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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Nov 20. 2017

그 시간을 걷다

[4호] 전시 이야기│글 김보라

  이제 성북동에 깃든 영원의 시간을 향한 여정이 시작된다.


  오래 전부터 이곳을 찾아 온 예술가들은 현재 우리 곁에 한국 근현대 예술사를 채우는 거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짙은 내향은 여전히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그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위한 터전은 산과 계곡으로 충만한 자연이며 삶의 근원은 초월적 관계에서 오는 교감이다. 그리 크지도 않은 마을 한 편을 걷고 있자면 지루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곳곳에서 정결(淨潔)한 예술가들의 정취가 묻어 나온다.


  시간을 거슬러 삼백여 년 전으로 올라가 보기로 한다. 이곳을 찾은 겸재(謙齋) 정선은 현재의 삼선교에서 성북동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전해 오는 이러한 이야기에 근거하여 우리는 그 그림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찾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제 그곳은 인파로 붐비는 현대의 모습으로 변모하였지만 그러한 역사를 인지하고 바라보는 성북동의 모습에는 더할 나위 없는 푸르름과 여백이 있을뿐이다.


  그로부터 백 년 남짓 시간이 더 흐르게 되면 조선 말기 화가인 오원(吾園) 장승업이 우리의 여정에 등장하게 된다. 그는 현재 집터로만 남아 있는 그 곳에 거하며 대담하고도 소탈한 작품 세계를 일구어 나가게 된다. 그러나 그곳은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존의 의지를 상실하여 안타까움을 남긴다.


  시간을 조금 더 내려와 성북동 중턱 즈음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그냥 지나치기도 쉬울 법한 만해(萬海) 한용운이 거하던 심우장(尋牛莊)이 있다.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곳의 시간은 변함없는 지조로 가득한 한용운 자체로 채워진다.


  이제 한국의 20세기를 열며 문학, 미술, 음악에 있어 정신적인 승화를 추구했던 예술가들이 가득 차 있는 시간으로 다가서본다. 미술관의 창 너머로 보일 듯한, 그리고 아직도 그곳에 존재하고 있을 법한 실존의 가치는 문득문득 마음에 그 무게를 느끼게 한다.

  민족 문화를 옹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춘해(春海) 방인근, 노시산방의 인연으로 이미 우리 미술관에서 다루었던 근원(近園) 김용준과 수화(樹話) 김환기, 그리고 여전히 수연산방의 집필하던 그 방을 향하여 숨을 죽여야 할 것 같은 상허(尙虛) 이태준이 바로 곁에서 숨을 쉬고 있다. 성북동의 변화하는 계절 향기는 수 시간 동안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시와 음악을 만들게 한다. 김광섭은 ‘성북동비둘기’를 노래했고, 윤이상과 조지훈은 글과 음을 통하여 서로의 영혼을 나누었다.


  그 외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고유한 시간적 범주를 형성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더 있다. 한국의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존에 힘써온 간송(澗松) 전형필, 미술사학자로 활동한 혜곡(兮谷) 최순우, 한국화의 새로운 기법을 시도했던 우향(雨鄕) 박래현과 운보(雲甫) 김기창, 개성적인 문체를 펼쳐 낸 구보(丘甫) 박태원과 백사(白史) 전광용, 그리고 독창적인 미술 세계를 구축해온 권진규, 변종하, 송영수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같은 공간에 흐르는 시간을 타고 아직도 현재에 머물고 있다.


  <그 시간을 걷다>展은 거론된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에 있어 모든 면을 세세히 다루지는 못한다. 단지 그 서막의 역할을 할 뿐이다. 적지 않은 시간의 차이를 두고 같은 공간을 살았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이제 막 조심스럽게 펼쳐 보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이러한 단편적 초상들이 기반이 되어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진정한 가치를 찾기 위한 또 다른 여정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흐르는 시간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지나간 시간의 파편들이 하나의 완전한 시간을 이루어낸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가 결합된 새로운 현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재는 영원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그 시간을 걷고자 하는 이유이다. 가능하다면 숨겨져 있는 모든 영원의 시간으로 향하려는 것이다.

성북구립미술관 전경


김보라는 성북구립미술관 관장이다. 성북구립미술관은 2009년 구 단위로는 전국 최초로 세워진 공립 미술관인데, 이 미술관 초대 관장으로 취임하였다. 성북동이 가지고 있는 근현대 미술사의 의미를 찾고 널리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으며, 근현대 미술의 메카로서 성북동을 재조명하고 정체성을 이어가기 위한 작가 발굴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등, 성북동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문화 성북동을 만들어가는 문화예술가이다.이 글은 2011년 10월부터 12월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그 시간을 걷다’의 해설로, 몇 해가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성북동의 문화에 대한 생각을 깊이 있게 해보게 하는 글이라 재수록한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4호는 2014년 '한옥마을 및 한양도성 인근 마을 가꾸기 공동체 희망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4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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