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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Nov 24. 2017

독립운동가 만해의 별장,
심우장을 찾아서

[4호] 성북동의 문화재 답사기│글 박진하

  만해 한용운 선생을 이야기할 때 무엇을 먼저 언급해야 하나 하는 망설임을 가지게 된다. 무엇보다 먼저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 했던 승려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래서 당신이 머물던 주거지를 지칭하여 심우장(尋牛莊)이라 했던 것이다. 산사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탱화가 십우도(十牛圖)다. 젊은 승려가 소를 찾으러 다니다 마침내 소를 발견하고 그를 잡아 데려오는 과정을 그려놓은 그림이다. 이 때의 소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소를 잡았다는 사실은 득도를 했다는 의미다. 이런 과정의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 소를 찾는 심우(찾을 尋, 소 牛) 단계이다. 여기에서 선생의 별장 이름이 차용되었다.

  우리 선비들이 가장 좋아하는 호칭이 학생이었다. 어느 벼슬이나 선생이라는 말보다 학생이라는 말을 선호했다. 영원히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까닭이다. 불교에서도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에 가졌던 초발심을 유지하라고 한다. 그래야 목표하는 득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도 초발심을 의미하는 심우라는 말을 사랑했나 보다.

  심우장은 산사가 아니다. 선생이 기거하던 집일 뿐이다. 삼선교 로터리에서 성북동쪽으로 난 큰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가 넓은 공간에 선생이 앉아 계신다. 만해산책 공원을 지키며 홀로 앉아 계신 것이다. 선생의 살아 생전의 모습 그대로 청동으로 조성해 둔 것이다.

  그 조각을 뒤로 하고 산 중턱에 올라서면 심우장이 나타난다.


  항상 이곳에 오면 만해 선생이 계시던 그 당시의 주변 풍경은 어떠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떠나지 않는다. 선생이 성북동을 거주지로 삼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당시의 성북동이 가진 매력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런 의문점은 성북구립 미술관에서 개최된 “성북, 예술의 길로 전”에서 속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화가 김환기의 아내가 쓴 “월하의 마음”에서 당시(1944년)의 성북동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성북산협(城北山峽)에 자리 잡았을 때는, 그곳에 서너 채의 굵은 별장과 띄엄띄엄 몇 채의 초가집이 있었을 뿐으로 우리는 서울에 살고 있되 완전히 산에 사는 것 같았다. 맑은 공기와 수목의 향기와 흐르는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의 노랫소리는 우리의 젊음에 배가되는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혜화동 입구에서 보성중학 고개를 넘어 산협에 이르는 2,30분의 거리를, 또는 삼선교에서 골짜기까지 올라오는 3,40분의 거리를 항용 날마다 도보로 내왕하고도 피로한 줄을 몰랐다.’

  만해 선생이 심우장을 조성했던 1933년에도 이 글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직장이 있었던 중구로 출퇴근 할 때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 별장의 대문은 너무도 평범하게도 꽃무늬 쇠창살문이다. 한옥이나 문화재와 같은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고풍스러움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폐쇄된 큰 문을 피해 쪽문으로 들어서면 따님을 위해 나중에 건립했다는 건물이 전면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 마당 오른쪽으로 선생이 직접 식재했다는 향나무가 보인다. 꽃은 없지만 깊은 향기를 머금고 있는 이 나무는 마치 대웅전 큰 불상 앞에 피워 놓은 향불처럼 집안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듯하다. 그리고 그 왼쪽에 떡하고 버티고 있는 다소 커다란 소나무는 선생의 높은 지조를 닮아 있다.

  건물은 북향집이란다. 조선 총독부가 싫어 그렇게 했다지만 오히려 산 숲을 뒤로 하고 탁 트인 계곡을 향하도록 건물의 방향을 결정했다는 설명이 자연스럽다.

