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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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청소년기 - 초기 청년기의 문제를 두고 사회는 별것 아니라고, 한때의 것이라고, 가볍게 지나가도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바로 거기에 저항하고 싶었다.
또 자신에게 상해를 입히는 표면적 행동이 사실은 계속 살아가기 위한 행동일 수 있다는 해석은 자해가 많은 부분 고통스러운 정서를 조절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현대적인 이해와 일맥상통한다.
나는 정체 모를 불편한 감정에 이름을 붙여 잘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설명되지 않는 불편감보다는 원인과 대책이 확실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그동안 내가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속해 있었다고 말해 줘요. 완벽하진 않아도 적어도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잖아.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여전히 자신에게 '알맞은 이름표'가 붙여지기를 열망하는데, 이때 그가 원하는 것은 이름표를 가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혼자라는 느낌에서 벗어나며, 궁극적으로는 문제 자체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자해를 거듭하는 것은 스스로를 해치는 능력을 연마하는 것과 같다.
만약 어떤 특정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 자해에 더 취약하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특정 조건을 가진 사람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거나 이미 그런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무력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을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정말로 싫어하게 되는 순간이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거나 자신이 실패 덩어리라고 느껴지는 순간에는, 고통을 마땅히 겪어야 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의 근간은 매우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군가가 옆에 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선택을 해도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어버리게 되는 우울한 뫼비우스의 띠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생산적이지 못한 논의를 반복하느라 도돌이표의 악순환에 빠지는 것처럼.
빅터 프랭클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 자신이라는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을 안고 가면서도 자신이 미처 다 조절할 수 없는 외부 세계의 파괴적인 영향력을 겸허하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라는 질문 앞에 선 사람은 상대에게 자신의 의도를 납득시켜야 하고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나는 임상심리전문가이지만, 만약 자녀가 자해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아마 나는 속이 상해서 울 것 같다. 내가 뭔가를 잘못했나 싶어서 자책하거나 미안해할 수도 있고, 어쩌면 내 자녀나 자녀의 친구에게 화를 낼 수도 있다.
문신을 하든 하지 않든, 상처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보이게 둘 것인지, 상처 부위를 가리는 옷을 입을 것인지, 지울 것인지 또는 남에게 자해를 하고 있거나 했다는 사실을 말할 것인지 등의 사후 관리는 자해를 했거나 하는 사람이 꽤 오랫동안 겪는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이다.
중독 이야기가 어둠이라는 연료로 달린다면, 회복 이야기는 흔히 서사적 느슨함, 건강함이라는 따분한 영역, 눈을 뗄 수 없는 불꽃에 딸린 지루한 부록으로 여겨진다.
이 얘길 먼저 꺼내는 것은, 타당화가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길 바라서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그 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인데, 왜냐하면 누군가의 감정에 공감하려면 적어도 그와 같은 혹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자신의 어떤 부분과 접촉해야 하기 때문이고, 어느 정도는 자신도 그 고통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며, 대부분의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고통을 거부하고 타인의 고통 안에서 "그렇지만 적어도 넌 ~하지는 않잖아"라든가,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네"처럼 그나마 희망이 있어 보이는 부분이나 좋아 보이는 부분들을 짚어주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