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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꿀차

백의 그림자

황정은

by 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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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 명에 꽂히면 주구장창 그 작가의 책만 찾아서 읽는 습관 때문에 벌써 세번 연속으로 읽은 황정은 작가의 책이다.

문체가 좀 감상적인 것 같았지만 첫 장편소설이라 그런가 보다. 최은미 작가의 <아홉번째 파도>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작가의 문체가 작품에 따라 점차 변해가는 걸 보면 신기하다.

황정은 작가의 작품 중에서 내가 좋아할 것 같다고 민지가 말해준 책이었다. 소설의 내용, 구조, 문장, 상징들이 모두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게 정말 좋았다.

은교와 무재의 순수한 사랑, <디디의 우산>에도 등장하는 여씨 아저씨를 비롯하여 세운상가에서 전자제품을 팔거나 수리하는 상인들, 너무나 사소해 보이는 것들을 지나치지 않고 포착해내는, 사소하지 않게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좋다.

인물들에게는 저마다 그림자가 있다. 그들이 절망 속으로 젖어들어갈 때, 소설은 '그림자가 일어선다'고 표현한다. 고개를 든 그림자를 마주하는 순간은 제각각이며, 그림자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어둡고 끈질겨서 그냥 따라가버리고 싶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그림자 같은 건 모른 체하고 싶기도 하다. 서로 다른 모양을 지닌 그림자를 뭉뚱그려 뭉개기도 한다. 백 가지 그림자를 지나치지 않고 곁에 멈추어서는 것, 그리고 가만히 어루만지는 것, 그런 마음에 대한 소설이다.


본문

따라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소설의 시작에서 그림자를 따라가던 은교를 무재가 데리고 숲 밖으로 빠져나갔는데, 마지막에는 그림자 속에 잠기려는 무재를 은교가 이끌어낸다. 이토록 따뜻한 사랑.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다고 하면 몇시간을 달려 조개탕을 먹으러 가고, 잠이 오지 않는다 하면 늦은 밤에 찾아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고, 정전이 되면 전화를 걸어 혼자 어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이미 밥을 먹었는데도 같이 밥을 먹으러 가는 것. 한번도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 연인들이 그려내는 사랑의 모양이 이토록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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