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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Nov 03. 2017

정종과 함께 성북동에서 눈감은
횡보 염상섭

[9호] 우리동네 문학살롱|글 김지애

  횡보(橫步), 염상섭의 호는 ‘가로 횡’에 ‘걸음 보’를 쓴다. 본디 호는 제월(霽月)이었으나 늘 술에 취해 걸음걸이가 바르지 못하다 하여 친구들이 호를 횡보라 지어주었다. 횡보 염상섭은 생전 술을 그렇게 좋아했다. 성북동에서 67세 나이로 눈을 감은 그는 임종 직전에도 아내가 떠먹여주는 정종을 세 숟가락 마시고 술 냄새와 함께 눈을 감았다.


  횡보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많은 지역을 만나게 된다. 그는 189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태어난 곳은 구한말 ‘띳굴’이라 불렸던 서울의 중심지역으로, 사직공원 근처라고만 알려져 있다. 출생지를 명확히 알 수 없는 탓에 생가에 두고자 했던‘염상섭 상’은 종묘 광장에서 삼청공원으로 떠돌아다니다, 현재는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자리했다. 횡보는 중인이었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일제가 지은 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조선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현재 조계사 터에 있던 보성학교로 전학을 갔다가 15세에 홀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대학 입학 후 학자금을 위해 기자생활을 하던 횡보는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3월 19일 오사카 천왕사에서 재일동포들을 규합한다.


“…폭력이 무서워 복종하기에는 너무도 자유의 존엄성을 깨닫고 있는 데 주저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에 목숨을 걸고 독립을 선언하는 바이다.”  
                                                                                - 염상섭, 「독립선언서」 일부


  독립만세운동을 이끌다 체포된 횡보는 약 석 달을 철창에 갇혀 있다가 2심에 무죄로 석방된다. 1920년 24세에 서울로 돌아와 동아일보 창간과 더불어 정치부 기자로 입사한다. 같은 해 기자직을 사퇴하고 정주에서 중학교사가 되기도 한 그는 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연재하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펼쳤다. 1926년 30세 때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 문단 진출을 꾀하기도 하였으나 32세에 다시 귀국하여 주로 신문사에서 일하며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1936년 40세에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났다가 해방을 맞으면서 다시 귀국길에 오른다.


  1946년, 10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횡보가 자리를 잡은 곳은 돈암동 295-3번지였다. 그곳에서 염상섭은 경향신문사에서 근무하며 「두 파산」, 「임종」 등을 발표했다. 또한 아동문학인 「채석장의 소년」도 돈암동 시절에 연재했는데, 횡보의 따님 염희영 씨에 따르면 돈암동 집 근처에 채석장이 있었다며, “아침 산책길에 아버지가 분명 채석장을 지나셨을 것이고 그 경험이 소설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도 한동안 횡보와 그 가족은 돈암동 집에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횡보는 해군으로 임관하고, 일가족은 부산으로 이사를 간다. 전쟁통에도 틈틈이 연재를 하는 등 끊임없이 집필 활동을 이어갔으나 당시 글의 상당 부분이 유실되었다. 휴전 이후 횡보가 상경하여 살던 곳은 북아현동이다. 이듬해 54년, 횡보는 위병을 얻게 된다. 그러나 집필은 멈추지 않았다.

  이후 행촌동, 교북동, 충정로, 상도동 등 끝없이 이사를 다니며 병세가 많이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대필의 도움을 얻어 구두로 집필활동을 이어갔다. 횡보는 62년에 성북동 145-52번지로 마지막 이사를 한다. 그리고 63년 3월 14일, 정종 냄새를 품고 직장암으로 별세하였다.


  횡보 염상섭은 자연주의 문학을 근대 한국 문학으로 유입하고, 사실주의 문학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문학적 공로가 무척 크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당시 서울 중류층이 사용하는 생활어휘가 풍부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국어적 가치 또한 뛰어나다. 그의 작품은 현실적이고 날카로우며,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작가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언제 두 발로 걸어보겠다는 것인지! 방임주의란 민족 자주를 위해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요,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주의도 아니거던요. 결국 막연한 민족 분열에서 심각한 계급항쟁에 끌어가기는 독재나 방임이나 같은 작용을 할 것입니다. 여기서 정말 새로운 민족적 자각이있어야만 될 텐데 어쩌는 셈들인지?”
                                                                                           - 염상섭, 「재회」 일부


  작가의 1948년 작 「재회」는 월남한 주인공이 남한이 처한 상황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으로, 시대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실제로 한국 현대사는 위 작품에서 말하는 것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고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통찰력은 놀랍다. 다만 이 작품은 작가의 다른 작품 중에서도 유난히 밝은 전망을 제시하며 끝난다.

  횡보는 계몽주의가 그 사명을 다할 때에 나타나 사실주의 문학으로 한국 문학계에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시기를 모두 포함하여 그 시대를 반영한 작품을 집필해왔고, 일생 동안 장편 28편, 단편 150편, 평론 101편, 수필 30편 등 약 5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군은 무슨 까닭에 술을 먹는가?”
“논리는 없지. 다만 취하려고.”
                                                                       - 염상섭, 「표본실의 청개구리」 일부


  유학 시절 횡보는 서울에서 원고료가 오면 태반을 술값으로 썼다. 함께 하숙하던 무애 양주동이 고료로 먼저 방세를 내는 반면, 횡보는 한달 숙식비로 넉넉한 돈을 그날 하루 술값으로 다 쓰곤 했다고 한다. 

  성북동 ‘디미방’위로 5분여를 걸어 올라가면 작가의 옛집터가 나온다. 필자는 술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내가 걸어 내려온 그 길을 작가가 술에 취해 비뚜름하게 걸어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횡보라는 그의 호는 어쩐지 더 친숙하여 계속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참고문헌

염상섭, “(다시 읽는 염상섭) 표본실의 청개구리”, 맑은소리, 2000.
문학과사상연구회, “염상섭 문학의 재인식”, 소명출판, 2016. 
김종균, “작고문인50 회고담”, 우리문학기림회, 2002.
“염상섭”,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횡보 염상섭”, 「한국문단사 1908-1970」, 2003.



김지애는 일주일에 약 45시간을 정릉4동에서 보내고 있는 20대이다. 인터넷, 디지털, 정보의 가치만 배웠는데, 성북구에서 일하며 지역문화의 가치를 새롭게 배우느라 고군분투 하고 있다. 현재 성북구립도서관에서 병아리 사서로 근무하고 있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9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7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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