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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Sep 03. 2016

조지훈의 「절정(絶頂)」

[7호] 우리 동네 문학 살롱 | 박미산

  조지훈(1920~1968)은 시인이며 학자인 동시에 논객이며 지사다. 그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보통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38년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입학하여 1941년 21세에 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혜화전문학교에 재학 중인 1939년 4월「문장(文章)」지에 시 「고풍의상(古風衣裳)」이 정지용에 의해 초회 추천되고, 이어서 같은 해 11월 「승무(僧舞)」,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향문(香紋)」을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었다. 조지훈은 이후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목월(朴木月), 박두진(朴斗鎭)과 더불어 공동으로 「청록집」(1946)을 간행하여 이들과 함께 “청록파”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청록집(靑鹿集)」(1946), 「풀잎 斷章」(1952), 「조지

훈시선(趙芝薰詩選)」(1958)의 작품들과 「역사 앞에서」(1959), 「여운(餘韻)」(1964)과 수상록 「창에 기대어」(1956), 시론집 「시의 원리」(1953), 수필집 「시와 인생」(1959), 번역서 「채근담(菜根譚)」(1959), 수상집 「지조론」(1962),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 등을 기획했다. 이처럼 조지훈은 시와 에세이, 시론집, 번역서, 논저 등 전방위 문사였다.


  그의 문학적 체험은 9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대 풍미하던 프로 문학의 영향을 받아 처음으로 동요를 지어 본 것이 문학의 첫 경험이었다. 그는 당시 정규과정인 일제교육을 받지 않고 서당에서 한학, 조선어, 수신, 역사 등을 배우며 선비정신과 학자적 탐구정신을 습득해나갔다. 그러나 일찍이 문학적 재질의 싹을 보였던 까닭에 지훈에게 한학을 가르치던 조부 조인석은 ‘너는 문인으로 나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연보에 의하면 시를 본격적으로 습작하기 시작한 것은 16세부터이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어려서부터 시가(詩歌)를 들려주던 아버지와 큰형 세림(본명 조동진)이었다. 자전적인 글 「나의 역정」을 통해 그는 자신의 세 살 위인 맏형 세림이 ‘문학의 싹을 길러준 사람’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지훈과 함께 주곡동 마을의 문집 「꽃탑」을 펴내기도 하고 소년회를 조직하기도 한 형은 지훈의 문학적 자질을 일깨워 주었으나 21세에 요절했다.


  지훈은 17세 때 서울로 올라와 동향 시인인 오일도가 주재하던 ‘시원사(詩苑社)’에 머물면서 시 습작을 계속했고 20세가 되는 1939년에 혜화 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지훈은 1939년 「문장」에 「고풍의상」이, 그 다음해에 「봉황수」, 「향문」 등이 2차 추천됨으로써 시단에 등장했다. 지훈의 시를 추천해 준 사람은 정지용인데, 정지용은 조지훈이 서구 취향의 시인보다는 ‘위축된 정신이나마 조선의 자연풍토와 조선인적 서정과 최후로 언어 문자를 고수하는’ 전통지향의 시인이 될 것을 권고한 시인이다. 지훈이 시적 방향을 정하는데 그의 추천과 권고가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는 것은 여러 문헌에서 지적된 바 있다.


  지훈의 데뷔작 「고풍의상」은 지훈이 ‘서구 시를 모방하던 그때까지의 습작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시를 정립하려고 한 첫 작품’(「나의 역정」)이라고 밝힌 만큼 그의 시력에서 의미가 큰 작품이다.


  지훈의 삶과 시에 가장 큰 분기점을 마련해 준 때는 혜화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3월 오대산 월정사로 내려가서 외전강사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병을 얻어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산사생활을 통해 조지훈은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시 정신을 깨우치게 되며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작품 세계를 굳히게 된다. 그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것은 동양적 자연의 세계였다.


