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삶에 대해서

by 푸르른 선망

혼란스럽다. 존재의 이유를 고민할수록, 학습할수록, 그 의미와 비슷한 것들을 볼 수록, 존재의 이유를 혼돈한다.


존재의 이유를 알아야 하는가?

이런 삶의 의문을 품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존재의 이유를 생각한 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 가치 있다는 것이라 증명해야 하는 숙제가 되었다. 쉽게 존재의 의미로 무언가를 섬기고 따르고 다시 숙연해지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찾은 듯하다가 부정당한다.


가치 있어야 하는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이미 가치가 매겨진 물질을 소유하는 것 자체를 존재 이유로 하니. 소유한다는 것은 무언인가 정의할 수 없는 막다른 길로 간다. 자본주의 사회체제에서 범하기 쉬운 오류에 빠져들어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위대한 사상가들은 자본주의 이전과 이후에 존재하며, 이와 같은 생각이 오답임을 후세에 남겼다.


다시 원점이다. 소유한다는 것에 얼메이지 않으며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존재 가치를 증명한 길은 무엇일까.


스스로를 어렵지 않게 정의할 수 있었던, 어린 삶에 아련함을 느끼는 시간이 올 줄이야.


스스로를 아는 것이 가장 강한 것이라는 무수한 글귀들을 기억한다. 그 파노라마 같은 기억은 그 의미를 모르던 때와, 얼핏 추측을 할 때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느끼는 지금의 순간이 아버지의 차 뒷좌석에 멍하니 창가 풍경을 바라볼 때와 같이 지나간다.


반면에, 타인을 어떤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아직 어렵지 않다. 이런 생각에는 아직 성숙함이 자라지 못한 것인지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나와 같이 스스로를 혼란스러워하는 타인을 바라보면 빛나는 가치를 지닌 보석 같은 사람이 왜 이런 고민을 하는지 어리석게 보이기도 한다.


나의 하소연을 한다면, 타인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같이 나를 바라볼 테니,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이런 하소연도 들어주는 친구는 귀하다. 그가 들어주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더 귀하다.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결국애는 당장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게 된다.


그런 쓰임을 주고받는 자아가 내면이 아니라 외부에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초월하고 싶은 한계이다.


지금까지의 고민으로,

존재의 이유는 가변적이라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과 사회를 초월할 수 없고, 얽히고 서로에게 영향을 받으며 일종의 가치를 가진다. 일종의 화폐와 같다. 화폐는 무형이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그 가치가 매 켜지고 오르내며, 가치를 매길 수 없는 0의 정의에서 교환을 통해 그 가치가 어느 선상에 수렴하니 사회적 존재 이유는 화폐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건강한 존재 이유는 스스로 정의하는 것이다.


존재의 이유가 화폐와 같이 결국, 타인을 배제하고 존재의 가치를 증명할 수 없다면, 그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 있을까.


쉽게 정의할 수 없다.


다만, 남은 생애를 보내며 정의하고 싶은 존재의 이유는 있다. 적어도 이 삶은 존재의 가치를 고민하며 보내고 싶다.


그런 소망을 꿈꾼다.

-Soft Nightfall at Solomon Sea-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