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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Dec 01. 2017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을,
마음 편한 동네 성북동

[4호] 나는 성북동에 산다│글 이민우

  삼 년 전, 십일 월 성북동으로 갑자기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성북동은 대학시절에는 간송미술관의 전시가 열리면 늘 찾아오던 곳입니다. 간송미술관의 전시는 항상 봄에 열려서 성북동에 대한 저의 기억은 ‘노랗게 꽃물 들고, 연하게 풀물 드는 봄’입니다. 간송미술관의 전시에 오면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면서 오랫동안 둘러보곤 했는데, 돌이켜보면 숨도 편하게 못 쉴 정도의 적막이 흐르던 간송미술관의 한가로움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드문드문 관람객이 있긴 했어도 대부분의 관람시간 동안에는 전시실에 아무도 없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헛기침이라도 한번 하려면 오랫동안 목을 조용히 긁다가 겨우 한 번씩 큭큭 했습니다. 제 헛기침 소리를 들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죠. 그렇게 간송미술관에서 나오고 나면, 정문 바로 옆에 있는 성북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시소에 걸터앉아 또 반시간 봄볕을 멍하니 쬐다가 돌아가고 했습니다. 대학시절의 성북동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적막함. 오래되고 굴절이 심한 전시실의

유리창. 봄 그리고 간송미술관.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고 가족이 생긴 후에는, 성북동은 몇 달에 한번 밥을 먹고 드라이브하는 곳이었습니다. 잠실에서 차를 몰고 나와, 올림픽도로를 타고, 한남대교를 건너, 남산을 한 바퀴 돌고 내려와, 광화문을 지나고, 삼청동길을 넘어서 터널에 오르고, 성북동으로 넘어옵니다. 성북동이 처음부터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성북동에 도착하고 나면 운전 때문에 피곤하기도 하고, 슬슬 돌아가는 길에 도로가 꽉 막혀 버릴까봐 걱정도 됩니다. 하지만 다시 버릇처럼 성북초등학교에 차를 두고, 잠시 길을 걷다가 국수를 먹고, 운동장에서 아이와 놀다가, 해가 서울성곽 위 말바위로 넘어갈 쯤이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성북동은 조용해서 좋았고, 가끔 늦잠을 잔 일요일에 놀러가기 좋았고, 편안해서 좋았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저희 가족은 몇 달을 참 바쁘게 서울을 돌아다녔습니다. 부모가 모두 일을 하다 보니 아이와 같이 있는 시간이 늘 부족해서 고민도 많았고, 무엇보다 초등학교를 아파트 안에 있는 학교에 보내고 나면, 부모가 없는 시간 동안 아이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학원 버스를 타고 아파트 주변에 있는 학원을 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직원들과 일도 하면서 아이도 돌볼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곳을 물색하느라 주말마다 차를 몰고 나가 서울 곳곳을 돌았습니다. 하지만, 사무실과 학교 그리고 집까지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곳을 찾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돌다가 하루는 너무 지쳐서, 그럼 바람이나 쐬자며 성북동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성북동은 조용하니까 잠시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기에는 좋을 거라며.

  왜 그랬을까요? 사실 성북동은 저희 가족에게는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동네인데도, 그 몇 달 동안 한 번도 성북동을 이사할 후보지로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늦가을 쌀쌀해진 운동장에서 아이와 철봉에 매달리고 미끄럼틀을 오르내리면서 이런 조용한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과목의 성취도가 낮다고 해서 주변의 적당한 사설학원을 추천해 주는 잠실의 초등학교 보다는, 아이가 편하게 놀고 쉴 수 있는 학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왜 그제서야 들었을까요? 그래서 그날 저녁, 마을을 내려오는 길에 근처 복덕방에서 소개해 준 집을 계약하고 바로 이사를 결정했습니다.


