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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Oct 27. 2017

국가 지정문화재,
명승 35호 ‘성락원’을 찾아서

[9호] 성북동 문화재 답사기 | 글 박진하

  디미방 점심영업을 마감하고 쉬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김총무로부터다. 오는 토요일에 성락원이 개방된다니 참가 신청을 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잡지 편집디자인을 담당하는 디자이너와 함께 이 명승지를 찾게 되었다.

  같이 동참하겠다는 부인과 함께 이 원림을 찾아 나섰다. 당초 사적지이었던 것을 명승으로 변경 지정한 것이라 한다. 이곳은 소쇄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 양식으로 조성된 3대 정원 중 하나이다. 사실 정원이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다. 원림이란 표현이 정확한 것이다. 정원이란 말은 일제 식민지 시대 때 이식된 것으로 일본식 정원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다. 도심 속 저택에 인위적으로 조경을 한 것이 정원이라면, 원림은 경지가 좋은 곳을 찾아 자연 그대로를 조경으로 삼아 적절한 위치에 정자나 집칸을 배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성락원은 서울 속에 만들어진, 확실한 의미의 ‘원림’이라고 할 수 있다.


  한성대 전철역 6번 출구에서 성북천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두 갈래의 개천이 합쳐지는 선잠단지 앞에서 우측을 선택하여 다시 나아간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또다시 개천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이번에도 길상사 방향이 아닌 오른 쪽 개천을 따라 오른다. 앞 쪽이 탁 트인 공지가 눈에 띤다. 성락원 입구에 다다른 것이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우리 디자이너도 저만큼 서서 우리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나누고 참가비 만원씩 납부한 뒤 주위를 살펴본다. 시멘트에 회 벽돌을 부착해 만든 대문기둥을 양측에 두고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오른 쪽 주차장 뒤편을 바라보니 두 단으로 나누어 조성된 계단식 화단이 보인다. 그곳에는 여러 나무들과 함께 잡풀이 우거져 있었다.

  개방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며 상락원의 한자적 의미를 화제로 일행과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 성락원이라는 한글 표지판을 봤을 때에는 한자로 ‘成樂園’인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이후,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가까운 도성 밖에 위치한 원림이라는 뜻에서 ‘城樂園’인 것을 확인하였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고종 황제의 다섯 째 아드님인 의친왕이 사시던 곳이라 하여 이 강공 별저라 불렀다 한다. 그러니 실은 이런 당호를 가지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성락원이란 문화재 명을 듣게 되었을 때에 소학에 나온 ‘성어락(成於樂)’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는 시어(詩語)와 이를 기초로 시를 짓는 법을 배우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과 만나 공손한 예법을 갖춰 교류하는 것을 학습해야 하며, 나아가 하나하나의 음이 모여 조화롭게 어울리고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원리를 터득해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른바 풍류다. 이 구절을 읽었을 때 그 의미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성리학이 단지 예절과 격식을 배우는데 그치지 않고 그를 기반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 그것이 ‘성어락(成於樂)’이었다. 우리 선조들이 원림을 만들고 이곳에서 시회를 열고 아름다운 음악을 즐겼다는 뜻에서 ‘성락원(成樂園)’이라 명명했다면, 정말 멋진 당호가 아닌가 생각했

던 것이다.


  드디어 입장이 시작되었다. 문화 해설사의 낭랑한 음성과 함께 하는 답사이다. 저 위쪽에서 흘러 내려온 계류는 석축을 쌓아 정리한 지하수로를 거쳐 밑에 있는 성북천과 만난다 하신다. 당초에는 두 줄기의 물이 여기에서 만나 흘러내려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한쪽이 막혀 있다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손길을 따라 오른 쪽 위를 바라보니 담장으로 막혀있다. 이젠 한 쪽만 남아 있으나 흐르는 시내 주위 풍경은 출구 위에 쌓아 놓은 석축 외에는 그 어떤 인위적인 조성이나 가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 그대로였다. 다만 ‘쌍류동천(雙流洞天)’이라는 전각이 바위에 새겨진 것만이 사람 손이 가해진 흔적이지 싶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정리하고 조성한 부분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계류를 중심으로 좌우로 자연석을 쌓아 정리했다든지 가산(假山)을 만들어 비보를 했다는 것이 그렇다. 다만 자연 그대로를 존중하고 이를 보존한다는 정신을 근간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그들의 흐름이 막힘없이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방향임은 틀림이 없다.

  행서체로 이 지점을 동천이라 명명한 것은 선비들의 취향을 드러낸 것이지만 좋은 경관을 찾아 즐기려는 도가풍의 유희관도 포함되어 있다. 동천(洞天)이란 용어가 신선들이 사는 동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을 찾아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는 모든 세파를 잊고 신선이 된 심정으로 노닐고 싶다는 뜻을 담은 게다.





