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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Nov 06. 2017

17717,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보는 사이

[9호] 우리동네 무중력지대|글 장혜영

  성북동 177-17번지에 위치해 이름 붙여진 문화 공간 ‘17717’, 오월에 만났다는 고양이 오월이가 있는 한옥 카페 ‘희섬정’, 성북동 주민들의 모임 공간 ‘동네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의 구심점이 된 17717은 특정 공간이라기보다 성북동을 중심으로 예술로 소통을 꾀하는 하나의 기획 집단이다. 이들은 흥미로운 콘텐츠와 다양한 시도가 공간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공간을 채운다고 입을 모았다. 작품으로 꼭 남기지 않아도 잡담하며 흘러가는 시간도 남을 수 있으며, 일상의 사건도 예술과 멀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17717은 조용한 갤러리보다 놀이터가 되고 싶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모여 장난치고 사람들이 붙고 늘어나면서 어느새 놀이가 만들어지는 놀이터, 누구나 와서 장난치고 언제든지 자유롭게 와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공간. 다만 그 공간이 문화가 쌓이는 터전과 같아서 이들은 공간을 아꼈다. 이들이 공간 같고, 공간이 이들 같아서 나는 17717이 친구처럼 느껴졌다. 매일 만나는 건 아니지만 없으면 인생이 삭막해지고 마는 친구 같아서 그저 고민은 무엇인지, 요즘 어찌 지내는지 묻게 되었다.



아직, 남아있다

“성북동을 많은 사람들이 거쳐갔고 흘러갔지만, 몇 년 동안 떠나지않고 계속 남아있는 사람은 제 또래 중에 이 사람들밖에 없는 거죠. 동네에 오랫동안 계속 있다는 것, 그게 지금까지 관계가 이어질 수 있었던 중요한 동력이었어요.”
- 동네공간, 김기민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세 사람이 만났다. 문화공간 ‘17717’을 운영하는 김선문 씨는 한국적인 것을 찾아 성북동으로 왔고, ‘동네공간’을 운영하는 김기민 씨는 함께 차를 마시는 시간이 좋아서, 한옥 카페 ‘희섬정’을운영하는 송나 씨는 판소리를 배우러 처음 동네에 들어왔다. 선문 씨가 찾은 ‘한국적’이라는 것은 오래된 것들을 애정하는 마음이다. 그는 물건 하나 하나가 수많은 고뇌 끝에 만들어진 완성도있는 물건들인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쉽게 버려지는 모습에 쓸쓸함을 느꼈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공간들을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태원에서 동네를 떠나가는 작가님의 방을 얻어 ‘초록방’을 만들었고, 성북동에서는 버려진 옥상을 발견하고 ‘초록옥상’이라는 예술 모임 공간으로 일구었고, 동네주민분의 요청으로 지하 창고로 닫혀있던 곳을 갤러리로 바꾸어 세번째 문화 공간 ‘17717’을 열었다. 그리고 2013년 ‘성북동천’이라는 지역 주민 모임을 만들면서 자신과 같이 동네에 살고있는 기민 씨를 만났다. 기민 씨는 마음맞는 사람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티 타임이 좋아 홍차전문점 ‘티티카카’를 성북동에 열었다. 하지만 영리 활동과는 방향이 맞지 않아 카페를 접고 모임의 기능만을 살려 ‘동네공간’이라는 지역 공간 플랫폼으로 재탄생시켰다.


  이들은 함께 마을 잡지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공간을 넘어 성북동의 청년 예술 공동체들과 연대하며 지역 중심으로 기반을 넓히게 되었다. 삼선동의 한옥 카페 ‘희섬정’을 운영하던 송나 씨도 합류해 지역의 공간으로, 지역 주민들과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17717의 기획으로 일요식당을 희섬정에서 운영하게 된 것. 창업을 하고 싶거나 음식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공간을 개방해 일요일, 하루 식당을 열어볼 수 있도록 했다. 송나 씨는 지난 활동을 돌아보며 “매일매일 그냥 의미없이 지나가는 것 같은데 어느새 쌓여 있는 것들이 신기해요. 거기에서 만나게되는 인연들이 좋고요.” 라고 말했다. 이들의 지난 경험처럼 공간의 모양과 쓰임은 그 곳에 모인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보다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어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우리는 쾌적한 공간보다 함께 하고자 하는 다정한 마음 속에 머물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오래된 책과 같이

