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읽으려고 다운로드하는 전자책들은 보통 한국 현대문학이다.
그중에서도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단편집을 고른다.
그런데 <각각의 계절>은 일곱 편의 단편소설들이 하나의 큰 흐름 아래 묶여 있었다.
'다시 쓰기'를 통해 과거를 재인식하고, 절망적이었던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인물들이 너무나 친밀하게 느껴졌다.
요즘 트라우마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회복은 과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영향을 받는 현재를 바꾸는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내가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
지나간 아픔과 후회, 절망을 새로운 이야기에 엮어 넣을 때, 미래완료처럼 보였던 삶을 비로소 현재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본문
대성리나 강촌 같은 데 가서 고기를 구워먹자고, 술 먹고 바로 돌아오기 그러니까 하룻밤 자고 오면 어떻겠느냐고.
마침 대성리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에도 대성리가 등장해서 신기했다.
그런데 주인공은 결국 강촌으로 갔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난 그냥 과정이 재미있어. 장면이 하나 있으면, 관객들은 쓱 보고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그걸 쓸 때는 거기 들어갈 배경, 인물, 구도, 제스처, 대사 그런 걸 하나하나 상상하면서 다듬어가야 되거든. 빈칸을 메우듯이 차근차근 해나가는 그 과정이 난 좋아. 그러면서 알게 되고 느끼게 되고 경험하게 되는 게 너무 좋아.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은 의젓한 방어의 멘트도 아니고,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고 윽박지르는 강요도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어디로든 들어는 왔는데 어디로 들어왔는지 특정할 수가 없고 그래서 빠져나갈 길도 없다는 막막한 절망의 표현인지도.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다는 말은 미안할 방법이 없다는, 돌이킬 도리가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캄캄한 어둠 속에 누워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다보면, 그래서 기억해내려는 무언가가 어슴푸레 떠오르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딱 그만큼 현재의 내 모습도 어슴푸레, 마치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대상처럼 거리를 두고 그 실루엣을 드러내는 듯하다.
지금도 고개를 못 돌리는 건 아닌데 무서워서 못 돌아보는 거잖아. 경추가 빙빙 돈다고 돌아볼 수 있을까?
난 뭘 주장하고 누구랑 싸우고 뭘 얻어내고 그런 걸 못했어. 그러다 보니 힘이 들었겠지. 아무것도 못 바꾸고 아무것도 안 바뀌니까 도망치고 싶었겠지.
사랑하는 게 왜 좋고 기쁘지가 않아?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는데, 미워하면 되는데, 왜 우린 사랑을 하고 있어? 왜 이따위 사랑을 하고 있냐고. 눈물도 안 나오고 숨도 못 쉬겠는, 왜 이런, 이런 사랑을 하냐고.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그는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는가.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학대의 사슬 속에는 죽여버릴까와 죽어버릴까밖에 없다. 학대당한 자가 더 약한 존재에게 학대를 갚는 그 사슬을 끊으려면 단지 모음 하나만 바꾸면 된다. 비록 그것이 생사를 가르는 모음이라 해도.
해설
반드시 찾아오게 될 미래가 이미 현재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 그 미래는 너무나 피하고 싶은 것인데도 그것이 현재의 시간 속에 끼어들어 와 있는데도 그것을 결코 건드리거나 변경할 수 없다는 것, 아직 오지 않은 그 고통스런 미래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으로 현재 안에 이미 끼어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현재의 현실인 것처럼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
다시 쓰기가 반복되는 저 내러티브들의 밑바닥에는 '다시 쓰기 그 자체'를 정당화하고 그것을 삶을 밀고 나가는 힘으로 인정하고 활성화하려는 의지가 꿈틀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완료'를 '미완료', '미결정'으로 되돌려놓으려는 의지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단 한 번을, '반복'과 '다시'의 되돌아오고 되돌아가는 흐름 속에서 고쳐 쓸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의지가. 그러니까 영원회귀의 의지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인간의 삶이 오직 한 번뿐이며 결코 되풀이될 수 없기 때문에 한없이 가볍다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일이 실제로 반복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과거는 우리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재생되며, 그것이 다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간다. 따라서 기억을 도돌이표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되풀이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변주해야 한다. 과거로 끈질기게 회귀시키는 달 세뇨가 있더라도 우리는 코다를 적어내려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의 삶 속에서 잊고 있던 과거 사건들과 동일한 상황을 찾아내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니까.
음표들이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더라도 모티프는 종종 다시 등장한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다르다면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마디들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