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 후 갑자기 기온이 10도가 떨어졌다.
이제 문을 열고 숨을 들이마시면 폐 깊숙이 들어오는 쌀쌀하고 상쾌한 공기에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설레면서 패딩을 꺼내 입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미국은 어땠니 라는 질문에 한 문장으로 대답하고 싶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 다양성이 존중받으려면 모두의 자발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살기에는 한국이 편하지만 미국을 왜 기회의 땅이라고 하는지 알았어요.
정말 중요한 건 어디에 있는지보다 누구와 있는지라는 걸 알았어요.
한 문장으로 쉽사리 정의내리기는 어려웠지만, 그동안 뭘 했는지 나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과연 요약에 성공할 수 있을까?
한국에 돌아가기까지 남은 두 달 동안 계속 시도해봐야겠다.
벌써 한 학기가 절반이나 지나갔다니.
지금까지 지나온 만큼의 시간이 더 흐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시험이 끝나자 여유가 생겨서 야외 테라스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수박이 너무 맛있어서 순식간에 한 컵을 다 먹기도 하고, 하루는 요거트에 그래놀라랑 과일을 넣어먹기도 했다.
그런데 날씨가 쌀쌀해져서 그런지 한국에서 먹던 시장 먹거리들이 계속 떠올랐다.
떡순튀, 빈대떡, 오뎅, 물떡, 호떡 같은 것들.
쟝블랑제리 맘모스빵이 너무 먹고 싶었다.
빽다방 맘모스빵도.
찹쌀떡이랑 가래떡이랑 인절미, 약과, 그리고 곶감도 먹고 싶었다.
이쯤 되면 떡집을 차려야 될 것 같았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것은 단지 미국에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시험공부하기 싫을 때마다 책을 엄청 읽었는데, 미국에서 왜 한국 작가들 책을 읽나 싶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는 영미 문학만 주구장창 읽었다.
현재 있는 공간이 아닌 다른 곳을 그리는 것.
나아가려는 것이겠지.
그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이란 안 그러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절박함에서야 가능한데 그렇다면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닐까.
다행인 건 되도록 물러서지 않고 모든 상태를 기록하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아름다움이 있으면 아름답다고 썼다.
사랑이 있다면 사랑이 있다고, 잃어버리거나 비극과 직면했다면 슬프다고 썼다.
어리석었다면 고통스러울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용서할 수 없을 듯한 순간에는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썼다.
완전히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이 강제적인 고립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썼다.
우리는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며 상처 이후의 시간을 예비할 수 있다고.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붙드는 일, 삶에서 우리가 마음이 상해가며 할 일은 오직 그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를 견디고 책을 집어들었을 당신에게, 당신은 물을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묻기 위해 누군가의 곁에 서는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고.
견디는 것보다 더 나아갈 수 있는 어떤 상태의 이야기가.
- 김금희,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절박할 만큼 나아가고 싶었지만 나아감이 살아감을 앞설 수는 없는 일이다.
자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말고 때로는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곳에 온 신경을 모아보는 것도 좋겠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루하루의 기온이 어떻게 오르내리는지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수박이 맛있을 때는 그 달콤함을 음미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