  「산방(山房)」, 「산1」, 「산2」, 「유곡(幽谷)」 등의 시편은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이 시들을 보면 당시 지훈의 눈에 비친 동양적 자연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조부 밑에서 정통 한문 교육을 받고 성장한 만큼 지

훈의 한시적 교양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자연표상을 통해 인생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조지훈 시가 서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전통 시를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훈이 자연의 세계에 머무르기엔 나라 안팎의 정세가 너무나 가파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는 ‘암흑기’라고 불리는 일제의 탄압이 가장 극악했던 시절이었다. 조지훈은 황국신민화 정책의 비보 속에서 「문장」지 폐간호를 받는가 하면 월정사 서실마저 수색 당한다. 그는 통음의 시간을 보내다 졸도하는 일까지 있었다. 오대산에서 내려와 요양 차 서울에 상경한 이후 3년간은 방랑과 절망의 시기였다. 경주에 있는 목월을 만나러 가거나, 친구들을 방문하면서 암울한 마음을 달래던 그는 1943년 가을에 주곡동으로 낙향해 버리고 만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문학 단체에 가담한 상황에서 그역시 친일단체의 입회를 강요받았으나, 그는 붓을 꺾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나중에 「지조론」이라는 글을 쓸 만큼, 변절에 대해서 단호한 입장을 가졌던 그가 불의에 순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지훈 집터. 지금은 집은 온데간데 없고 표지석만이 남아 이곳이 그 분의 집터임을 일러주고 있다. (성북로16길)



  해방과 함께 그는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한편, 교육자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였다. 혜화 전문학교, 경기 여고, 서울여의대, 동국대학을 거쳐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시인으로서 창작도 활발히 할 뿐 아니라 유치환, 김동리, 박두진, 서정주, 조연현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민족문단을 건설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해방 후 어느 눈 오는 날 밤에 청록파 세 사람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은 성북동 지훈의 집(성북구 성북동 60번지 44호)에서 시 원고를 뽑았고 거기에 목월이 「청록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박두진이 근무하던 을유문화사에서 이를 시집으로 발간하였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문장」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었고, 후일 청록집이 세 시인 모두의 시적 고향이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못 뜻 깊은 일이었다.


  문인으로서의 지훈에게 50년대는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6·25전쟁으로 조부와 부친(납북된 후 소식이 끊김)과 어머니, 그리고 아우까지 잃은 참혹한 시기이기도 했다. 피난지에서 종군 작가단을 결성하여 종군한 그는 강한 휴머니즘의 태도와 반공의식, 자유와 정의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갖게 된다. 전쟁시의 명편 중의 하나로 꼽히는 「다부원(多富院)에서」를 보면 잔혹한 전쟁을 통해 허망한 인간 상실과 파멸의 현장을 본 그의 비관적인 심경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조지훈의 시 세계는 고전적인 정서와 시선일체의 초기 시 세계에서 해방 전후사와 전쟁, 그리고 4·19를 겪으며 점차 역사와 현실의 세계로 확대해간다. 고난과 충격의 시기 속에서도 시 창작을 중단하지 않은 그는 1952년 첫 개인시집인 『풀잎단장』을 발간하고, 이후 『조지훈시선』, 『역사 앞에서』 등을 펴내며 개인적으로는 가장 화려한 문단시절을 보내게 된다. 시뿐 아니라 비평 활동도 활발하게 해나갔다. 특히 그가 쓴 『시의 원리』(53)는 현대시문학사상 최초의 정통 이론서로, 그의 문학 활동 중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히는 저서이다.