“한 권의 책을 구성하는 여러 지면을 디자인할 때, 글자와 사진 혹은 그림의 요소를 어떻게하면 서로 어울리며 보기 좋게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한장 한장 정성들여 책을 만들게 되는데요. 이 원리를 고스란히 공간에도 적용해서 디자인할 요소를 사람으로 대치하여 생각하며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데 모여 어울리도록 할 때 어떤 새로운 생각을 펼쳐낼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사람들을 이어주게 되는데… 이러한 생각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지역으로도 확장되면서 마을 안에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 17717, 김선문


  문화 공간 17717은 공간을 중심으로 물리적으로 구획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낮과 밤으로 나누어 낮 시간대에는 청년 미술 작가들의 전시를 펼쳐보이고, 동시에 밤 시간대에는 요일별로 만든 문화 프로그램들을 진행한다. ‘월요약국, 수요책방, 목요극장, 토요산책, 일요식당’으로 라임을 맞춘 프로그램들은 사실 프로그램 이전에 오랜 관계, 우직한 사람들이 있었다. 월요약국의 경우, 동네에서 약국을 하는 약사 주민이 찾아와 자신도 무언가 나누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해왔다.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어떤 것을 잘하는지, 또 어떤 꿈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1년의 시간 뒤에, 동네에 사는 약사가 동네 주민이 궁금해하는 건강에 관한 물음에 답해주는 ‘월요약국’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나왔다. 피로와 스트레스에 대한 이야기, 면역력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먹을 영양제를 못 고르는 사람들을 위한 비타민에 대한 이야기 등 상담인듯 상담아닌 친근한 수다의 시간으로 풀어냈다. “저희 프로그램에 몇 번 오셨던 분인데 원래 다른 일정이 있어서 못 온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날 회사에서 털리고 나서 약속된 일정을 해낼 에너지가 없어서 취소하고 집으로 왔대요. 집에 와서 밥 먹고 마음 추스리고, 월요약국 행사가 집 근처라서 부담없이 왔다면서, 집에서 걸어서 5분 안에 올 수 있는 곳이 있어서 너무 좋다고 끝나고 가시면서 이야기하셨

는데... 이 분의 얘기가 활동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기민 씨는 이렇게 17717이 가까운 거리에서 상처입은 마음을 보듬어주고 따뜻한 에너지를 주는 모임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수요책방은 선문 씨가 2009년부터 수집한 ‘뿌리깊은 나무’ 잡지를 읽는 모임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고(故) 한창기 선생이 1976년 3월에 발행한 잡지로, 한자 표기와 세로쓰기가 일반적이던 시대에 한국 최초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편집을 한 획기적인 잡지였다. 선문 씨는 창비에서 출판한 ‘특집! 한창기’(저자 강운구) 책을 읽다가 편집자의 말에서 “한창기의 생각과 ‘젊은 그들’의 생각이 이 책을 통해 조우하여 사랑을 나누기를 바랐다. 그것이 폭발적 사랑이어서 장차 ‘소생’을 낳기까지 한다면 경사스런 일일 것이다.” 라는 문장이 가슴에 남았고 그 ‘소생’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전국의 헌책방과 경매 사이트, 중고물품 거래 사이트를 뒤져 ‘뿌리깊은 나무’ 전권(53권)을 수집하고 2013년도부터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4년부터는 읽는 방식을 넘어 ‘뿌리깊은 나무’의 ‘그는 이렇게 산다’ 코너에 나온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보기도 했다. 또한 매해마다 전시를 열어 ‘뿌리깊은 나무’가 전하고자 했던 문화 정신을 나누고 시민들이 잡지를 만나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016년 전시에서는 17717의 공간 안에 온돌 마루를 만들고 방석을 깔아 잡지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찬찬히 읽어볼 수 있도록 했다. 이밖에도 ‘인디서울2016’과 함께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목요극장’, 성북동 구석구석을 탐방하며 야생화를 찾아보고 그림과 사진으로 남기는 ‘토요산책’을 진행했다. 17717은 ‘뿌리깊은 나무’가 그러했듯, 한 사람의 기획을 넘어 공간 밖으로 시간 너머로 새 가지를 뻗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매처럼 남은 프로그램들과 이곳에 들러 새로운 마음을 다지며 돌아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확증한다.