  잠실에서 성북동으로 이사 오고 몇 달 동안 가장 많이 받은 주변의 인사 중의 하나가 ‘왜 그 좋은 잠실에서 성북동으로 이사 왔어요?’라는 질문입니다. 글쎄요. 왜 그랬는지 짧게 몇 가지 이유를 들라고 한다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잠실의 아파트들은 단지가 굉장히 크기도 하고, 가끔 누가 사는지도 모르기도 하고, 누가 이사를 왔는지 누가 떠났는지도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노래 가사에 나오듯이 삭막한 네모 속의 네모난 사람들은 아닙니다. 옆집 할머니도 알고, 그 자식은 누군지도 알고, 가끔 음식도 나누어 먹습니다. 옆집에서 가끔 마늘을 절구에 넣고 쿵쿵 찧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위층 아저씨가 러닝머신을 달리는 소리가 천정으로 들리기는 해도, 아파트도 좋은 마을입니다. 다만 잠실을 떠난 이유는 아빠와 엄마가 보낸 어린 시절처럼, 저희 아이도 더 많은 걸 보고 즐길 수 있는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일 겁니다.


  여전히 저희 가족은 성북동에 와서도 바쁩니다. 한 집에 사무실과 살림집이 같이 있어서 여느 직장인들처럼 바쁘게 새벽밥을 먹고 아이를 챙기는 일은 없지만, 부부는 아홉시에서 여섯시까지는 일을 하고, 아이는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바쁜 하루를 보냅니다.

  대신 적어도 아이가 학교에서 올 때 따뜻하게 맞이해 줄 수 있고, 학원에 갈 때 손잡고 버스를 같이 기다려 줄 수는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일곱 시 전에는 저녁식사를 다 같이 할 수 있게 되었고, 늦저녁에 가볍게 서울성곽을 걷기도 하고, 산동네 골목을 작은 모험 삼아 이리저리 헤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처럼 좋은 놀이터는 없지만, 아이는 길에서 친구를 만나면 오랫동안 뛰어 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활의 큰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니고, 호사를 누리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런 별스러울 것 없는 변화 때문에 성북동으로 이사 오게 된 게 참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간 성북동에 살면서 친구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한 친구도 얼마 전에 성북동으로 이사 왔습니다. 그 친구도 참 잘했다고 합니다. 친구는 매일 성벽의 길을 올라 성벽 반대편에 있는 어린이집까지 아이와 걷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봄도 지나고, 여름도 지나고, 가을도 지났습니다. 친구는 이제 추운 겨울에는 성벽길을 어떻게 아이와 오를까 걱정스레 하는 눈치입니다. 그래도 여름 장마에도 갔던 길이니까, 이번 겨울에도 아이와 건강하게 다닐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걷는 동안에 아이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아마도 이사 온 첫해 동안 많은 것을 친구의 가족들도 배워가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오는 날 엄마와 함께 걷는 방법도 배웠으니, 이제 눈 오는 날에 함께 손잡고 미끄러지지 않고 잘 걷는 방법도 배우겠죠.



  높은 건물과 집들이 없는 성북동은 담장 안에서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담장 안 지붕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온전히 제 하늘같은 느낌입니다. 넓은 공원의 하늘은 모두의 하늘이지만, 마당에서 보는 하늘은 쪽방 같아도 그래도 제 하늘같아서 좋습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는 더 멀고 더 큰 하늘을 볼 수 있지만, 낮은 주택 안에서 보는 하늘은 더 포근합니다. 그래서 친구도 이사 오길 참 잘했다고 여길 거라고 저희 가족은 생각합니다. 퍽퍽한 사람살이가 그렇게 편한 구석도 있구나 하는 걸 성북동에 와서야 새삼 느낍니다.


  가끔씩 마당에 앉아서 언젠가 이 마을을 떠나면 어디로 갈지 가족과 이야기합니다. 사람 사는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또 다른 곳에서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때가 오면 저희 가족은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 역시 지금껏 결정했던 방법이나 기준과는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편한 곳이 살만한 곳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성북동에 할 수 있는 한 오래 머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민우는 인형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회사인 글립의 대표이다. 애니메이션 더빙PD를 거쳐, 벤처회사를 다니다가, 15년 째 인형을 만들고 디자인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가 만든 인형들은 성북동 홍익중고등학교 입구의 ‘그린랜드 인 블루’에서 만나볼 수 있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4호는 2014년 '한옥마을 및 한양도성 인근 마을 가꾸기 공동체 희망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4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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