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친구가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영화를 추천해 주면서, 그 영화가 <연년세세>에 등장하는 것을 보고 찾아봤다고 했다.
그래서 <연년세세>를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황정은 작가의 소설을 읽는 건 세 번째인데, 그전에 읽었던 책들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 가정의 여러 구성원들에게 돌아가면서 초점을 맞추는 연작소설의 형식이라는 점이 독특했고, 차분하면서 담담한 묘사가 좋았다.
다른 작가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특유의 구체적인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본문
그 구간에서는 흐린 날 흐린 날씨를 볼 수 있었고 맑은 날 맑은 날씨를 볼 수 있었다.
이걸 볼 수 있다는 게 특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에서의 맥락과는 조금 다르지만, 지금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 말이다. 그 어느 때와 비교해 봐도 요즘 나는 예전보다 계절의 변화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는데, 그만큼 일상을 이어가는 모퉁이에 잠시 멈추어서 길가의 나무를, 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는 걸 느낀다.
식판 두 개가 올라간 식탁에 자리가 부족해 왼쪽 팔꿈치가 그림책 위로 올라갔다.
눈앞에 장면이 그대로 그려지는 이런 묘사가 너무 좋다.
그런 건 뭐 하러 봐, 거기까지 가서.
거기 있으니까.
그게 보고 싶어?
어.
왜 보고 싶어?
언닌 안 보고 싶어?
그게 왜 보고 싶어.
원하는 게 많을수록 그걸 만족시키는 어려워지지만, 하고 싶은 일이 많고 가고 싶은 곳이 많다는 건 사실 고마운 일이다. 그만큼 삶에 기대가 있다는 것이고 꿈을 꾼다는 거니까.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무엇이 사라졌는지 모르고 지냈다. 잃은 것을 잊은 것으로 해두었다. 그러면 그건 거기 있었다.
정말 없어졌을까 봐 무서워서 모르는 척하는 마음. 마주 보기가 너무 두려워서 있는 힘껏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는 마음을 알아서 안아 주고 싶다.
넘어질 것 같으면 뒤로 넘어져요 나 있으니까.
눈앞에서 진짜 죽고 다치는 것 같아, 볼 수가 없다고.
폭력을 가볍게 다루는 액션 영화를 정말 싫어하는데 그 마음에 공감해 주는 인물을 만나서 반가웠다.
차에서 내린 그가 구부린 검지로 원, 투, 스리 인원을 세고 오케이, 하고 말했다. 대화를 시도한 것은 아니고 혼잣말이 버릇인 것 같았다. 그가 뒷좌석에서 엄청나게 크고 긴 귀가 달린 토끼 인형을 끄집어내 그걸 트렁크에 쑤셔 넣은 뒤 탑승객들에게 그 속에 짐을 넣으라고 손짓했다. 한세진과 일행은 빨대 꽂힌 스티로폼 컵이 굴러다니는 뒷좌석에 실려 브루클린 숙소로 이동했다. 그들이 숙박할 호텔은 월트 휘트먼 파크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온 지역에 있었고 서울 모처의 넓은 대로변과 다를 것 없는 거리에 솟은 별 특징 없는 빌딩이었다. 한세진은 계피와 설탕, 바닐라를 섞은 밀가루 반죽 냄새가 나는 로비를 거쳐 방으로 올라갔다. 입구에 걸린 거울 앞에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발로 카펫 위를 걸어 침대 끝에 앉았다. 가구 세정제 냄새가 났고 한세진은 그 냄새를 맡고서야 어딘가 착륙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정말 세련되고 한 폭의 그림 같은 묘사이다. 엄청나게 크고 긴 귀가 달린 토끼 인형이라니. 빨대 꽂힌 스티로폼 컵이라니. 계피와 설탕, 바닐라를 섞은 밀가루 반죽 냄새라니.
자전거 한대가 한세진의 곁을 지나갔고 한세진이 제이미 쪽으로 반걸음 옮기자 제이미도 반걸음 옮겨 걸었다.
이것도 기억에 많이 남는 섬세한 묘사이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그대로 보여주는 반걸음 차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그것이 나탈리를 향해 다가오니까.
'그렇게 하지 않아도'라는 말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사람들이 연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연연하는 것일까? 지나간 것들에 매달리면서. 그럴 겨를도 없이 충분히 바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걸까? 그것들이 아니어도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은 충분히 많다는 걸까? 그러니까 그것들을 사랑하기에도 바쁘다는 것인지. <다가오는 것들>도 꼭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