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꿀차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by 성은

소설에서 스토리보다도 형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해 준 작품이다.

고전으로 꼽히는 세계 문학 작품들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스토리는 대부분 막장이다.

<마담 보바리>는 보바리 부인이 샤를 보바리와 결혼한 이후 남자 두 명과 바람을 피우면서 재산을 탕진하는 이야기이며,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 카레니나가 바람을 피우다가 자살하는 이야기이다.

다른 작품들도 그다지 복잡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롤리타>도 줄거리만 봤을 때는 저급한 포르노 소설이 아닌가 싶었고, 걸작의 반열에 오른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을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로 묘사한 이유는 무엇인가?

소설은 언어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서술되는 형식, 인물의 심리가 변화하는 논리적 전개, 배경의 치밀한 묘사, 그리고 문장의 아름다움이 소설의 심미성을 이룬다.

그래서 읽고 또 읽어야 하는 책,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 고전이다.

언어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나보코프는 책 속에서 수많은 언어유희를 비롯하여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며, 다른 고전을 절묘하게 인용하기도 한다.

나보코프의 언어를 설명한 각주들을 보면서, <롤리타>는 반드시 원문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러시아어 작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보코프가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영어로 쓴 책이고 책의 배경도 미국이다.

언어의 아름다움을 각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번역서의 한계를 느끼며 읽었기 때문에 본문에서 인용할 부분은 많지 않다.



본문

finis, my friends, finis, my fiends

아주 가벼운 구름 하나가 좌우로 팔을 벌린 채 조금 더 묵직해 보이는 구름을 향해 다가갔다. 그쪽에 모인 구름들은 하늘에 글씨를 쓰듯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왠지 마음에 드는 절벽 쪽으로 접근할 때 발 아래 펼쳐진 골짜기 사이에 자리를 잡은 조그마한 광산촌에서 문득 아름다운 화음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붉은색이나 회색 지붕을 덮은 건물들, 그 사이로 이리저리 지나가며 기하학무늬를 그려내는 찻길들, 동글동글 부풀어 오른 초록색 나무들, 뱀처럼 구불구불한 시냇물, 광석처럼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시립 쓰레기장, 그리고 마을 너머에는 밝고 어두운 여러 빛깔로 조각조각 수놓은 퀼트 같은 들판, 그 사이로 종횡무진 뻗어나간 도로들, 더 멀리 저쪽에는 숲으로 뒤덮인 거대한 산맥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온갖 색상이 말없이 환호하는 듯한 - 여러 색상과 명암이 사이좋게 어우러져 즐거워하는 듯한 - 풍경보다 더 화사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경치보다 더 밝고 꿈결처럼 아름다운 것은, 귀에 들리는 화음이었다.

험버트 험버트가 아이들이 노는 소리를 듣는 장면의 일부이다. 나보코프가 가장 공들여 묘사한 장면 중 하나라고 한다.

작가의 말

가면을 뒤집어쓰는 것은 나 자신을 배반하는 짓이라는 깨달음 때문인데, 내가 이 결정을 후회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믿는다.

나의 개인적 비극은, 물론 남들의 관심사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내가 타고난 모국어, 즉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한없이 다루기 편한 러시아어를 포기하고 내게는 두 번째 언어에 불과한 영어로 갈아타야 했다는 사실이다. 모국어를 사용하는 작가들은 마술사처럼 연미복 뒷자락을 펄럭이며 자기만의 절묘한 방식으로 전통을 뛰어넘을 수 있건만 나의 영어에는 그런 - 이를테면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거울, 검은 벨벳 배경막, 혹은 함축적인 연상이나 전통 같은 -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모국어로도 좋은 작품을 쓰기 어려운데 외국어로 걸작을 써낸 작가들은 얼마나 대단한가.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을 읽고 엑소포닉 작가들에 관심이 생겼는데, 나보코프뿐만 아니라 밀란 쿤데라나 사뮈엘 베케트 등 생각보다 많은 작가들이 있다.


나보코프의 말은 "모국어보다 습득해서 배운 언어가 스타일 없이 쓸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영어와 프랑스어를 번갈아 쓴 베케트와 비슷하지만 외국어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다. <고도를 기다리며>도 읽어보고 싶다.


고전 중에 프랑스어로 쓰인 작품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원서로 읽는 것이 꿈인데, 나중에 베케트와 플로베르, 카뮈의 책들도 원서로 읽어보고 싶다.

해설

실제로 나보코프는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소설은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아니면 읽고 읽고 또 읽든가요."

소설을 읽는 나보코프의 두 가지 방법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외에는 최근에 다시 읽은 작품이 없을 정도로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지 않는 편이었는데, 요즘 읽고 또 읽는 것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다.


처음 읽었을 때와 다시 읽었을 때가 다르고, 번역서와 원서로 읽었을 때가 다르다. 매번 읽을 때마다 그 사이에는 시차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책을 읽는 내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것들을 알아챌 수 있다.


예를 들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처음 읽었을 때는 <마담 보바리>를 읽기 전이었지만, 두 번째로 읽었을 때는 비로소 마담 보바리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수많은 인용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롤리타>에도 <마담 보바리>가 인용되는 것을 보고, 현대 소설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마담 보바리>가 문학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기도 했다.

옮긴이의 말

나보코프가 험버트의 방어 심리를 의식하여 무수한 상징과 비유를 사용하면서 많은 문장이 한껏 모호해졌다. 그래서 원문 자체의 모호함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명료한 문장을 찾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원문의 의미나 뉘앙스를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대로 보존하려는 시도였다. 나보코프의 문장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표현조차도 교과서처럼 정확하고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나보코프의 문장에 대한 하나의 증언으로 남겨 둔다.

앨프리드 아펠은 이렇게 단언했다. "전 세계의 속독가들이여, 유념하라! <롤리타>는 여러분을 위한 책이 아니다."

속독하는 습관을 고치려고 요즘 책을 일부러 천천히 읽고 있다. <롤리타>는 저절로 천천히 읽게 되는 책이어서 5일에 걸쳐서 읽었다. 빠르게 읽히지 않는 책을 한 페이지씩 곱씹으며 읽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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