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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Sep 04. 2016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

[7호] 우리 동네 문학 살롱 | 편집부

  … (전략) 그럴싸한 현판 하나 걸 수 없는 그런 몰풍정(風情)한 집이었어도 아버지는 그 집에 ‘방우산장(放牛山莊)’이란 멋있는 이름을 선사하고 스스로를 위로하셨다. 아버지의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를 소개한다.




  ‘방우산장’은 내가 거처하고 있는 이른바 ‘나의 집’에다 스스로 붙인 집 이름이다.


  집이란 물건은 고루거각(高樓巨閣)이든 용슬소옥(容膝小屋)이든지 본디 일정한 자리에 있는 것이요, 떠메고 돌아다닐 수 없는 것이매 집 이름도 특칭의 고유명사가 아닐 수 없으나, 나의 방우산장은 원래 특정한 장소, 일정한 건물 하나에만 명명한 것이 아니고 보니 육척 수신장구(瘦身長驅)를 담아서 내가 그 안에 잠자고 일하며 먹고 생각하는 터전은 다 방우산장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산장이라 했으니 산 속에 있어야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로되 십 리 둘레에 일 점 산 없는 곳이 없고 보니 나의 방우산장은 심산(深山)에 있거나 시항(市巷)에 있거나를 가리지 않고 일여(一如)한 산장이다. 이는 내가 본디 산에서 나고 또 장차 산으로 돌아갈 자이기 때문이다.


  기르는 한 마리 소야 있든지 없든지 방우(放牛)라 부르는 것은 내 소, 남의 소를 가릴 것 없이 설핏한 저녁 햇살 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지금 어디에 가 있든지 내가 아랑곳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집은 떠나지 못하지만 사람은 떠돌게 마련이다. 방우산장의 이름에 값할 집은 열 손을 넘어 꼽게 된다. 어떤 때는 따뜻한 친구의 집이 내 산장이 되었고, 어떤 때는 차운 여관의 일실(一室)이 내 산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나 그뿐인가. 피란 종군(從軍)의 즈음에는 야숙(野宿)의 담요 한 장이 내 산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고 보면 취와(醉臥)의 경우에는 저 억조 성좌를 장식한 무변한 창공이 그대로 나의 산장이 될 법도 하지 않은가. 실상은 나를 바로 나이게 하는 내 영혼이 깃들인 고(庫)집, 이 나의 육신이 구극(究極)에는 나의 산장이기도 하다.


  방우산장(放牛山莊)에는 아직 한 장의 현판(懸板)도 없다. 불행하게도 한 장의 현판을 걸었던들 방우산장은 이미 나의 집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요, 나의 형터리도 없는 집 이름은 몇 번이든지 바꿔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두려운 일은 곧 뒷날 내 죽은 뒤 어느 사람이 있어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노라는 제 정성으로 방우산장이란 묘석을 내 무덤에다 세워줄까 저어함이다.


  그때는 이미 나의 방우산장은 이 지상에서는 소멸되고 저 지하의 한 이름 모를 나무뿌리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땅 위에 남겨 놓고 간 ‘영혼의 새’가 깃들이는 곳 — 그 무성한 숲의 어느 한 가지가 방우산장이 될 것이다.


  나의 소는 어느 때든지 마침내 내 집으로 돌아오리라. 그러므로, 떠나고는 다시 오지 않는 새를 나는 사랑한다. 소가 죽어서 새가 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소는 저 산새소리를 따라서 어디론가 뛰어간 것에 틀림없다. 낙엽이 날리는 산장을 쓸며 나는 소를 기다리지 않고 시를 쓰며 산다. (《신천지》, 1953)




동네 어르신들의 쉼터 역할을 하던 곳을 허물고 그 자리에 조지훈 시인의 <방우산장기>에 등장하는 '방우산장'을 모티브로 세워졌다. 홍대부고중고교 버스 정류장 부근



  아버지가 당신의 거처에다 ‘방우산장’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신사(辛巳)년 곧 1941년 봄부터 오대산에 들어가 계셨을 때 “월정사(月精寺) 동향의 일실(一室)에 명명함으로써 비롯된 일”이라고 한다.


  “학교를 갓나온 스물한 살짜리 애송이 청년이 세월에게서 받은 상처를 어루만지며 쫓겨간 곳이 오대산이요, 쓰일 곳 없는 세상이자 쓰이고 싶지도 않은 세월이더랬는데, 이 장발(長髮) 백의(白衣)의 가승(假僧)을 반갑게 맞아준 곳이 월정사 강원(講院)의 외전강사(外典講師)자리였다”고 하셨다.


  하루 한두 시간을, 더우면 법당 앞 용금루(湧金縷) 다락에서, 추우면 강원 큰 온돌방에서 학인(學人)들을 가르치고 나면 아버지에게는 하실 일이 없었다. 빈방에 홀로 눈감고 벽에 기대이거나 먼지 앉은 경권(經卷)을 내어놓고 뒤적이지 않으면, 뜻 모를 생각에 잠겨 숲속이나 못가를 거니는 것이 일과셨다.


  “어린 중들과 함께 산나물을 뜯는 봄 한철, 머루와 솔잎과 당귀를 캐어 술 빚어 마시는 가을 한철, 소란한 세상이 괴롭고 아플수록 산거(山居)의 미(味)는 깊어갔다”고 하셨다. 그러다 《문장》지 폐간호를 받으셨다.


  아버지는 이 방우산장에서 나라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셨다. “실의(失意)의 청년은 이제 실신(失神)의 인(人)이 되었다. 방우산장 주인 방우자(放牛子)되는 방우선(放牛禪)의 개조(開祖)가 되고 만 것이다”고 하셨다. “자꾸만 쓰러지려는 내 자신을 가누려는 혈투의 몸부림이었다”고 하셨다. (후략)




[출처] <승무의 긴 여운 지조의 큰 울림 : 아버지 조지훈–삶과 문학과 정신>, 조광렬




성북동천은 성북동 주민과 지역에서 활동하는 민간 법인·단체, 비영리조직, 전문가 및 예술인들이 모여 설립한 주민 공동체로, 성북동에서 마을잡지 발간, 마을탐방 진행, 교육·문화 프로그램 기획, 지역 내 공론의 장 마련 등 마을공동체 형성과 주민간 연대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는 성북동천 내 마을잡지 편집위원회가 발행하는 마을잡지이며, 7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의 '2016 마을미디어 활성화 주민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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