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꿀차

밖의 삶

아니 에르노

by 성은
XL (27).jpeg

삶을 샅샅이 해부하는 듯한 아니 에르노의 책은 한 문장씩 꼭꼭 씹어 읽게 된다.


본문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폭탄 테러 발생. 다섯 명 사망, 다수의 그림 훼손, 그중에는 조토의 작품도 하나 포함됨. 다 같이 입을 모아, 추산이 불가능한 돌이킬 수 없는 소실이라고 외침. 사망한 남녀노소가 아니라 그림에 대한 말. 그러니까 예술은 생명보다 더 중요하고 15세기의 성모화가 어린아이의 몸과 숨결보다 더 중요하다. 그 성모화는 여러 세기를 지나왔고, 미술관을 찾아오는 수백만 관람객이 여전히 그 작품을 보면서 기쁨을 느낀다면 사망한 아이는 아주 소수의 사람에게만 행복을 안겨 줬고, 어쨌든 그 아이는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예술은 인간보다 위에 놓인 그런 것이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감각은 우리 안에 있지 않다. 그 감각은 밖에서부터, 자라나는 아이들, 떠나가는 이웃들, 늙어 가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로부터 온다.
오늘 몇 분 동안, 하나같이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마주치는 모든 이를 보려고 애써 봤다. 그 인물들을 꼼꼼히 관찰함으로써, 마치 내가 그들을 만지기라도 한 듯, 갑작스레 그들의 삶이 내게 무척 가까워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그런 실험을 쭉 밀고 나간다면, 세계와 나 자신을 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길 텐데. 어쩌면 더는 자아라는 게 남지 않을 텐데.
어머니가 생산하는 텍스트는 딸에 의해 체로 치듯 검토되고 불만, 권태의 신호라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공포를 자아낼 만한 악착스러움으로 단죄되는데, 딸은 처벌받지 않기에 자신을 세상에 낳아 준 여자를 쉽사리 박해하는 것으로 그러한 불만, 권태를 해소한다.
몇몇 지식인들의 주장, <수치가 우리 모두를 조여 온다>. 그들이 틀린 것이, 먼 곳의 현실은 수치심을 불러오지 않는다.
하루 날 잡아, 여러 개의 전철역 벽마다 표어와 함께 나붙은 포스터들을 전부 다 기록하기. 현재의 두려움과 욕망, 상상의 실재를 정확하게 붙잡아 두기 위해서. 기억이 담아 두지 않는 - 혹은 담아 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 현재 역사의 기호들.
다이애나의 죽음은 운명의 부당함에 대해 눈물 흘리는 것 말고는 다른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 죽음은 위안을 준다. 알제리에서 참수당한 사람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다는 수치심을 안겨 준다.
아이는 얌전히 있게 단속하기 어려운 서너 살짜리다. 대학생들은 점점 넌더리가 나는 모양이다. 바로 그 특정 순간에 문화 차이, 관용에 대해 그들이 읽고 배웠던 모든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쩌면 철학은 현실 세계에 대한 이념 세계의 우월함이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에게는 독서를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그들의 생각을 더 공고히 해줄지도 모른다.
질문을 받은 프랑스인 중 42퍼센트가 <아랍인이 너무 많다>라고 응답한다. <인종 차별적 발언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이며. <아랍인이 너무 많다>라는 문장이 실제로 뇌리에 남는 유일한 문장이다. 아랍인 대신 <유대인>을 넣어 본다면, 1999년과 1939년 사이에 차이가 크지 않음을 알아차리리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맡겨진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