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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Aug 17. 2017

성북동91번지의원

[3호] 성북동, 이곳|글 최명은


봄, 가을, 병원이야기


  어제 점심시간에 봄이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봄이는 병원 마당에 사는 30킬로그램이 넘는 레브라도 레트리버 개이다. 나이는 한 살이 채 안됐는데 처음 병원에 안겨서 왔을 때 작은 인형만 하던 강아지가 하루하루 쑥쑥 크더니 이제는 안을 수 없는 거대한 크기가 되어버렸다. 실제로는 자신이 아직도 아주 작은 강아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봄이는 사람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해서 훈련을 받으면 맹인안내견을 할 수 있는 종류의 개이다. 병원 마당에 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찌나 애교를 떠는지 인기가 너무 좋아 대문 사이로 이것저것, 초코파이, 김밥 같은 살찌는 음식들을 신나게 얻어먹는 장면이 종종 목격된다. 덕분에 몸매는 점점 둥글둥글한 알 수 없는 라인의 강아지가 되어가고 있다.

  가을이도 병원에 사는, 종종 대기실에도 들어와 있는 3킬로그램이 채 안되는 하얀 마르티스 강아지이다. 봄이가 오기 전 가을에 와서 가을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병원 개원할 때부터 함께 했으니 나름 개원멤버이다. 봄이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크기이지만 성격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아침에는 이층 베란다로 출근해서 온 동네를 향해 악다구니를 쓰며 짖어댄다. 옆집이 수도원이 아니었으면 벌써 민원이 몇 번 들어왔을 것이다. 정말 열광적이고 못되게 악을 쓰면서 짖어대는 가을이의 몸 상태를 걱정하신 옆집 신부님이 찾아오셔서 면담을 해 주셨다. 가을이를 무릎에 앉히고 쓰다듬으시면서, ‘가을아, 신부님은…가을이의 목이 걱정돼…가을이가 그렇게 짖으면 가을이의 목이 너무 아플 것 같아…가을아, 그만 짖자…가을이 목이 아프지?’ 그래도 가을이는 여전히 아침마다 성북동 24로 길을 지키며 짖어댄다. 악악악악악….

  사람들이 동물병원이냐고 묻기도 하는 성북동91번지 병원의 풍경이다. 동네 사람들이 편하게 드나들고, 동네 꼬마들이 강아지 만져본다고 엄마와 할머니 손을 잡고 끌고 오는 곳이다. 굳이 다른 병원과 다른 점들을 꼽자면 지하철역 근처의 대로변에 있지 않다는 것, 마당에 나무가 울창하고 길에서 보일만한 거대한 간판이 없는 점, 그리고 대기실이 여유롭게 꾸며져 있어서 일반 병원에 가면 느끼는 무언가 빨리 빨리 일을 진행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없다는 점 정도일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 형식의 병원이 아주 특이한 것은 아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삼십 년쯤 전에만 해도 동네마다 ‘의원’이라고 부르는 동네병원이 있었다. 의약분업이 시행되기 전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의원에 가면 약도 지어주던 시스템이었다. 그런 의원들은 지금처럼 지하철역 주변이나 번화가에 몰려있지 않았고 오히려 동네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골목 초입의, 너무 큰 대로변이 아닌 곳에 위치하고 있었

다. 그리고 원장님들은 나이가 꽤 연로하신, 아마도 의과대학을 나와서 개업을 하고 한 자리에서 나이를 들며 본인의 의원을 계속 운영하셨을 그런 분들이었다.

  의과대학을 다니던 때 의약분업사태가 있었고, 지금 의료시스템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로는 그 때를 기점으로 의료의 상업화가 가속화 되었다고 한다. 의대생이었을 때 일산에서부터 신촌을 지나 대학로까지 학교에 도착하는 먼 길을 버스를 쭉 타고 지나온 적이 있다. 어디를 다녀오던 길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꽤 장거리를 버스를 타고 왔던 걸 보면 국립암센터에 실습을 다녀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때 문득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병원들, 그러니까 대로변의 건물들에 들어서 있는 각종 병원들의 간판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려 본 적이 있다. 대부분의 의대생들이 그렇듯이 그때에는 수련을 하고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자신의 미래의 모습만을 상상하기에, 그리고 그 시간이 너무 길고도 까마득하게 여겨지기에 때문에, 문득 칸칸이 들어선 건물 안의 판박이 같은 모습들이 갑자기 새삼스럽게 다가왔던 것 같다. 저런 사무실 같은 병원 안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사람을 만나고 있을까, 그런 만남의 공간 안에서도 의미, 삶의 활기 같은 것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궁금함과 걱정들이 스쳐 지나갔던 적이 있다.

