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극장에서는 그래.
스크린향이 있다는 걸 아니. 기묘한 냄새야. 우린 쿠션 달린 의자가 아니라 계단에 꿇어앉아 있는 것 같아. 한 칸씩 낮아지거나 높아지면서. 누군가는 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아래 있는 머리들은 볼링공처럼 보이네. 밀어내면 멀리 굴러가버리는 것들.
엔딩크레디트가 끝없이 올라가는 티셔츠를 입고 싶어.
영사기의 불빛을 내 목젖과 눈꺼풀 위까지 쐬어도 좋다.
이상하지. 불 꺼진 자리에서 너의 이름을 읽는 일은 왜 언제나 어려울까.
너는 어두울수록 맑아지는 게 있다고 했지만 나는 컴컴한 공간에서 매번 어리숙했다. 숨쉬는 걸 잊어버려서, 나중에는 귓가에 다른 사람의 숨소리가 닿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나는 어둠 속에 하얗게 떠오른 너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이런 걸 사람들은 시네마라고 부르는 걸까.
다리와 팔이, 뜨거워서 만질 수 없는 가슴이 얼굴이 녹아버리고
그렇게 공중에 떠올라도 좋다. 발을 바닥에 붙이고 있으면, 누가 바라봐주나?
자전하면서 없어지는 불빛들
나는 누굴 만졌던 손끝을 기억하고 만다.
모두 떠나고 나면
흐트러지는 공간으로서 눈 뜨는
어둠이 있어
사라지는 눈사람처럼
시간은 처음의 모습으로 반짝이기 시작한다.
-장수양, <연말상영>
이제 단풍이 꽤나 많이 들어서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이 어우러져 있었다.
여전히 초록색이 많기는 하지만 노란 나뭇잎에 노란 햇빛이 닿아 부서지는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이곳에서의 가을을 기억하는 하나의 장면으로 남을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기분도 너무 좋고 날씨가 너무 좋아서 무작정 산책을 나갔다.
사워스 쿼드에 앉아 유튜브에서 가을 노래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시를 필사하니까 마음에 낭만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내 삶을 낭만으로 빼곡하게 채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는 왕복 6시간 당일치기라는 말도 안 되는 일정으로 시카고 여행을 떠났다.
기차로는 처음 가보는 것이었는데, 새벽 6시에 혼자 기차역까지 가느라 살짝 무서웠다.
그래도 자리 간격이 KTX의 2배 정도 되는 기차에 앉아 다리를 쭉 뻗고서 해 뜨는 모습을 보니까 낭만 있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의 대학교로 교환학생을 간 언니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각자 일행들과 2박 3일 동안 시카고 여행을 왔는데, 운 좋게 시간이 맞아서 셋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4시 기차를 타고 돌아가야 해서, 스타벅스 로스터리에서 잠깐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이 될 때까지 혼자 시카고 관광을 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매그놀리아였다.
너무 궁금해서 뉴욕에 있는 본점에 가려고 했는데, 추수감사절 여행지가 캐나다로 바뀌어서 시카고 지점에 가기로 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매그놀리아에서 바나나푸딩을 테이크아웃했다.
가게가 밀레니엄파크 근처라 공원에 앉아 푸딩을 한입 떠먹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빵이 달콤한 크림과 어우러져 입안에 가득 퍼졌다.
바나나 슬라이스도 가득 들어 있고 미국 디저트인 걸 감안하면 많이 달지 않아서 하루 종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금세 푸딩을 다 먹고서 공원을 빠져나와 리버워크를 따라 걸었다.
이곳에서 보는 시카고의 풍경은 언제나 멋있다.
시카고는 아름다운 건물로 가득 찬 대도시인데 강과 공원도 있어서 여유로운 분위기이다.
스타벅스에서는 아메리카노 한 잔도 다 못 마실 만큼 잠깐의 시간만 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언니들을 보니까 이곳이 미국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날 만큼 반가웠다.
가을의 낭만을 채워준 또다른 시간은 은조 언니 집에서 한국인 교환학생들끼리 음식을 해먹은 날들이었다.
할로윈에는 쿠키 믹스와 아이싱을 사서 할로윈 쿠키를 구웠다.
쿠키가 얼마나 커질지 모르고 대충 크기를 가늠해서 쿠키 도우를 잘랐다가 오븐 속에서 쿠키들이 달라붙어버리기도 했지만, 색깔을 섞은 아이싱과 마시멜로우로 아기자기하게 쿠키를 꾸미니까 소꿉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전에 과수원에서 사온 사과에 설탕과 시나몬가루를 더해 직접 필링을 만들어서 애플파이도 구웠다.
또다른 날에는 혜정 언니 생일을 축하하려고 다같이 저녁을 해먹었다.
신전떡볶이를 재현하기 위해서 카레가루와 후추를 구해 떡볶이를 만들고, 어묵탕과 순대볶음, 스팸마요컵밥도 만들었다.
이날 파티를 위해 한인마트에서 김부각과 약과도 샀다.
오랜만에 한인마트를 구경하며 비비고 만두랑 육개장, 호떡, 붕어빵, 비비빅 등 온갖 음식을 발견했다.
사고 싶은 건 많았지만 사 놓으면 다 못 먹을까 봐 섣불리 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방에 있는 음식을 다 먹으면 반찬을 사러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과제를 하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눈부신 가을을 낭만으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날들이었다.
인생은 저지르는 자의 몫이라고 하셨던 중학교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전에 읽은 소설에 나온 "해본 것은 더한다"는 말도.
망설이지 말자.
망설임을 넘어선 것들이야말로 나에게 정말 소중한 것들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자꾸 잊어버리곤 해서 자주 생각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