  길은 계류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다. 이 원림의 핵심인 은밀한 내원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가산을 만들어 감추어 두고 있다. 이 작은 동산을 끼고 돌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이 작은 동산은 엄나무를 식재해 조성했다 하는데 얼핏 보기에는 소나무처럼 보인다. 이처럼 가산을 만들어 비보하는 것은 중국 풍수의 영향으로 보인다. 물의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국에서는 물이 흘러 나가는 자체가 재물이 빠져 나가는 것으로 인식해 몹시 싫어한다. 그래서 집에서 물이 빠져 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을 기피한다. 이런 중국 풍수사상에 의거하여 내원에서 볼 때 쌍류동천을 거쳐 물이 빠져 나가는 것 자체를 볼 수 없게 만든 장치가 바로 이 가산이다. 그 이름을 용두(龍頭)가산이라 작명한 것도 이를 암시한 것인데, 지맥이 꿈틀거리는 것을 용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면서 용이 이 지점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용두가산이라 명명한 것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계류는 이 가산을 돌아나가게 되어 있다.


  가산 옆 개천과 내원으로 가는 오솔길 사이에는 꽤나 오래된 고목이 커다란 암석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다. 이 오래된 느티나무 주위를 커다란 자연석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홍수나 기타 재해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이 나무를 중심으로 돌아나가니 시야가 확 트인다. 멀리는 후원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보이는 연못이 ‘영벽지’이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이곳은 그림자가 비치는 푸른 연못이라는 뜻에서 영벽지(影碧池)라 부른다. 그곳 한가운데에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에 의해 조성된 드므가 보인다. ‘드므’란 우리나라 전통 한옥 앞에 배치하는 것으로 물을 담아두는 항아리 모양의 벽사물이다. 드므는 불을 가지고 장난치며 놀다 끝내 집에 불을 내는 도깨비가 왔다가 이 드므에 비친 자기의 흉측한 얼굴에 놀라 도망가게 하는, 즉 화마로부터 건물을 지키려는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드므는 하늘은 원으로, 땅은 사각형으로 표현하던 천원지방의 사상에 의해 사각의 외형 안에 둥근 홈을 새긴 것이다. 하늘과 땅을 포함한 우주를 새겨 이 연못에 넣어두었다. 해설사에 의하면 최근 조사 과정에서 달이 가운데에 있는 둥근 원형 안으로 쏙 들어가는 모습도 확인했다 한다. 그렇다면 그 시기가 어느 때인가? 정월 보름 밤, 이 속에 담긴 달그림자를 상상해 본다.


  천연 암반을 이용해 만든 이 조형물을 간직한 연못 측면 암벽에는 행서체의 ‘장빙가(檣氷家)’라는 각자가 보인다. 밑에 완당이란 글씨가 추가된 것으로 보아 이것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체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기 드물게 추사체가 아닌 행서체로 쓰인 글씨가 무척이나 우아해 보인다. 고드름이 커다란 돛대처럼 매달린 집처럼 보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한 겨울의 영벽지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계곡을 따라 내려온 계류는 일차적으로 후원 앞 연못에 머물게 된다. 물이 연못에 가득차면 둑 너머로 조금씩 방출하는 방식으로 무너미(물이 흘러넘치는 곳)로 흘려 보낸다. 조그마한 홈을 따라 내려온 물줄기는 작은 폭포를 거쳐 두 번째 연못인 이곳에 다시 고이게 되는데, 한겨울에는 이 작은 물줄기가 모두 얼어붙어 커다란 고드름 집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연못을 뒤로 하고 암반을 향해 오르다 보면 왼편으로 인공 잔디가 펼쳐진다. 그 위로 커다란 노송 세 그루가 보인다. 특히 태풍으로 인해 누워 버렸다는 노송의 자태가 참으로 주위 경관과 더불어 기품이 있어 보인다. 한쪽으로는 자연 괴석이 놓여 있는데 그 위로 단풍나무가 자라고 있다. 어떻게 단단한 바위를 뚫고 자랄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참으로 희귀한 장식물이 되고 있었다.


  보다 넓은 암반이 있어 정자가 놓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 옆으로는 청산일조(靑山壹條)라고 전서체로 새긴 각자가 보인다. 또 왼쪽 위 암반에는 凹형태의 커다란 홈 자국이 보인다. 이른바 가마가 다니던 길이라 한다. 마치 가마를 올려놓던 가마 주차장처럼 보인다.

  다시 내려와 오른쪽 본채로 향한다. 이른바 의친왕이 기거하던 건물이다. 같이 동행하며 안내하던 지역 봉사원의 설명에 의하면 본래의 건물은 1960년대에 화재로 인해 전부 소실되었고 다시 복원된 것이어서 문화재적 가치는 많이 떨어진다고 한다.

  밑에 놓인 한옥건물은 전체적으로 T자형의 팔작지붕 형식으로 격자무늬 방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이 의친왕이 기거하던 곳이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어 자세한 것은 볼 수 없었으나 뒤편으로 대나무와 소나무가 심어진 후원이 있었다. 흔히 선비들이 후원에 심어 완상하던 대나무와 한겨울에도 푸른 솔잎을 간직하고 있는 소나무의 기개를 보면서 의친왕도 망국의 슬픔을 달래려 하셨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 건물을 돌아 나가니 커다란 연지가 있고 전면 7칸, 측면 2칸의 큰 누각이 보인다. 이는 1960년대 건축된 것으로 커다란 대청마루가 시원스럽게 느껴진다. 그 뒤로는 송석(松石)이라 새긴 암반이 보이는데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이곳을 돌아 두 줄기로 못 안으로 떨어져 들어간다 한다. 이 연못은 연꽃이 피어나는 연지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아름답게 활짝 핀 붉은 연꽃들과 송석정은 꽤나 어울려 보였을 것이다.