  졸업을 하고, 수련기를 지나고, 여러 가지 형태의 병원에서 근무를 하면서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만남의 종류에 따라서, 그리고 그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과 주변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상황 안에서 관계는 상이하게 변한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의과대학에 입학하던 시기의 의약분업은 의료의 상업화를 시작하는 도화선 같은 사건이었고, 수련을 받고 병원생활을 하고 개원을 한 이 시점들은 사보험, 병원의 대형화와 전문 병원화, 그리고 원격진료 시범사업 등으로 의료의 상업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시기이다.

  나는 의사로 교육과 수련을 받았고 딱히 다른 직종의 일을 경험한 적은 없기 때문에 다른 직종의 사람들이, 또는 아직 경제활동에 임하지 않은 학생들, 은퇴한 사람들이 어떠한 일상을 가지고 타인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나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시간이 흘러갈수록 인간관계의 삭막함을 문득문득 느끼는 계기들이 있다.


  지난 달 평일 오전에 시내에 업무를 보러 나간 적이 있다. 복잡한 시내를 통과해서 출퇴근을 하던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아침 이른 시간의 사람들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띌 정도로 피곤하고, 삶에 지치고, 무언가 피로를 견뎌 이기며 먹고 살기 위해 전투를 하러 가는 사람들의 표정 같았다. 그런 기운들을 느낄 때 문득 스쳐가는 사건들, 경험들이 있다. 병원이라는 곳에까지 와서 납득하기 어려운 자기 주장을 하면서 의료진을 곤란하게 하는 소수이지만 어느 병원에나 존재하는 일정한 사람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지조차 못하면서 의료 ‘서비스’라는 것을 구매하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결국 원하는 것도, 문제의 해결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마치 그 어떠한 곳에서도 인격적인 대접이라곤 받지 못한 것처럼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소통의 능력조차 잃어버린 것 같은 지친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생·로·병·사의 과정, 태어나서 자라고 나이가 들고 늙는 과정에서 환자가 의사와 만나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는 일은 돈으로 환산될 수 없고 환산되어서도 안된다. 사람이 사람을 인격을 가진 존재로 대접하는 것은 상품을 공급하여 소비시키는 과정으로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료라는 것을 상품으로 만들고, 더 많은 돈을 지불하면 그 상품을 더 빨리 편리하게 소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하는 제도는 그 자체로 전반적인 사회의 건강지수를 하락시킨다. 어쩔 수 없이 사회의 다른 서비스들은 그 행위에 대하여 적정가격을 고시하고 그 가격으로 서비스가 교환되어야 시장의 질서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의료의 공급과 전달은, 필연적으로 의사와 환자가 일대일로 만나서 매번 환자의 상황에 따라 관계가 누적되어 가야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상품화되기 불가능하다는 고유한 특징을 가진다.

  성북동에 개원을 하고, 좀 더 원래 의학의 목적에 맞는 병원을 꿈꾸고 그리면서 한 생각들은 그다지 구체화되거나 치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먹고 살기의 고달픔이라는 것이 모두에게 공평하기에 이리저리 쫓기는 삶에서, 의사로서, 의료의 공급자로서 대형병원 속에서의 의료를 경험하면서, 나름 내린 결론은 하나 있었다. 어떠한 구조나 사회 안에서라도 개인의 선택은 나 스스로의 일상을 선택하는 것뿐이라는 점이었다. 거대한 담론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구조가 바뀌기를 기다리기에는 당장의 내 일상을 손보는 것이, 그 일상을 의미있고 군더더기 없는 만남으로 채우는 것이 나에게는 더 급하고, 현실적이고, 중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의사 한 명을 만나기 위해서 번거로운 절차가 있지 않은 가장 단순한 구조 안에서 환자를 만나고, 그 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작은 나무들의 초록을 보며 삭막함을 덜어낼 수 있는 곳, 직원들에게 점심값 몇 천원을 지급해서 밥을 사먹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 먹는 일상, 봄·가을 강아지를 보러 새벽에 엄마 손을 끌고 내려오는 한 두 살짜리 꼬마들과 가까이 있는 것… 그런 것들 안에서 불편함과 질병상태를 최대한 단순하고 명료한 절차로 해결하는 과정을 살아가고 싶었다.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들은 날마다 변화해가지만 일상의 날들이 쌓여갈수록, 동네 꼬마들의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사람들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나 자신이 되어갔으면 좋겠다.



최명은은 성북동 덕수교회 맞은편 다리 건너 단독 주택에 자리를 잡은 91번지 의원의 의사다. 병원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단지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함께 상처를 치유하는 의사를 꿈꾸고 있는 친근한 이웃 같은 의사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3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4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4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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