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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Nov 03. 2017

어딘가에, 아무 곳도 아닌

[9호] 성북동 문화 아지트|글 최영환

 성북로8길, 승용차 두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비좁은 아스팔트 도로 초입에는 양 옆으로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동아 철물, 언니네 분식집, 서울 부동산, 옛날 중국집, 그리고 CU 편의점까지, 그만그만한 크기의 소규모 점포 대부분은 60-70년대 산업화 시기 이후로 90년대 중반까지 유행했던 복층 주상복합 건물에 위치해 있다. (간혹 단층건물도 있고 3층 건물도 보인다.) 어떤 건물은 빛바랜 노란색 직사각형 타일로 마감이 되어 있고 또 어떤 건물은 붉은색 벽돌이 이를 대신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층을 상업공간으로, 상층을 거주공간으로 활용하는 기본적인 구조는 동일하다. 요즘처럼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복합 쇼핑몰이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기 이전, 흔히 ‘큰길가’로 불리는 4차선 이상의 대로에 접해 있는 이런 작은 길 초입에 소규모 상업과 주거를 겸한 저층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그 길 안쪽으로 주거 지역이 이어지는 형태의 공간 구조는 기능적으로 분명히 구획된 도심의 그것과 분명히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길을 따라 몇 발자국 옮기자마자 2차선의 도로는 그 위를 가로지르는 엉킨 전선처럼 작은 골목들로 갈라진다. 교행자를 배려해야만 하는, 그래야 서로의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만한 좁은 골목을 끼고 한옥들과 저층 공동주택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이 골목길 한편에 위치한 한옥, 주변의 집들과 달리 한 집의 대문에는 문패가 없다. 그 대신, 대문 한편에 ‘이주헌’이라는 작은 글씨가 새겨진 직사각형 모양의 플라스틱 네온 박스가 달려 있다. 이곳은 오래된 한옥을 개조해 다양한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 공간이다. 이주헌은 성북동 일대에 산재한 여느 한옥들처럼 전통 한옥의 외형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애초의 재료인 흙 위에 근대적 재료 콘크리트가 덧발라지면서 만들어진 한국 근·현대 주거문화의 산물이다. 이와 같은 이형조합의 공간에는 산업화 시기 서

울로 몰려든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기거하며 남긴 소시민의 일상적 기록이 담겨 있다.



  늦겨울 한파가 기세를 부리던 지난 2월, 나는 이주헌에서 거주지와 거주자의 삶 사이의 상호관계를 밝히는 전시를 열었다. <어딘가에, 아무곳도 아닌> 전은 도심 주거지를 변화시키기 위한 두 개의 패러다임, 개발과 보존, 사이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부수적으로 만들어 진 ‘제3지대(현저1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저1동의 주택들은 10여 년째 주인을 잃고 버려진 상태이다. 금싸라기 같은 서울 땅에 ‘버려진 마을’이 무슨 말이냐고 묻겠지만, 서울에는 이미 8만여 채의 빈집이 존재한다. 마을과 집들이 비게 된 연유는 제각각이지만 현저동은 수익성 부족으로 재개발 계획이 유보된 경우다.

  공교로운 일이지만 이주헌이 위치한 성북동에서도 얼마 전까지 재개발과 관련해 주민들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다. 현재는 현저동과 비슷한 이유로 재개발이 철회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개발을 찬성하는 주민과 개발업자들은 변화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성북동과 현저동 모두는 현대 도시 개발의 역사 속에서 같은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성북동의 주민들은 여전히 그 터전에 남아 삶을 영유하고 있는 반면, 현저동의 원주민은 이미 오래전 자신의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에드거 앨런 포우(Edgar Allan Poe)는 그의 소설 『어셔 가의 몰락(Fall of the House of Usher)』에서 ‘버려진 집’을 바라보는 인간의 심리에 관해 치밀하게 분석했다. 저자는 건축물의 물리적 변화와 거주자의 삶

에 궤적을 연계함으로써, ‘사람’과 ‘거처’를 동일시했다. 이 때문에 그의 소설 속 폐허가 된 집이 내뿜는 음울함과 괴기스러움은 단순히 냉혹한 공포로만 다가오는 것 아니라, 서서히 몰락해 가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한 비애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시에 산재한 ‘버려진 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현저1동의 버려진 집들은 대규모 주택 개발 방식이 남긴 낙진인 동시에 산업화 시대를 거친 현대 도시가 간직한 역사적 산물이다. 이곳 거주자들 대부분은 60-70년대 빈농에서 노동자로, 가난을 피해 도시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흔히 도시 빈민이라 불리던 그들이 기거하던 판잣집은 시간이 흘러 콘크리트 벽돌집으로 변모했고 그들의 삶도 그 물리적 변화만큼이나 공고해졌었다. 그러나 애초에 국유지 위에 지어진 이 건축물들은 2005년 도시 환경 개선 명목으로 시행된 재개발 계획의 대상이 되었고, 국가는 합법적인 토지 소유권 이전을 통해 대부분의 원주민들을 몰아 낼 수 있었다.



