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야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성경의 내러티브는 “성품을 형성시킬 뿐 아니라,” 그 이야기에 적합하게 공동체의 질서를 세워가도록 이끌어 준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은 내러티브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며 그 성품에 적합한 사람들이 되게 한다고 믿는다. 성품이란 하나님의 대한 이해가 이야기들로부터 추론된 것이 아니다. 성품은 이야기 그 자체에서 형성된다. [1] - 하우어워스
The narrative of scripture not only “renders a character” but renders a community capable of ordering its existence appropriate to such stories. Jews and Christians believe this narrative does nothing less than render the character of God and in so doing renders us to be the kind of people appropriate to that character. To say that character is bound up with our ability to remember witnesses to the fact that our understanding of God is not inferred from the stories but is the stories.
교회는 성경의 내러티브로부터 성품을 형성하는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성품은 개별적으로 형성되기도 하지만, 공동체가 추구하는 덕목에 따라서 형성되기 때문에 성품 형성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그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과 추구하는 덕목들이 개인들의 성품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 안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심이 되는 이야기인 성경의 이야기로 교회 성도들의 성품을 형성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 장에서는 성경의 중심 이야기인 예수님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성품 형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모든 이야기들은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구원하러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에는 한 아기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그의 이름을 속삭입니다. 그는 잃어버린 조각들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 같이 전체 그림을 보여주기 때문에 갑자기 성경의 아름다운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2] - 샐리 로이드존스
샐리 로이드 존스의 Jesus Storybook Bible은 어린이 성경 중에서 성경 이야기 전반에 대한 가장 일관된 설명을 제공하는 성경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부터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많은 이야기를 예수님의 구원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합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Jesus Storybook Bible의 관점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이야기가 우리의 성품을 형성한다는 측면을 생각할 때 성경의 이야기는 분명히 일관성이 있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소망은 우리가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사는 데 필요한 덕 중 하나란다. [3] - 스탠리 하우어워스
The story of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gives us hope, and hope is one of the virtues necessary for living into the story.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4]
2001년 타임지에 의해 최고의 미국 신학자라는 이름을 얻은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기독교인들의 성품이 예수님의 이야기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우어워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품어야 하는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5]
먼저, 예수님은 마태복음 26장에서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세히 가르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6장 본문에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를 하러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이전에도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홀로 기도하러 가신 장면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홀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기도하시기를 원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알리시고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민과 슬픔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셨고, 제자들이 자신의 고난 앞에서 함께 깨어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자신의 기도에 동참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6]
이 기도만 보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동일한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에 십자가 처형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님의 기도를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이 그 이전의 예수님의 행적과 매우 모순되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부르며 책망할 만큼 단호하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인 것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마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예수님께서 진정 피하고 싶으신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피하고 싶으셨던 고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기도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제 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7]
예수님께 십자가 형벌은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버려짐을 의미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죄의 형벌을 짊어지고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저주를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저주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것이며 관계의 단절입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진노하며 온 세상의 죄에 대한 진노를 자신에게 쏟아놓는 것을 예수님은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버려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크게 소리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버려지는 고통이 예수님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죄인으로 간주되어 하나님과 죄악 사이의 무한한 거리만큼 하나님에게서 멀어져야 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정당한 징계를 당하거나 책망을 당할 때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짓지 않은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형벌로 인해 예수님은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지만, 사람들이 생애 가운데 겪는 최대의 고통은 죄로 인한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 고통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추석이란 무엇인가?”의 칼럼으로 유명한 김영민 교수의 책 제목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좋다”입니다. 이 제목이 기독교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을 매일 아침 생각하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우리의 죽음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생각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죄와 사망의 권세를 벗어나 새 생명을 얻었는지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은혜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그 기도에 동참할 수 있게 권면하셨습니다. 그 이전에 예수님은 혼자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를 하러 가셨고 자신의 기도가 충분히 들릴만한 거리에 그들을 두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슬픔과 고통 중에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통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지는 것이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의 실체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 고통은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비참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어서 자신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의 고통과 그 의미를 알아서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풍성함을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8]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피하고 싶은 죽음의 유형이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형벌의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 그 자체로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예수님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 형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온 세상의 죄에 대한 저주를 받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죄에 대한 형벌과 저주를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와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9]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직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하며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우리가 알 때에만 우리는 십자가 죽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우리가 더 많이 깨달을수록,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잠든 제자들을 거듭 깨워가며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신 이유도 그들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뜻하는데, 그 죄의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베푸신 구원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경 속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으며, 옛 습관을 따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 사람들은 매일매일 죽음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육체의 나이와 건강 상태에 전혀 무관하게 하루하루를 죽음의 날들로 채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풍성히 알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풍성한 생명의 삶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1] 하우어워스, 교회됨, 139.
[2] Lloyd-Jones, The Jesus Storybook Bible: Every Story Whispers His Name, 17.
[3] 하우어워스, 덕과 성품, 105.
[4] 개역개정, 마태복음, 16:21–23.
[5] 하우어워스, 덕과 성품, 105.
[6] 개역개정, 마태복음, 16:39.
[7] 개역개정, 마태복음, 27:46.
[8] 개역개정, 갈라디아서, 3:13.
[9] 개역개정, 요한복음, 3: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