진득함이라는 무게가 지탱하는 것들

“거대 담론 못지않게 우리가 일상 속에서 발견한 소소하고 하잘 것 없는 것들이 지닌 가치를, 그리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책자로 찍어내어 돌려 읽는 행위가 뜻하는 바를 우리는 확신한다. 이 잡지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 잡지를 만든 우리의 삶은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 잡지를 읽는 분들의 삶이 조금은 더 따뜻해졌기를 소망한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8호 편집 후기 중에서


  성북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성북동천’에서는 2013년도부터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는데, 기민 씨는 편집위원장으로 선문 씨는 디자이너로 함께하고 있다. 식당, 카페 등 주민들이 쉽게 이용하고 방문하는 공간들이 배포처인데, 배포처마다 ‘성북동천’ 글자를 새긴 나무 현판을 제작해 달았다. 선문 씨는 ‘어떻게 하면 성북동의 모든 가게 앞에 보기 좋게 어울리며 잘 보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두 달동안의 많은 착오와 고민을 거쳐 만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선문 씨가 고민을 자처하는 이유가 뭘까? 그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걸 알게된 것 같아요. 이곳에 와서 활동하면서 함께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그 느낌을 받은 게 제일 소중하지않았나...” 라고 답했다. 실제로 그가 전시를 할 때면 주변 식당에서는 돗자리를 쓰라고 내어주시고, 주민분이 오래된 가구를 빌려주시고 전시 후에 선물로 주시기도 했다. 17717이 공간을 새롭게 조성하자 건물을 관리하시는 선생님께서도 여는 행사 때,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라며 떡집에서 떡을 맞추어 보내오며 마음을 전해왔다. 그렇게 선물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을 동네 안에서 알게 되었다는 것, 선물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 애정을 가져야하는 고민이 생긴 이유다.


“사람들에게 공간은 내 마음과도 같은 방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만큼 애착을 가지고 가꾸니까요. 그래서 폐쇄적이기도 해요. 폐쇄적이기 때문에 개방적일 수 있는 거고요. 폐쇄적이라는 건 누구나 들어올 수는 있는데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는 없는. 서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런 관계없이 쓰고 싶으면 스타벅스에 가면 되겠죠.” 선문 씨는 누군가의 공간에 발을 딛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오는 일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오는 것 자체가 안부를 물으러 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기억에 남는 사람에 대해 묻자, 기민 씨는 “한번 오고 안 오는 사람은 영원히 기억을 못하지만, 또 오는 사람은 항상 기억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들은 공간을 운영하며 사람의 ‘진득함’에 집중하게 되었다. 공간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많은 사람이 오고가지만 그 가운데 진득하게 공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찾아오는 사람, 그 사람들의 진득한 마음에 정말 고마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진득함’이란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무게를 잡고 있는 공간의 성질과 닮았다. 기민 씨는 “우리가 계속 있어야 진득한 사람도 만나는 건데, 우리가 사라지게 되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되잖아요. 계속 떠돌고 부유하는 식으로는 지속될 수 없고 그게 안정이 되어야 그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도 안정된 바탕 안에서 활동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사라지지않기 위해서는 부동산밖에 없구나. 빚을 내서라도 건물을 사야 하는건가 고민하게 돼요.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까요.” 라고 말했다. 사람이 그곳에 머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경치가 좋아서, 예술가가 많아서, 조용해서, 맛집이 많아서 등등.

  그 가운데 이들이 이곳에 머무는 이유는 바로 여기가 터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사는 동네,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 터전을 지키고 싶어서 모이는 것이 아닐까.


※ 이 글은 「2016청년활력공간 우리동네 무중력지대」 인터뷰 사례집에 실린 글입니다.




장혜영은 온몸으로 쓰고 싶은 사람이다. 삶으로 메시지를 쓰고 싶어 캠페인을 만들고 글을 쓴다. 마음에서부터 환경의 변화가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에코 라이프 매거진〈green mind〉를 창간했고, 장애를 만드는 건 사회적 환경이라는 생각으로 보행약자를 위한 〈특별한 지도 그리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9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7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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