  이번 전시는 2016년부터 진행해 온 <만약 당신이 이곳에 산다면>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였다. 이 프로젝트는 지난 1년여 간, 내가 새로 이주한 집 주변을 관찰 기록하면서 느낀 감정에서 비롯됐다. 나는 서대문형무소 앞 ‘옥바라지 골목’이 환경 개선이란 명목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목격했고, 강제 철거에 저항하는 원주민들의 투쟁 과정을 비디오로 기록했다. 그리고 내가 가족들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 주변에 조성된 공원에서 보낸 단란한 일상과 우리 집 뒤편 창문으로 바라다 보이는 현저1동의 버려진 집 곳곳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은 반경 1km 남짓의 한 동네 안에서 거의 동시에 벌어진 사건들로 구성됐다. 그 안의 이질적인 풍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환경의 축소판이며, 내가 이 도시를 바라보는 ‘양가적인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 낙후된 환경을 개선하고 그 안에서 편안한 삶을 꿈꾸는 기본적인 욕구와 이를 오도해 주택을 금전적 가치만으로 환원 시켜버린 개발자의 욕망, 그 사이 폐허로 변해가는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는 누군가가 느꼈을 상실감, 이 다면적인 감정들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곳곳에 배어 있다.


  특별히,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모티프는 내가 현저동 어느 버려진 집 한 편에서 마주친 벽화에서 차용됐다. 자화상으로 보이는 인물의 시선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되어버린 까마귀 부리의 빵을 좇는다. 결코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빵을 쫓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나는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작품 중 하나로 현저1동 일대 60여개의 등기부등본을 가져왔다. 이것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또 다른 표식이다. 그 등기부등본에는 건물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집들이 놓여 있는 땅의 소유권은 조각조각 나뉘어 있다. 실재하지만 문서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 집들은 결국 누구도 머물 수 없는, 아무 곳도 아닌 장소가 된 것이다. 나는 현저1동에 존재하는 집들을 한 채씩 촬영해 등기부등본상의 구획대로 조각내어 파노라마 사진으로 재현했고, 그것을 등기부등본과 함께 펼쳐 놓았다. 이처럼 조각나 버린 건축물의 운명은 이곳의 원주민의 그것과 다름 아니다. 이러한 단서들과 함께 나는 현재까지 현저동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벽화로 남겼다. 아무곳도 아니게 된 이곳에서 잊혀간 그 사람들을 누군가는 기억하기를 바

라는 마음으로.


 현대 도시 안에서 주택에 관련한 문제는 사회, 경제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과 더불어 집의 의미를 이해하는 우리의 태도가 변화되지 않는 한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이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것일까 자문해 본다. 아마도 그것은 예술가가 타인과의 공감에 기반을 둔 ‘예술의 소통적 본성’을 신뢰하고 그 예술을 결과가 아닌 과정 자체로 인식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부터 유리창이 깨지고 쓰레기가 널브러진 현저1동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6개월째 생활하고 있다. 이곳에는 여전히 50여명의 원주민이 머물고 있고, 나는 하루하루 이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가며 그것을 기록 중이다. 그 대화 속에는 각자가 바라는 미래가 담겨 있다.

  언젠가는 이곳도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곳으로. 다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상상하기 힘들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우리가 꿈꾸는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존중받고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토양 아래 그 변화가 시작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 중에 예술에게도 역할이 부여된다면, 나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할 것이다.



최영환은 미술가이다. 지난 2012년 성북동에서 ‘동네스토리닷컴’이라는 마을 방송을 통해 주민과 호흡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고, 2014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지원으로 성북동재개발3구역 일대에 햇볕에 반사되는 거울을 이용해 성북동 주민의 생각을 글자로 새기는 공공미술 작업‘사라지기 쉬운 현수막’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주헌 利宙軒은 2015년 6월에 개관한 스페이스 오뉴월의 프로젝트 공간으로, 성북동의 좁은 주택 골목 사이에 위치한다. ‘좋은 집’이라는 뜻의 오뉴월 이주헌은 전시뿐만 아니라 워크숍, 퍼포먼스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위한 열린 공간이다.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8길 8-6

문의 ☏ 070-4401-6741 | onewwall@onewwall.com | 홈페이지 http://onewwall.com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9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7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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