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 우리 가게를 소개합니다| 글 최성수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 사이
성북동은 날마다 변한다. 한때는 골짜기에 숨어있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이제는 역사문화지구가 되고, 주말이면 줄을 지어 외부인들이 문화재와 북악산 등산을 위해 찾아온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고 카페가 생겨나고, 음식점과 주점이 자리 잡기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주말이면 성북동은 떠들썩하기까지 하다.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막걸리 잔을 들기도 하고, 길상사와 성북동 성당을 오가는 신자들이 골목을 메우는 탓에 이제 성북동은 예전의 고즈넉한 분위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 또한 세상의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너무 빠른 변화에 성북동 토박이들은 마음 붙이기가 영 녹록치 않은 듯하다.
이제 성북동에 남은 오래된 흔적이라곤 옛날 중국집, 한일 문방구 등이 전부다. 명랑 이발관은 옛 자리를 버리면서 가게 이름도 바꾸어 버렸고, 성북동 사람들이 묵은 때를 벗기던 성암탕은 한정식 집으로 바뀌더니 그마저도 그만 문을 닫아버렸다.
모던한 인테리어를 한 번듯한 가게가 들어서는 사이, 성북동은 어쩌면 성북동다운 맛을 지워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성북동이 완전히 상업적인 지역으로 바뀌어버리고 만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성북동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있고, 오래 된 한옥들이 있으며, 식민지 시대 이후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옥이었던 양옥집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성북동을 가장 성북동답게 만드는, 언덕으로 이어진 골목들이 존재하는 한, 성북동은 어떤 상업적 자본의 물결에서도 제 모습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삶들이 완전히 지워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낡은 사진관
어느 때 부터인가, 성북동에 눈이 그윽하게 깊고 얼굴이 적당히 검게 탄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빨랫줄에 걸린 빨래 같은 낯선 글자들도 가게 몇 군데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던 어느 날, 또 아주 작은 사진관 하나가 문을 열었다. 옛 성암탕과 홍콩 중화요리 사이에서 길상사 가는 길 초입에 자리 잡은 그 사진관에도 어김없이 낯선 문자가 종이에 적혀 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구릿빛 피부에 눈이 그윽한 사람들이 사진관 앞에 줄을 서서 사진 찍을 순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사진관 간판도 없이 그저 ‘PHOTO’라는 배너 광고만 달랑 내다놓은 그 사진관의 주인은 유미영씨다.
취재차 가게에 들어섰을 때, 나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 발을 멈췄다. 그렇게 많은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으러 들락날락 하는 곳이니, 당연히 주인도 외국인일 것이라는 짐작이 어긋나서였다.
네팔 사람들에게 여권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관인 가게는 서너 평 남짓 될까 말까 한 작은 공간이 전부였다. 특별한 인테리어도 없이 귀퉁이에 사진기와 조명만 놓여있는 단순한 구조의 가게에는 그러나 특별한 것이 있었다.
가게 벽에는 네팔 풍경과 사람들을 담은 그림이 액자에 담겨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이 그림은 네팔 포카라에서 본 마차 푸츠레 모습이고요, 이 그림은 네팔 어린이가 그린 명절 모습이에요. 우리로 치면 추석 같은 명절을 맞은 가족 모습을 그린 것이지요.”
그림 설명을 해주는 유미영씨의 얼굴에 얼핏 자랑과 그리움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취재 요청을 하고, 며칠 후 정식 방문을 했을 때, 유미영씨는 곱고 품위 있는 네팔 옷을 입고 있었다. 눈부시게 붉은 옷은 마치 히말라야 설산에 핀 붉디붉은 한 송이 꽃 같았다.
“이 옷을 사리라고 해요. 네팔 전통 복장이지요. 제가 감고 있는 이 스카프만 해도 2m70cm예요. 빨간색은 네팔에서는 행운을 뜻하지요. 주로 결혼식 같은 좋은 일에 입는 옷이랍니다.”
네팔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을 더욱 빛내는 것이, 어쩌면 네팔에 대한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진관이 너무 좁지 않느냐고 묻자 유미영씨는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에요. 오히려 작은 공간이 네팔 친구들에게는 친근감을 준답니다. 마치 고향집 같은 느낌이 들게 하나 봐요.”
그녀의 말대로 사진관은 작지만 정겹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 액자들, 출입문에는 네팔을 상징하는 꽃목걸이(말라)가 걸려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수수한 것이 그대로 히말라야의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서 설산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작은 집 같다.
네팔 여행을 통해 네팔을 느끼고
유미영씨가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네팔 대사관의 대사 비서로 일자리를 옮긴 것은 아마도 운명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네팔에 대한 인연의 끈이 그녀를 네팔 대사관에 가게 했고, 네팔로 떠나게 했고, 이렇게 네팔 사진관을 열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그는 가끔 한단다.
