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연년세세> 옆에 꽂혀 있어서 별생각 없이 빌린 책이다.
친구가 <연년세세>랑은 다른 느낌이라고 했는데 정말 달라서 조금 난해했지만, 황정은 작가 특유의 묘사가 좋았다.
역사적 사건이 많이 등장하고 기사나 책 인용도 많아서 내용은 어려운데, 술술 읽히는 문체라 신기했다.
혁명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역사를 바꾸었다고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혁명, 그렇지만 그 과정과 결과 속에서 누군가를 교묘하게 배제하는 혁명.
소설이 인용하는 실제 기사와 묘사하는 사건들은 그 당시 당연하다는 듯 소외당했던 이들에게 조명을 비춘다.
우리가 혁명으로 되살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아야 할 것들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본문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는 마음으로도 인간은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d를 이따금 성가시게 했던 세계의 잡음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행복해지자고 d는 생각했다. 더 행복해지자.
인간은 사물과는 달라서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을 수 있다고... 내가 언젠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적어도 들은 적이... 누군가가 없어져도 그를 기억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여기 없어도 여기 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냐? 사기를 치지 마라... 인간은 너무도 사물과 같이... 없으면 없어. 있지 않으면 없고 없으니 여기 없다...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의 마음은 턱에 있다고 d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턱이 아팠으니까. d는 종일 입을 다물고 있었고 때때로 피 맛을 느끼고 입을 벌렸으나 아무리 혀로 더듬어도 출혈은 없었고 다만 그때마다, 그때까지 자신이 얼마나 입을, 턱을 세게 다물고 있었는지를 알았다.
미래와 빤하게 연결된 현재, 이상에 이르지 못하는 실재, 비대하고 멋대가리 없는 외형, 시대의 돌봄을 받은 적은 거의 없지만 알아서 먹고살며 시대를 이루었고 이제 시대의 뒤꽁무니에 남은 사람들, 아 사기꾼들, 여소녀 자신을 비롯한 거짓말쟁이들, 그것도 조그맣고 하찮은 스케일의 사기밖에 칠 줄 몰라 여전히 보통 사람으로 여기 남은, 내 이웃들...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거나 움직일 때,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을 때, 나는 죽음을 느껴요. 매우 정지된 지금을요. 너무 정지되어서, 지금 바로 뒤를 나는 상상할 수 없고요 궁금하지도 않아요. 지금이라는 것은 이미 여기 와 있잖아요. 그냥 슥...
망한다고? 왜 망해. 내내 이어질 것이다. 더는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삶이. 거기엔 망함조차 없고... 그냥 다만 적나라한 채 이어질 뿐.
모르겠는데 실은 모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왜 함께 오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너무 하찮기 때문이라고. 나도 dd도 그리고 당신도. 우리가 너무 하찮아서, 충돌 한 번에 내동댕이쳐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왜 함께 오지 않았나.
어떻게든 오늘은 가고 내일은 온다. 사람들의 이름 옆에 그렇게 적어본다. 맨 처음 단어인 '어떻게든'에 줄을 여러 번 그어 지우고 나머지를 남긴다. 오늘은 가고 내일은 온다. 오늘은 어떻게 기억될까.
어떤 책을 남기고, 어떤 책을 버릴 것인가. 기준은 한 가지다. 두 번 읽고 싶은가?
왜냐하면 독서의 경험이란 앞선 삶의 문장을, 즉 앞선 세대의 삶 형태들을 양손에 받아 드는 경험이기도 하니까. 이 생각과 유사한 문장을 나는 최근 어떤 책에서 보았고 그 책의 저자는 아마도 롤랑 바르뜨였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민음사 2015)
우리가 무슨 관계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를 마중 가는 사람, 20년째 서로의 귀가를 열렬히 반기는 사람, 나머지 한 사람이 더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순간을 매일 상상하는 사람, 서로의 죽음을 가장 근거리에서 감당하기로 약속한 사람.
'상식적으로'에서 상식은 뭘까? 그것은 생각일까? 사람들이 자기 상식을 말할 때 많은 경우 그것을 자기 생각이라고 믿으니 그것은 생각일까. 아니야 common sense니까 세계에 대한 감이잖아. 그것이 그러할 것이라는 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해제를 쓴 정화열 선생은 상식을 '사유의 양식'이라고 칭하며 그것을 '감각에 바탕을 둔 사유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상식, 또는 공통감이란 아무래도 '생각'인 모양이고, 다시 그를 인용하자면 서수경에게 적용되었다는 '상식적으로'에서 상식은 본래의 상식, 즉 사유의 한 양식이라기보다는 그 사유의 무능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가 상식을 말할 때 어떤 생각을 말하는 상태라기보다는 바로 그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역시 생각은 아닌 듯하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다가,라고 말하는 순간에 실은 얼마나 자주 생각을... 사리분별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인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상식, 그것은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건 상식이지,라고 말할 때 우리가 배제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와 나의 상식이 다를 수 있으며 내가 주장하는 상식으로 네가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가정조차 하질 않잖아. 그럴 때의 상식이란 감도 생각도 아니고... 그저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는 것이고 저 이야기는 저렇게 끝나는 것이라는 관습적 판단일 뿐 아닐까.
황정은 작가는 늘 사람들의 건강을 비는 것으로 작가의 말을 맺어서 참 좋다.
모두 조금 더 건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