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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Oct 23. 2017

성북마을살이 4년 반,
앞으로는 몇 년일까?

[9호] 지역공동체 특집 | 글 황선영

  성북동에 살기 전에는 강서구 화곡동과 노원구 상계동에서 2~3년씩 살았다. 그 전에는 대구에 있었다. 우리 부부는 십여 년 전, 결혼과 함께 서울로 옮겨온 ‘지방 이주민’이다. 굳이 이주민이라고 부르는 건, 그만큼 지방과 서울에서 사는 것의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데가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직접 겪어 보면 이 차이가 참 크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동네에서 살고 있지만 마을에 살고 있지는 않은 것과, 마을살이를 하는 것은 서울과 지방에서 사는 것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화곡동이나 상계동에서 살던 시절, 나 또는 우리 부부는 마을에서 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웃도 동네 친구도 없었다. 살다 보면 그 동네에 첫 발을 딛게 해 준 공인중개사로부터 시작해 얼마간 낯을 익힌 식당, 슈퍼마켓, 세탁소, 헬스클럽, 커피집 등의 사장님이 몇 분 생길 뿐이다. 그 시절 나에게 ‘동네’란 어느 무료한 저녁에 ‘운동 삼아 동네 한 바퀴 돌고 올까’같은 용례 외엔 쓸 일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성북동에 와서도 마을살이에 합류하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왜 성북동일까? 가끔 생각해 본다. 물론 화곡동이나 상계동에 살던 시기엔 마을살이나 마을만들기 같은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그때 그 말이 있었다 한들 크게 달라질 건 없었으리라. 내가 마을의 일부라는 생각도, 적극적으로 거기 속하겠다는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단지 2~3년 머무르다 가는 세입자일 뿐이며, 한 곳에 계속 살 수도 없다. 내 삶이 나의 의지가 아니고 오로지 남, 그러니까 집주인의 의지에 달린 상황에서 살고 있는 마을을 낫게 만든다거나 마을에 정을 쌓는 것이 대체 내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그런 점에서 성북동에 들어올 때는, 몇 가지의 인연과 행운이 동시에 따라온 것 같다. 장마철에 비가 샐 정도로 벽이 얇고 부실하게 지어진 집에서 심한 결로로 고생하다가 집주인의 모르쇠에 지쳐 노원구를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지하철 4호선 라인을 더듬어 아래로 내려오던 중에 성북동을 발견하여 이 동네로 처음 이사를 왔을 때, 나는 이미 동네에 친구가 있었다. 당시 카페 티티카카를 운영하고 있던 김기민 대표와 블로그 이웃이었던 인연으로 임대차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도 전에 동네친구와 단골카페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카페 티티카카, 지금의 동네공간을 기점으로 많은 인연들이 생겨났다. 성북동에서 처음으로 세든 집이 한옥인 것도 큰 몫을 했다. 한옥살이는 새롭고도 색다른 경험이어서 추위와 불편을 안겨 주었지만 살림살이의 크고 작은 고생들을 갚아줄 만한 보상도 해 주었다. 여름이면 담을 뒤덮을 만큼 피는 장미와 향기로운 백합도 그렇지만, 여럿이 모여 함께 시끌벅적 고기를 구워먹고 만두를 빚기에 충분한 넓은 마루가 가장 큰 보상에 속했다. 성북동 한옥에 호기심을 보이는 친구들, 동네에서 만난 친구들이 우리 집의 넓은 마루를 놀기 좋은 곳으로 생각하고 또 찾아와 주는 것이 그저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많은 손님을 치러 본 적은 결혼해서 내 살림을 차린 후에도, 또 그 전에도 없었다.


  성북동 한옥, 그리고 카페 티티카카라는 공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조금씩 내 삶에 변화로 흘러들었다. 나를 둘러싼 환경도 관심사도 변했다. 공동체 구성이 오랫동안 내가 가졌던 막연한 바람이자 지향이기도 했지만 마을에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러한 정책이 있다는 것, 그 영역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도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지난 몇 년 간 ‘동네 친구’와 함께 조금씩 참여한 일들이 마을 사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다니던 의료생협이 마을공동체지원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나도 사업지기가 되어 본격적인 공동체 활동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마을살이전문가’들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말이다.

  성북마을살이 4년 반, 나의 직함도 많아졌다. 삼십육쩜육도씨 의료생활협동조합의 마을사업지기, 성북마을살이연구회 운영위원, 성북동 마을계획단원, 그리고 올해 더해진 성북구 마을지원활동가까지. 이제 마을공동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마을에서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지는 밤낮 연구하고 실행해야 하는 자리에까지 와 버렸다.

  ‘활동가’의 다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불구덩이에 발을 넣었다 - 힘들고 돈 안 되는 일만 한다고 농담을 던지지만, 나는 만족스럽다. 내 깜냥에 뭐 다른 일을 했다고 해서 큰돈을 벌거나 성공했을 것 같지도 않고, 마을이라는 작은 단위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구상하고 그것이 실현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하나하나가 즐겁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마음은 한결 편하다. 사람을 언제든 교체 가능한 부속 취급하는 현대 사회에서 적어도 이곳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하고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작게나마 눈으로 보게 해 주기 때문인 것 같다.