몇 년, 네팔 대사관의 대사 비서 일을 하고 난 뒤 그녀는 2013년 4월 네팔로 2주간 여행을 떠난다. 대사관 근무 시절 네팔 사람들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여전히 네팔어는 서툴고 네팔이라는 나라는 낯선 곳이었다. 그러나 그 여행에서 그녀는 네팔의 매력에 빠지고 만다.
히말라야라는 세계 최고의 산에 깃들어 사는 나라, 순수하고 맑은 영혼들이 가난하지만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귀국 후 잠시 머물던 그녀는 다시 네팔을 방문한다. 한 달 간의 일정이었고, 네팔 국방부의 초청 형식이었다. 계룡시에서 열린 군 문화축제에 네팔 군인들의 도우미 역할을 했던 데 대한 감사의 초청 형식이었지만, 주로 머문 곳은 네팔 사람들의 가정이었다. 네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함께 생활하며 보낸 그 한 달이 그녀의 삶에서 가장 네팔과 가까워진 시기였다. 함께 사진을 찍고, 서툰 대화를 나누면서 네팔 말에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나누는 정을 온전히 느끼고 온 한 달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그 한 달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시간이 촉박해 떠나야 하는데도, 이별이 아쉬워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산촌의 사람들, 자신이 왔다고 잔치를 열어주고, 함께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정겨운 사람들의 기억이 그녀를 네팔에 빠지게 했다.
네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이 네팔과 맺은 인연의 끈을 어떻게 이어갈까 고민하던 끝에 네팔 사진관을 열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에 와 있는 네팔 사람은 약 2만 여명이다. 중국, 캄보디아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숫자다.
네팔은 그동안 서기가 아닌 네팔력에 따라 해를 세었고, 여권도 수기여권이었다고 한다. 그 여권을 서기로 기록하고 전산화하는 일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모든 네팔 사람들이 여권을 바꾸어야 하고, 그래서 네팔 대사관은 날마다 여권을 갱신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때로는 서툰 한국어로 사진관을 찾고, 대사관을 묻는 사람들이 그래서 성북동에 많아진 것이다. 그들이 좀 더 쉽게 사진을 찍고,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자는 것이 그녀의 의도였고, 지금 상당수의 네팔 사람들은 그녀의 사진관에서 여권 사진을 찍고, 고향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낯 선 한국에서의 삶의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한다.
유미영씨는 그들에게 사진을 찍어주며, 한국 생활의 도우미가 되어 주기도 한단다. 여권을 만든 후 2주 안에 출입국관리소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위치를 묻는 사람들에게 출입국관리소를 안내하주기도 하고, 돌아가는 교통편을 알려주기도 한다. 낯선 땅에서 제 나라 말로 안내해주는 그녀의 도움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일까 생각해보면, 그녀의 역할이 결코 소소한 것이 아니다.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는 완도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이리저리 수소문해 찾아주었더니, 얼마 후 완도에서 김을 한 상자 보냈더라구요.”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밝다.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네팔 친구들이 있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 되는 가를 깨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박하지만 소중한 꿈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이 사진관이 네팔 친구들에게 고향과 같은 곳이었으면 해요.”
사진관의 역할을 묻는 내게 그녀는 그런 소망을 털어놓는다. 실제로 사진관을 방문한 네팔 친구들은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객지 생활을 외로움과 어려움을 달래곤 한단다.
사진관 겸 네팔 문화를 알리는 곳으로 이 공간을 키워가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네팔에 대한 물건들도 많이 모아 전시해서 네팔 친구들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도 네팔에 대해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요.”
그녀는 자신이 네팔과 한국을 연결하는 작은 다리가 되기를 꿈꾼다.
“성북동 사람들도 지나가다 들러 네팔 구경을 하고 네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또 요즘 성북동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그분들과도 네팔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요. 더 나가서 네팔 어린이들을 초청해서 성북동뿐만 아니라 한국을 보여주고 싶기도 해요. 네팔이 비록 가난한 나라지만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행복 지수가 높은 나라잖아요. 우리나라는 물질적인 번영을 이루었는지 몰라도, 거기에 비례해서 행복해 진 것 같지는 않아요. 서로 나누는 가운데 두 나라가 행복해지는 꿈을 실현하는 데 제가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어요.”
모든 꿈은 작은 데서 시작된다. 비록 좁고 작은 공간이지만, 이곳에서 그녀의 꿈은 점점 커질 것이라는 믿음이 든다. 그리고 너무 빠르고 바쁘게 변화하는 성북동에도 그녀의 가게처럼 작고 소박한 공간들이 숨 쉴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성북동이 상업적인 마을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중한 마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녀의 사진관이 가장 성북동다운 공간이고, 그 꿈이 마을이 지향해야 할 소중한 가치를 향해 열려있기 때문이다.
간판조차 없는 작고 소박한 가게, 거기에서 네팔과 성북동의 꿈이 함께 영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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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수는 시인이고 본지 편집위원이다. <장다리꽃 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사랑은>, <천 년 전 같은 하루>, <꽃, 꽃잎> 등의 시집과 청소년 소설 <무지개 너머 1,230마일>을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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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3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4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4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