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창문 25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은 Nov 04. 2024

갈림길

샴페인 사람들이 가을에 많이 가는 과수원이 있다.

하루는 English Corner라는 미국문화체험 동아리에서 차를 태워 줘서 과수원에 다녀왔다.

바람이 많이 불고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가족 단위 방문객이 주로 보였는데, 어마어마하게 큰 늙은호박들을 수레에 싣고 가는 모습이 신기했다.

곧 할로윈이라 호박 랜턴을 만드나 보다.

과수원에서는 할로윈 소품이나 잼, 꿀, 애플파이도 팔고 있었다.

애플파이를 먹어보고 싶기는 했지만 일주일 내내 애플파이만 먹게 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대신 애플 사이다를 마셔봤는데, 시나몬 향이 강하고 미국 음료치고는 그렇게 달지 않아서 맛있었다.

그런데 점심으로 풀드포크 샌드위치를 주문하자 야채 하나 없는 버거를 줘서 다시 한번 충격받았다.

미국 음식은 아무리 많이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자취를 했다면 요리를 해먹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한식이 그리워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한인마트도 많고 레시피도 많으니까 말이다.

저녁에는 아이스링크장에서 피겨스케이팅 공연을 봤는데, 다시 한번 미국의 자본과 자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캠퍼스 내 아이스링크장에서 하는 동아리 자선 공연이었다.

아마추어라기에는 꽤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마지막에는 실제 선수도 나왔다.

그런데 아이스링크장이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장의 3배는 되어 보였다.

이런 아이스링크장이 대학마다 있다고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한국을 떠나온 날보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자 미국에서의 삶과 한국에서의 삶을 종종 비교해 보게 되었다.

사실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온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미국에서 어느 정도 살아보고, 미국 의사 국가고시인 USMLE를 본격적으로 준비할지를 결정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USMLE를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인생 계획이 많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본과로 진급하기 전에 미국에서 실제로 살아보며 더 오랜 기간 동안에도 살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미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만한 이유가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미국은 인종이 다양하기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에 민감해서, 일상생활에서 직접적으로 차별적인 말이나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종류의 무의식적이고 간접적인 뉘앙스가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가령 수업 시간에 백인 학생이 말하면 미묘하게 호의적인 분위기나, 대부분의 근로학생들이 히스패닉이나 아시아계 학생들이라는 점이 그랬다.

미국인의 정서도 한국인과는 달랐다.

극단적인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과 총기 소지가 합법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인에게는 자유가 매우 중요하다.

최소한의 규제 말고는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서로 배려하는 편이다.

어쩌다 길을 가로막으면 모르는 사람이어도 먼저 사과하고, 문을 열고 들어갈 때 항상 뒤를 돌아보면서 뒤따라오는 사람이 3미터 밖에 있어도 문을 잡아준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법인데,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한국인의 정서를 공유하는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게 감사할 만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미국으로 떠나는 이유가 있다.

학생회관만 한 다이닝홀이 4개가 있고,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장 3배만 한 아이스링크, 미식축구 스타디움 2개, 중앙도서관만 한 도서관 여러 개를 갖춘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캠퍼스만 보아도 미국의 자본을 알 수 있었다.

시카고로 여행을 갔을 때 노스웨스턴 대학병원을 보고도 놀랐는데, 한국과 차원이 다른 규모이다.

학문 분야도 다양해서, 내가 관심 있는 정신의학도 약물 중독과 식이 등 여러 가지로 세분화되어 있었다.

미국에 오기 전에는 막연하기만 했는데, 장단점을 구체적으로 알고 나니까 고민할 거리가 더 많아졌다.

아무리 기회의 땅이라고 해도, 모국어를 쓰며 가족과 친구들 곁에서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떠날 만한 가치가 있을지는 의문이라서.

견딜 수 없도록 보고 싶은 사람들과 당연하다는 듯 한글로 채워진 길거리, 겨울이 되면 호떡과 붕어빵을 파는 노점상들.

그렇지만 고민이 된다는 건 미국에서의 커리어가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뜻이겠지.

아직 몇 년이나 남은 일이니, 여러 갈래의 선택지를 마련해 놓아야겠다.

갈림길 앞에서는 고민을 해야 하지만, 고민할 갈림길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연구와 영어도 꾸준히 하면서 내 하루들을 쌓아가다 보면 차츰 길의 윤곽이 드러날 거라고 믿어야겠다.



이전 24화 수채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