  마을살이에 조금은 익숙해진 요즘, 새로운 고민이 생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마을만들기에 대해 많은 생각과 이야기를 듣는다. 결국 마을만들기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런데 살기 좋은 마을은 누구를 위한 마을일까?

  내가 성북동에 들어와서, 여전히 주거가 불분명한 세입자의 처지임에도 마을에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 간의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이 연결될수록 혼자서 해결하기는 벅찬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고 이 어려운 세상에서 조금은 더 양질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내 오랜 믿음이고 실제의 경험이다. 그런데 이 작은 마을 안에서도 연결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다. 행정 시스템이 미처 돌보지 못한 틈새를 메우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주민들이 만드는 것이 마을공동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안에서 또 누군가를, 작은 삶의 문제들을 놓치고 있지나 않을까? 내가 지켜본 바로는 많은 마을 사업들에서 대상으로 삼는 ‘주민’들은 4인 기준의 소위 ‘일반적인’ 가정, 어린아이들이 있는 가족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현재의 사회 시스템에서 아이를 기르는 것이 어렵고 많은 도움이 필요한 반면 제대로 된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만큼, 마을이 그러한 주민을 우선 지원해 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공리적인 측면에서 우선 순위에 있는 주민들만을 먼저 생각하다 보면, 더욱 공동체가 필요한 사람들을 엮어주는 일은 후순위로 밀리기 쉽다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어서, 이 도시에서 혼자 사는데 정말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주거 불안에 시달리는 청년 세입자들, 혼자 사는 여성들, 독거노인들인데 마을공동체가 이들의 정착이나 안정된 삶에 얼마나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또는 마을 사업이 주민들의 안정된 삶을 넘어서 마을 바깥에서 유입되는 사람들의 안정을 지원하는 방향으로도 시행될 수 있을까? 학기 중에만 지역에 머무르는 대학생들은 주민에 속하지 못할까? 성장해서 타지로 갈 청소년들을 계속 마을살이 안에 머무르게 할 수 있을까?

젠트리피케이션에 시달리는 자영업자들이나 원룸을 떠도는 청년 노동자들의 삶에 마을 공동체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혹은 ‘정상(일반적으로 생각하는 4인 기준의) 가족’이 아닌 다른 가정, 새로운 형태의 가정에 대해서는? 세대 간 연결에 관해서는?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마을공동체는 타인에게 얼마나 열려 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살기 좋은 성북 마을”이라하면 과연 누가 살기 좋은 것일까? 집 주인이 아닌 세입자들도 거기에 동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마을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알리면 누구에게 좋을까? 마을의 이익은 외부인의 타자화 - 즉, 마을 바깥의 사람들을 세입자나 관광객으로 설정함으로서 담보되는 게 아닐까? 이화 마을의 벽화문제라든가 망원동, 해방촌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처럼 선의로 시작한 일이 나쁜 결과를 낳는 상황 앞에서 주민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나는 마을이 아직까지 공동체의 기준으로 묶이지 못하는 사람들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정된 주거가 없고 소속감이 없어서 공동체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사람이 사실은 더욱 연결고리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네’에 살고 있지만 ‘마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당사자들도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뉴스를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축제 소식은 알아도 당장 우리 마을의 축제 소식은 모르고 사는 것처럼, 내가 사는 바로 옆에서 나를 위한 정책이 시행되고 있음에도 그것을 몰라서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보면 안타깝게 느껴진다.

  나는 특히 청년 당사자들이 마을에 좀더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사회가 떠넘긴 많은 부담들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정작 여러 가지 지원에서는 후순위로 밀리기 쉬운 계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에게 가까운 동주민센터나 구청 등 행정기관부터 찾아보기를 권한다. 주민등록등본을 뗄 때 말고는 거의 갈 일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일부러라도 들러서 벽에 붙여놓은 많은 안내문들을 보자. 내 삶에 해당되는 정책이나 교육, 지원 등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행정기관의 서비스를 이용하다 보면 행정기관도 점점 그 계층을 인식하게 되고 그들을 위해 더 많은 사업을 구상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작은 관심에서 시작할 수 있다. 내 마을살이가 한 명의 친구에게서 시작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최종적으로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된 마을살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황선영은 문화 기획을 업으로 삼으며 살았다. 성북동에서 곰신랑 그리고 반려견 달고나, 귀동이와 함께 알콩달콩 살고 싶은 성북동 6년차 세입자이다. 지인의 권유로 지역 활동에 슬며시 발을 들인 것이 작년 일인데, 이제는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를만큼 사는 동네인 성북동과 일터인 연남동 양쪽에서 열일하다 올해는 성북구 마을지원활동가로도 일하고 있다.


동네공간은 성북구 지역 사회에서 공간을 필요로 하는 주체들이 필요한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고자 만든 공간이다. 궁극적으로는 지역 내 활동 주체들이 필요한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는 공간 자급 플랫폼이 되고자 한다. 옛 카페 티티카카 자리에 위치하며 한 명의 개인 또는 모임·단체·회사가 감당하기 벅찬 월세 부담을 여러 단위가 모여 나누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지금은 성북동 주민과 건축그룹[tam], 성북동천, 성북마을살이연구회, 성북마을기금협의회, 성북마을무지개, 창작집단미러, 협치성북시민협의회 등이 사무실 겸 모임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주소 서울시 성북구 선잠로 12-6, 1층 건축그룹[tam]

문의 adultscentre@gmail.com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9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7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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