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인체유전학을 줄여서 '인유'라고 하듯이, 미국에서는 학정번호로 과목을 지칭했다.
Stochastic Processes는 STAT 433, Neuroanatomy Laboratory는 MCB 460이었다.
통계학 부전공을 마무리하기 위한 STAT 수업 2개, 정신의학에 관심이 있어서 신청한 MCB와 PSYC 수업 각 1개, 한국에서 들을 기회가 없었던 ART 수업, 마지막으로 운동을 하기 위해서 신청한 KIN 수업이 들어간 시간표가 완성되었다.
부전공을 끝내려면 꼭 이번 학기에 전공과목 2개를 이수해야 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임무는 통계학 과목에서 무사히 살아남는 것이었다.
내가 신청한 과목은 Stochastic Processes이라는 확률과정 수업과 Statistical Modeling I이라는 회귀분석 수업.
교수님과 학생들 모두 STAT 433과 STAT 425라는 학정번호로 불렀다.
STAT 433 교수님은 자신을 알렉스라고 부르라며, 수업 중에 농담도 많이 하시는 유쾌한 분이셨다.
그런데 말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상상했던 명료한 발음이 아니라, 군데군데 얼버무리면서 우다다다 쏟아져 나오는 영어에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잘 정리된 강의안을 찬찬히 읽으니 내용이 이해되기는 했다.
나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다음 수업으로 향했다.
STAT 425 수업에서는 40명 정도의 학생들이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한국에서는 절대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마치 늘 그런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앉은자리에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학년과 전공을 말하고 교수님께서 코멘트를 하셨다.
나를 제외하고 전부 4학년이나 대학원생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학정번호 앞자리가 4로 시작하는 수업들은 4학년과 대학원생 대상이었다.
신청한 수업 중 3개가 400번대라는 사실이 떠올라, 다른 수업으로 바꿔야 하나 몇 초 동안 고민하는 사이에 내 차례가 되었다.
미국은 한국과 다르게 학부를 졸업한 뒤 의학전문대학원에 가기 때문에, 의예과라는 전공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학전문대학원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보통 생명과학을 전공하면서 Pre-med 트랙을 밟는다.
그래서 나는 통계학과 뇌과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수님께서 반가워하시면서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이 통계학을 공부하고 있으니 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에도 각자 분야의 지식을 많이 활용하면 좋다고 하셨다.
이론과 실습을 모두 중시하는 수업이라 기말 과제로 팀 프로젝트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수업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내 앞자리에 앉은 학생은 수업을 바꿀 생각인지 노트북 화면에 수강신청 사이트를 띄웠다.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했지만, 이런 도전을 원해서 미국까지 오지 않았던가.
한국에서도 영어 교재를 쓰며 영어 강의를 들었으니, 미국에서는 옆자리 학생들과도 영어로 말해야 한다는 점만 다를 것이다.
고통이 있는 곳에 낭만도 있는 법이라고 믿으며, 낭만을 쟁취하기 위해 마음을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