  

  그 위쪽으로는 갈 수 없었으나 비탈진 북쪽 산자락 중앙에 자리한 소나무 밑에는 바위를 쪼개 만든 두 뼘 크기의 고엽약수(枯葉藥水)터가 조성되어 있다한다. 여기에서 나온 약수를 궁에서 길어다 먹었다고 전해지며, 철종 때에는 별감이 나와 지켰다고 할 정도로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성락원은 가운데 위치한 내원이 중심이고 전체이다. 본격적으로 이 원림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순조 때라고 하나, 조사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것에 의하면 이보다 훨씬 앞선 고려시대 혹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당초 이런 내원을 조성하는 순서를 보면 아름다운 경승지를 찾는 것이 먼저이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뭔가를 조성하기 전에 자연이 만든 아름다운 장소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곳이 바로 이 장소였던 것이다. 당시 성북동 일대는 도화꽃으로 유명한 한양의 5대 명승지 중 하나였다. 특히 성락원 주변은 계곡이 깊고 수석이 맑으며 도성에서 멀지 않아 세도가들이 자주 찾아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니 최근까지 발굴 조사한 것은 외부로 발표하지 않고 이 명승지에 대한 사진도 외부로 노출되지 않도록 단속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신비스럽게 덮어두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숨겨둔 것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밝히는 것이 바른 도리이건대 오히려 이를 감추고 숨긴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혹 내원 이외의 모든 시설들이 1960년 대 이후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함인가? 있는 것은 있는 대로 밝히는 것이 좋다 생각한다. 아름다운 사진을 보았으니 그곳에 갈 필요 없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사진과 실물은 다르다. 오히려 그로 인해 실제의 절경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무언가 감추고 숨기는 데에서 문제는 발생한다. 널리 공개하시길 바란다.


  우리나라 풍수의 대가인 최 선생의 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풍수지리서 ‘택경(宅經)’에서 저자 유암이 인용한 대목은 특히 탁월하다. <택경에 이르기를 산 하나 물 한 줄기가 다정하게 생긴 곳은 소인이 머물 곳이고, 큰 산과 큰 물이 명당 터로 들어오는 곳은 군자가 살 곳>이라 하였다. 좁다란 계곡, 아름다운 경치의 장소에 달랑 제 식구 한철 보낼 수 있는 별장 터를 잡아놓은 사람들은 택경이 지적한 대로 소인배에 지나지 않으니 서둘러 원래 땅으로 복원시켜야 군자 근처에라도 갈 수 있을 것이다.”
- 한국의 풍수지리, 최창조


  후원 뒷산에 올라 전체 지형을 살펴볼 수는 없었으나 주변 지형과 자료로 추정컨대 분명 명당 터임이 확실하다. 북한산 문수봉에서 뻗어 내린 구준봉에서 비롯된, 지맥이 잘 형성된 좌청룡과 우백호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그렇다. 좌청룡이라 함은 지금 한진 아파트가 위치한 산이 그것이고 우백호라 함은 낙산 지류가 맡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명당 터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이를 공개해 여러 사람이 공유하게 해야 한다.


  지난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8호에 실린 ‘성북동 착한 형을 만나다.’ 라는 인터뷰 기사를 보면 성락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성북동에서 가장 추천할만한 명소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성락원 길을 따라 올라가면 꽤 깊고 큰 연못이 몇 개 있어요. 지금은 그곳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주 조용하고 초록빛 나무로 우거진 산책로가 있습니다.”

  그가 말한 장소가 성락원의 내원과 후원이다. 성북에서 자라고 성장한 이들의 말에 의하면 성락원은 그들이 어린 시절 뛰어 놀던 아름다운 추억이 간직된 장소라 한다. 그들의 그 아름다운 시절이 과거라는 시간 속에 갇혀있듯이 우리들의 아름다운 명승지도 그동안 굳게 닫혀있었다.  앞으로 이를 단계적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한다니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다. 그 옛날처럼 방치에 가까운 자유로운 수준으로 개방하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크게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또 다른 명승지, 소쇄원이 그러했듯이.



  우리 선조들이 밝은 눈으로 아름다운 명승지를 발견하고 이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했던 것처럼 성락원도 누구나 즐겨 관람할 수 있게 하길 바란다. 기쁨도 나누면 배가 된다 했으니 이런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도 나누면 우리들의 맘과 정서가 보다 넉넉해질 것이다.



박진하는 성북동의 명소인 작은 식당 ‘디미방’을 부인과 함께 운영하고 있고, 요가와 명상 전문가이기도 하다. 우리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성북동을 사랑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는 진정한 성북동 사람이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9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7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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