  드디어 대문을 지나 징검다리를 밟아 몇 걸음을 걸으면 편편한 박석이 깔려있다. 그 위로 두 단에 걸쳐 화강석 기단을 만들고 댓돌을 만들어 두었다. 전체적으로 이 건물은 5칸으로 되어 있다. 좌측 한 칸은 선생이 기거하던 서실이고, 중앙 두 칸은 부인이 주로 이용하던 안채인 셈이다. 그 우측으로 부엌이 있고 그 뒤쪽으로 찬방을 만들어 붙였다. 그러고 보면 이 다섯 칸짜리 집에서 선생이 주로 이용하던 서실 하나만 빼고 전부 부인을 위해 내어준 셈이다. 즉 심우장은 부인을 위해 만들어진 집이다. 중앙에 위치한 안채는 대청마루를 이용하여 출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특이하게도 대청마루 문은 넓은 아(亞)자 무늬의 유리로 마감했으며 방문은 띠살무늬 창호지 문이다. 방마다 방문을 앞뒤로 2개씩 만들어 활짝 열어두면 자연스러운 자연풍을 만끽할 수 있게 했다.

  이런 방식은 선생의 거실에 이르면 한층 더해진다. 거실에는 방문이 세 개나 된다. 전후면 뿐만 아니라 측면에도 있다. 선생의 활달함이 여기에 이른 것인가? 이 건물 왼편으로 돌아 후원으로 가다 보며 담장 옆으로 작은 막돌을 쌓아 화단을 만들고 크고 작은 나무를 식재해 두었다. 그 화단은 산세의 경사를 따라 점차 높아지다가 담장에 이르러서는 다소 넓은 공간으로 형성되어 있다.

  같이 동행한 아내가 화단 전면에 가득 식재한 쥐똥나무 숲 틈으로 보이는 배추를 가리키며 여기에 채소가 심어놓았다고 감탄한다. 그 좁은 공간이나마 채마밭으로 사용되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선생의 거실 앞 쪽에서 시작한 툇마루가 뒤로 돌아 부엌 옆 찬방까지 이어지고 있다. 후원에서 볼 때 뒤집힌 ㄱ자 모양을 하고 있다. 즉 찬방과 부엌이 두 칸으로 세로로 길다. 뒷마당에 놓인 굴뚝은 기와를 이용하여 만든 장식이 이채롭다.

  유일하게 한쪽 면을 창문이나 출입구가 없이 벽면 처리를 한 찬방도 안채에서 드나드는 창호지문과 그 반대 면에 설치한 유리 창문이 있어 개방성을 더하고 있다. 이것은 부엌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찬방과는 경계 구분이 없이 탁 트여 하나의 공간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으며 집 앞쪽 대청마루에서도 드나들 수 있게 했다. 더 나아가 오른쪽 벽면에도 부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용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다. 뒤쪽을 돌아 앞으로 나와 보니 답사 객이 가득하다. 대청마루에 걸터 앉아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다. 선생의 태어남과 일생을 장황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 심우장이 선생이 마지막 십여 년을 거처하신 공간이라는데 의미를 둔 것이리라. 오히려 이 건물의 아름다움보다는 선생의 위대한 발자취가 그리워 찾아온 내방객의 마음을 이 해설사는 알고 있음이리라.



  답사를 마친 후 조용히 선생의 시 한편을 되새겨 본다.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搭)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박진하는 본지 편집위원이고, 현재 성북동에서 식당 '디미방'을 운영하고 있다. 요가와 명상에 관한 책을 세 권 내기도 했으며,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다.


이 답사기는 만해가 거주하던 심우장을 둘러보고 쓴 글이다. 선생은 그가 가장 존경하던 석가와는 다른 삶을 살았다. 부처는 조국을 멸망시키려는 정복 왕의 말고삐를 부여잡고 두 번이나 만류하다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선생은 죽을 때까지 변절하지 않고 투쟁했다. 석가는 출가 후 여인과의 사랑을 완전히 포기하고 멀리했으나 선생은 결혼도 하고 자녀도 가졌다. 그의 뿌리는 승려였으나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독립 운동가이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부인을 아끼고 가족을 돌본 가장으로서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심우장이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4호는 2014년 '한옥마을 및 한양도성 인근 마을 가꾸기 공동체 희망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4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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