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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은 Nov 15. 2024

처음부터 없는 것과 나중에 잃는 것

<구의 증명>을 읽고 나서 최진영 작가의 작품을 더 읽었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은 읽는 내내 슬프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읽을 때 어렴풋하게 보였던 스타일은 두 번째로 읽은 작품과의 교집합에서 어느 정도 드러난다.

작가의 세계가 어떤 색채를 가지고 있는지.

한없이 슬프고 또 슬프고, 그 속에서 행복하고 처절하게 행복하고, 그래서 더 슬프다.

***

결말만 보자면 어차피 우리 인생은 전부 비극이에요.

왜냐하면 다 이별하고 죽으니까.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은 없어요. 어떻게 영원히 그래요?

그렇다고 우리 삶을 통째로 불행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사는 동안 행복한 순간도 많잖아요.

그래서 죽음도 비극이 되는 거잖아요.

-최진영,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다시 살아도 그럴 것이다.

무관심하지 않고 열렬히, 포기하는 대신 포기하지 않고.

-최진영, <일주일>

***

작가의 말을 보기 전까지 <일주일>에 실린 세 단편이 각각 특성화고, 특목고, 일반고 학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3명의 주인공에게 모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주인공들의 모습이 3가지 틀에 맞추어져 있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정말로 "있을 법한" 이야기여서, 소름 돋도록 익숙해서 마음에 와닿았다.

수능의 계절이라 더 공감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있을 법하다고 해서 뻔한 것은 아니다.

익숙한 상황 속에서 느낀 각자의 마음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니까.

2년의 시간 동안 나는 얼마나 달라졌나.

나도 아직 청소년인 건 아닐까.

책의 말미에는 박정연이라는 청소년 작가의 에세이가 발문으로 실려 있었다.

이우중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관심이 생겼다.

다른 지역에서는 얼마나 알려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당이나 용인에 산다면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대안학교이다.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지만, 중학교 친구 중에서도 이우고등학교에 간 친구가 있었다.

글을 읽으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한 사람이 있구나.

헤맬 수밖에 없지만 헤맬 수 없었던 사람이 있구나.

***

그러니까 내가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내가 힘들다는 생각에 갇혀 있기 때문이었다.

인생에 찾아오는 잔잔한 진동에 크게 동요했던 거다. 

그게 싫었다.

별일 없어도 계속 바닥에 가까운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 게 싫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를 흔들기 위해서는 파도 정도는 필요했다.

파도 정도에 흔들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게 위로가 될까.

그럼 당신은 나보다는 덜 힘들까.

우리는 덜 힘든 삶을 보낼 수 있을까.

우리는 덜 힘들게 살려고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떠나고 싶을 때 떠나야 한다.

나는 원래 칠칠치 못한 사람이라 모든 걸 버리지 못하고 몇 개는 들고 돌아왔지만, 바다를 보고 왔다는 사실은 확실한 자극이 되었다.

내 삶이 크게 바뀐 건 아니어도, 엄청난 계기는 아니어도 당장 내일을 살아갈 작은 원동력이 되기 충분했다.

우리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니까, 그래서 사라지지 않는 거니까.

이런 날을 또 만날 수 있다면 견뎌내는 삶이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 믿음이 중요했다.

-박정연

***

이 책이 2021년에 나왔으니 아마 이분도 이제 성인일 텐데,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계신지 궁금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았던 시절이다.

처음부터 없는 것과 나중에 잃는 것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처음부터 없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팔꿈치를 주세요>에 수록된 <모린>을 읽고, 나중에 잃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살고 싶다, 하고 생각했다.

***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난 나중에 잃는 것을 선택할 거예요.

그건 두 세계를 살아보는 거잖아요.

어쩌면 새 세계인지도 모르죠.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

나는 나한테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고 싶어요.

-안윤, <모린>

***

내 사랑 넌 사랑이 없네

나의 반을 갈라 너에게 줄게

내 사랑 넌 그제야 웃네

내 남은 반을 갈라 너에게 줄게

또 웃어줄래

-윤지영, <My luv>

***

이런 사랑 말이다.

재거나 따지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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