  말년의 그는 마지막 시집인 『여운』의 발간 외에는 학문적 탐구와 저술 활동에 더 힘을 기울였다. 60년대에 그가 펼친 저술활동은 실로 화려한 것이었다. 주요 저서의 목록만 봐도 『한국현대시사의 쟁점』(60), 『한국문학의 전통』(63), 『한국현대시문학사』(64), 『한국문화사서설』(64), 『한국문화사대계』 중 제1권 『민족 국가사』」(64), 『신라가요연구논고』(64), 『한국민속학소사』(64), 『한국민족운동사』(63) 등 그 영역의 광활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민속학에 대한 관심도 깊어 196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무속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지훈 시의 본령은 자연의 발견에 있다. 동양의 예술은 서양의 예술과 비교할 때 인생과 자연과 예술을 하나로 통합하여 보는 반면에 서구적 관점은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고 정복의 대상으로 본다. 자연을 대상화하고 인간과 대립하는 존재로 여기면서 자연을 분리하여 보는 이원론적 관점이 서구적 관점이라면, 동양적인 관점은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일원론적 관점이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자연이란 단순히 물질적 현상계를 의미하지 않고, 인격화된 존재나 신적 존재, 또는 도나 진리의 구현체로 인식되었다. 단지 자연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자연이 환기하는 생명의 리듬을 몸으로 체감하면서 자기 내부에 있는 생명의 리듬을 자연의 리듬에 일치시키는 것, 자연을 포함한 모든 삼라만상을 향해 깨어있고 열려있는 마음, 그리하여 인간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마음이 유가·도가·불가를 막론하고 동아시아 사고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마음은 도를 찾는 마음이며 집착을 버리고 속세를 초탈한 마음 즉,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 자연관에 기초하여 검토해볼 때,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자연과 친화인 동시에 자연과의 교감이며 나아가서 자연과의 합일, 자연에의 회귀를 이루는 것이 최고의 심미적 상태에 다다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① 나는 어느새 천길 낭떠러지에 서있었다 이 벼랑 끝에 구름속에 또 그리고 하늘가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는 누가 피워 두었나 흐르는 물결이 바위에 부디칠 때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이내 공중에 사라져 버리고 말 그런 꽃잎이 아니었다


② 몇만 년을 울고 새운 별빛이기에 여기 한 송이 꽃으로 피단 말가 죄 지은 사람의 가슴에 솟아오르는 샘물이 눈가에 어리었다간 그만 불붙는 심장으로 염통속으로 스며들어 작은 그늘을 이루듯이 이 작은 꽃잎에 이렇게도 크낙한 그늘이 있을 줄은 몰랐다


③ 한점 그늘에 온 우주(宇宙)가 덮인다 잠자는 우주가 나의 한 방울 핏속에 안긴다 바람도 없는 곳에 꽃잎은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을 부르는 것은 날 오라 손짓하는 것 아 여기 먼 곳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꽃나무 가지에 심장(心腸)이 찔린다. 무슨 야수(野獸)의 체취(體臭)와도 같이 전율(戰慄) 할 향기가 옮겨온다


④ 나는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한 송이 꽃에 영원(永遠)을 찾는다. 나는 또 철모르는 어린애도 아니었다 영원한 환상(幻想)을 위하여 절정(絶頂)의 꽃잎에 입맞추고 길이 잠들어버릴 자유(自由)를 포기(抛棄)한다.


⑤ 다시 산길을 내려온다. 조약돌은 모두 태양(太陽)을 호흡(呼吸)하기 위하여 비수(匕首)처럼 빛나는데 내가 산길을 오를 때 쉬어가던 주막에는 옛 주인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 살이 몇 개 더 늘었을 뿐이었다. 울타리에 복사꽃만 구름같이 피어 있었다 청댓잎 잎새마다 새로운 피가 돌아 산새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⑥ 문득 한 마리 흰나비! 나비! 나비! 나를 잡지 말아다오. 나의 인생(人生)은 나비 날개의 가루처럼 가루와 함께 절명(絶命) 하기에 — 아 눈물에 젖은 한 마리 흰나비는 무엇이냐 절정의 꽃잎을 가슴에 물들이고 사(邪)된 마음이 없이 죄 지은 참회(慘悔)에 내가 고요히 웃고 있었다.


