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영광

예수님의 영광, 세상의 영광

by 강성호

예수님이 추구하는 영광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성품이 그들의 내면에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이야기의 핵심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성경 속 예수님의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요한복음 12장의 말씀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예수님

요한복음 9장부터 시간적으로 연속된 본문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고쳐 준 후, 바리새인들과 논쟁 가운데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참된 목자와 삭군을 구별하면서 바리새인들이 양들을 훔치는 도둑이며 거짓된 목자인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일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바리새인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을 뻔하였고, 요단강 동편으로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요단강 동편에서 다시 예루살렘 근처인 베다니로 오신 사건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그 자리에, 나사로가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버린 그 시점에 오신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일로 인해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기에 다시 이번에는 에브라임으로 피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 마지막에는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오는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음모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요한복음 12장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던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베다니에서 하루를 머무시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봉헌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이 베다니에 들리셨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 일행은 마리아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직후에 바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기 때문에 그때 제대로 대접을 못했던 마르다는 이번에는 예수님을 제대로 대접하리라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잔치를 준비하고 나사로는 예수님 옆에서 함께 식사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로 그 발을 씻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들었던 마리아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번 예루살렘 방문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은 가롯 유다의 반응이 될 것입니다. 그 정도 돈으로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돈 낭비를 하느냐고 질책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번 예루살렘 방문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가롯 유다처럼 마리아의 행동을 평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령 그 의미를 몰랐다고 하더라도,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 낸 예수님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헌신을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는 우리의 관념과 생각 속에서 추상적인 개념으로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바로 이 땅 위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 안에서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그녀에겐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가족에게 참된 생명을 알려 주신 분이고, 그 생명을 지금 마리아가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예수님이 전해주신 영생의 가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다니는 제자들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본 사람들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마리아는 분명히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삶, 빛의 자녀로서의 삶, 죽음의 권세를 이긴 생명의 삶, 영생의 삶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려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할지라도,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예수님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다른 반응들: 열광하는 군중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임팩트가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누가 생각하더라도 신의 영역에 속한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라고 확신했습니다.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 열광하며 모여들었고,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열광이 나사로에 대한 열광으로 이어졌고, 나사로의 존재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 때문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들이 열광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장면을 직접 보았던 유대인들의 입소문을 통해서 유대인 군중들이 예수님께 열광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열광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전쟁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며 정치적 해방, 군사적 해방을 부르짖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카비 장군이 군사를 일으켜 예루살렘을 회복할 때 흔들었던 그 종려 나뭇가지를 군중들이 흔들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조차 군중들의 열광을 보면서, 예수님을 반대하고 핍박했던 자신들의 행동이 허망하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2]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눈에도 자신들의 노력이 허망해 보일 정도로 군중들의 열광은 대단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바라던 예수님의 영광이며, 그들이 갈망하던 영광이었습니다.


두 가지 다른 반응: 마리아와 군중들

지금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비슷하지만 다른 두 가지 반응을 보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봉헌과 군중들의 열광입니다. 둘 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내용과 본질은 확연하게 구별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실제로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의 주관자로서 지금 자신 앞에 있다는 분명한 인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인식과 믿음대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자신들의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예수님께 투영하고 자신들이 갈망하는 정치적 해방자로서의 메시아 예수에 대해서 열광하였습니다. 그 열광이 엄청났기 때문에 그 근방의 헬라인들조차도 이 새로운 정치 지도자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습니다. 헬라인 중 몇몇이 빌립에게 지연을 이용하여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빌립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을 때, 예수님은 자신이 받을 그 영광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영광은 한 알의 밀알로서 아버지께 보냄 받은 아들로서 죽음의 자리에 들어갈 때 얻는 예수님이 얻는 영광이었습니다. 철저한 자기부인(self denial)과 자기희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영광이었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영광이었습니다.


무릇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예수께서 계셨던 그 십자가의 자리,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야 했던 그 자리에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빛 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고, 빛 되신 그분을 따라 어두움이 아닌 빛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특별한 제자들, 특별한 사람들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나 특수한 훈련을 받은, 특수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렇게 한 알의 밀알로서 자기 욕망을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삶에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기꺼이 향유를 드리는 것처럼, 우리는 빛 되신 예수님 안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삶에 예수 안에서 참된 생명이 있습니다. 이 참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은 어두움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거짓 가치를 내려놓을 수 있고, 거짓된 가치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거짓된 가치들은 결국 돈, 명예, 권력 등과 같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다가 결국 삶 전체를 죽음의 권세, 어둠의 권세 아래 몰아넣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거짓된 가치와 자기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위해서 예수님의 이름에 열광할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십자가 죽음에 있다는 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욕망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


이사야서 말씀처럼, 그들은 “많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열광하지만, 예수님 앞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지만, 그것은 자기 욕망을 투영한 거짓된 믿음이며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거짓된 욕망이 진실된 믿음보다 더 열성 있고 더 믿음 좋아 보이고, 더 좋은 일꾼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예루살렘 입성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정말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에 따라 참된 믿음이 되기도 하고 거짓 믿음이 되기도 합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처지에 대한 연민으로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삼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왕으로 모시며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한 알이 밀알이 떨어져 죽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으신 예수님처럼, 향유를 발 위에 부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한 마리아처럼, 빛 되신 예수님 앞에서 내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따르는 삶: 빛의 아들이 되는 것

자기 욕망을 위하여 사는 어두움의 삶이냐, 아니면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욕망을 깨뜨리는 빛 된 삶을 추구할 것인지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2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보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빛 되신 삶, 영광된 삶을 우리에게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에, 빛 되신 예수님의 빛이 우리 생애 가운데 비취고 있는 동안에, 빛 되신 예수님을 믿고 그 빛 되신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4]


자기 욕망을 예수님께 투영하여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인생은 어둠의 권세 아래에 있는 인생입니다. 빛의 자녀의 모습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회복된 빛의 자녀는 자기 욕망이 아닌 하나님을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자리로 함께 걸어가 자신을 부르신 부르심 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빛의 자녀 된 삶이고, 성경 속 예수님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이 참된 영광이며, 예수님이 추구하신 영광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를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함께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공동체는 예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성경의 이야기를 우리의 삶의 이야기로 구현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안에 구현되는 예수님의 이야기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 안의 성품을 형성하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야기로부터 성품을 형성하려는 노력은 성경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며,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야기는 용서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용서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용서받은 공동체로서 용서의 덕을 구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성경의 내러티브 속에서 발견하고 기억하여 용서의 성품을 공동체 안에서 함께 형성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5] 즉, 공동체 전체가 용서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의 성품이 공동체의 성품으로 형성되어 교회 공동체의 개개인들의 내면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우어워스는 예수님의 이야기와 복음서의 가르침에 매우 충실한 말씀의 사역자들을 통해서 교회가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진리로 충만할 때 힘이 나온다. 기독교 성직자의 힘은 그들이 문화적으로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이나라, 살아있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데서 온다. [6]


그렇다면 교회의 말씀 사역자들의 도덕적 임무는 복음에 충실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교회가 성품의 공동체가 되도록 이끄는 것이 될 것입니다.


[1] 개역개정, 요한복음, 12:23–24.

[2] 개역개정, 요한복음, 12:19.

[3] 개역개정, 요한복음, 12:34.

[4] 개역개정, 요한복음, 12:36.

[5] 하우어워스, 교회됨, 142.

[6] 하우어워스 & 윌리몬,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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