨자 등으로 구성된 공간은 그야말로 예술이다. 흰 벽면과 갈색 나무를 이용한 공간 배치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비례 미에 감탄하게 만든다. 선생의 사랑방 문턱은 다른 것보다 높다. 방문을 활짝 열고 팔을 뻗어 턱을 괴고 문턱에 기대 후원을 바라보는 재미를 더하기 위한 장치임에 분명하다. 또 안방의 2개 방문 외는 그 높이를 각각 달리하여 균형과 파격의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기둥 위에 있는 주심 공포에 새겨진 소용돌이 무늬는 선생의 취향을 보는듯하여 좋다. 그건 신석기 원시인이 새긴 암벽화 속 용수철 무늬를 닮아 있다. 단순한 추성성이 돋보이는 분청사기를 좋아하시던 선생의 마음이 그렇게 남아 있는듯 하여 좋다. 지금도 그가 기거하시던 방안에는 그림 한 점이 걸려있다. 운보 선생의 그림처럼 보인다.

  그의 순진함이 드러난 작품이 잘 어울린다.

  기와지붕의 처마 선을 보면 수평으로 주우욱 이어지다 끝에 가서 살짝 올라간다. 금방이라도 그 긴 기와지붕이 커다란 봉황이 되어 하늘 높이 날아올라 갈 것 같은 상승감이 느껴진다. 다만 아쉬움은 있다. 이런 멋진 처마 끝선을 볼 수 없게 만든 것이 있으니 물받이 양철통이다. 봉황 모양을 새긴 물받이 통은 일제가 남긴 흔적이다. 이것이 멋진 한옥의 처마 끝선을 가리고 있다.


  선생은 마당 전원보다 후원을 사랑하셨을 것 같다. 사랑방에 “두문즉시 심산(杜門 卽是 深山, 대문을 닫으면 깊은 산속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이라는 현판이 있어 이를 짐작하게 한다.

  안채 앞쪽으로 돌아 나오면 앞마당으로 곧장 나갈 수 있는 방문이 거의 없다. 다만 사랑방에만 하나 있고 안방의 띠자 무늬 방문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장식적인 측면이 강한 듯하다. 안방은 안방과 건넛방 사이에 있는 대청을 거쳐 출입한 듯하다.

  전체적으로 안채 앞을 왼쪽에서부터 훑어보면 흰 벽면이 대부분인 첫 번째 칸을 지나면 사랑방에 붙어있는 방문이 보인다. 이어 아(亞)자 살 장식으로 만든 아름다운 환기창 4개가 위쪽에 설치되어 있는 또 하나의 흰 벽면이 나타난다. 그 옆으로 띠살 무늬 방문이 고착되어 있다.

  그런 다음 “ㄱ”자로 꺾여 대청마루와 따님이 이용하던 건넛방이 있다. 대청은 우리 한옥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우물마루(井) 형식이다. 전면부에 위치한 툇마루는 사랑방과 안방을 걸쳐 있으나 대청마루 앞에서 끊기고 따님 방문 앞에 또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따님이 이용하던 건넌방은 밖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방문이 없다. 안방처럼 대청을 거치도록 되어있다. 여자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환기할 수 있도록 만든 창문은 유리로 되어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같이 동행한 둘째 딸이 말한다. “아빠! 저 유리 창문에 그림이 새겨져 있어요.”라고 말한다. 가만히 보니 산도 보이고 전봇대가 줄지어 서있는 신작로도 새겨져 있다.

  이 옛집에 걸린 문구를 보면 선생이 추구하던 이상 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글귀에서는 자연풍취를 즐기던 낙향 선비의 모습이 그려지고 안방 출입문 위에 걸린 현판(溫良恭儉讓而得之; 유학이 추구하던 5가지 덕목으로 온화, 선량, 공경, 검약, 겸손)에서도 선비들이 지향하던 좌우명이 보인다. 건너 방문 앞에 부착된 매심(梅心)에서는 그 방에 거주하는 따님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는 매화를 닮기 원했던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는 귀양처에서 시집간 따님에게 매화를 그려 보내준 정약용 선생의 마음을 닮아있다.

  선생은 이 땅에 남아있던 마지막 선비가 되고 싶었던 것일 게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수(낮잠; 午睡)나 심산(깊은 심심산골; 深谷)과 같은 글귀에서 도가의 신선 풍류가 느껴진다. ‘집은 그 주인을 닮는다.’ 하였던가. 올곧은 선비와 유유자적하는 신선의 모습이 이 옛집에서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이 집을 되살려 일반에게 공개한 많은 분께 감사한다.


박진하는 명상가이며 본지 편집위원이고, 현재 성북동에서 식당 ‘디미방’을 운영하고 있다. 요가와 명상에 관한 책을 두 권 내기도 했으며,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다. 이 답사기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 입학 예정인 딸과 함께 최순우 옛집을 답사하고 쓴 글이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3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4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4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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