- 「절정(絶頂)」 전문 -




  「절정(絶頂)」은 시집 『풀잎단장』(1952년)에 실렸던 시이다. 이 시는 산꼭대기 낭떠러지에서부터 산길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의 일을 그리고 있다. 화자는 실경을 찾아 자신의 내면을 그린다. 곧 경험의 영역인 산을 내려오면서 화자는 자신의 내면 즉, 정을 표출하고 있다.


  「절정」에서 화자는 꽃, 산새, 나비, 구름, 물방울 등 자연으로 자신을 형상화하여 외로움과 쓸쓸함, 슬픔을 그려내었다. 이것은 구체적인 어구에 의지하고 붙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어구가 있어야만 그 어구가 상징하고 암시하여 마음의 경계를 낳을 수 있다.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상과 정서가 모두 여기에 체현되어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자연과 완전하게 동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현실의 자아와 객관대상 사이의 거리감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자아가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순수무욕의 상태가 될 수 없었음을 말한다. 결국 ‘천길 낭떠러지’나 ‘주막집 주인’에 대한 경외심(숭고)만을 느끼고 합일할 수 없는 화자는 ‘잠들어버릴 자유를 포기’하고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시는 “참혹한 운명이라든가 파멸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이와 같은 몰락을 내용으로 하기 때문에 고통받는 인간미”1)를 보여준다.


  1968년 5월 초순 경 가족의 생일날, 지훈은 꽤 긴 이 시를 가족들 앞에서 낭송하였다고 한다.2) 지훈은 이 시를 가족들 앞에서 낭송한지 1주일 후인 1968년 5월 17일 새벽 5시 40분 입원 중이던 메디컬센터에서 기관지 확장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만 48세였고, 아직 세상을 뜨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 그는 30대에 절정 같은 ‘유언’ 시를 지었고 한 마리 흰 나비의 운명처럼 짧은 계절의 생애를 마치고, “절정의 꽃잎을 가슴에 물들이고 사(邪)된 마음이 없이” ‘절명’의 길을 갔다.




1) 조지훈, 앞의 책, 86쪽

2) http://goo.gl/FdVEJa



조지훈 시인 약력 | 편집부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다. 경상북도 영양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치고서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39년《문장》지에 <고풍의상>과 <승무>를 추천받아 문단에 등장하였다. 광복 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와 동국대학교 강사,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듬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장에 취임하면서 민족문화 개발에 주력하였다.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명시를 많이 남긴 조지훈의 시는 주로 자연, 무속, 선을 소재로 한 민족다운 색채가 짙고, 불교 세계를 향한 관심은 종교의식을 일깨워 작품에 반영되었다. 박목월과 박두진을 비롯한 다른 청록파 시인이 후에 시 세계를 근본으로 변혁했는데 조지훈은 초기 자연과 친화한 시 세계를 꽤 많이 유지하였다. 1956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로도 활발히 문학 활동을 하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68년 5월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 고혈압과 기관지확장증의 합병증으로 5월 17일 끝내 타계했다.


시집으로 《청록집》과 《조지훈 시선》이 있고 수필집 《창에 기대어》, 논문집 《한국 민족운동사》가 있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조지훈



박미산은 2006년 『유심』,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 『태양의 혀』(서정시학, 2014)을 냈다. 성북동에 살고 있으며, 성북동을 소재로 시를 쓰는 등 지역의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성북동천은 성북동 주민과 지역에서 활동하는 민간 법인·단체, 비영리조직, 전문가 및 예술인들이 모여 설립한 주민 공동체로, 성북동에서 마을잡지 발간, 마을탐방 진행, 교육·문화 프로그램 기획, 지역 내 공론의 장 마련 등 마을공동체 형성과 주민간 연대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는 성북동천 내 마을잡지 편집위원회가 발행하는 마을잡지이며, 7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의 '2016 마을미디어 활성화 주민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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