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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성호 Apr 06. 2021

“관대한 정통기독교“에 대한 더 많은 생각들

More Thoughts about “Generous Orthodoxy”

이 글은 리차드 마우 Richard Mouw의 "More Thoughts about “Generous Orthodoxy”를 번역해서 올렸습니다.


저는 랍벨의 새 책, "Love wins"에 관한 나의 평가에 대한 많은 반응을 받았습니다. USA Today에 인용된 짧은 평가와 랍의 책에 대한 나의 인증을 이 블로그에서 설명하기 위해 포스팅한 긴 부분의 글들에 대한 반응들이 그것입니다. 그 반응들의 다수는 매우 긍정적이었고, 몇몇은 물론 꽤 부정적이었으며, 그리고 몇 몇은-특별히 내 코멘트에 대한 많은 트윗들은- 그냥 그 말을 주변에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게 온 그 반응들은 대부분, USA Today에 인용된 것처럼, 많은 동료 정통 복음주의자들을 지옥의 실존에서 기쁨을 취하는 고약한(stingy, 관대하지 않은) 사람들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내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불평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규정한 것에 대해서 사과합니다. 그것은 불공정했으며, 그리고 그것은 잘못된 이슈들에 초점을 놓고 있습니다.


저는 "관대하면서 인색한"이라는 구분을 고(故) 코소코 코야마(일본인 신학자)의 덕택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저는 그가 했던 연설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관대하면서 인색한"은 우리가 성경에 접근할 때, 성경들의 하나님이 관대한 하나님이냐 인색한 하나님이냐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구분입니다.


저는 그와 같은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방식이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들의 개념에 집중하는 (직역: 우리의 신학적 논의들로 다루어 지는 하나님의 속성들의 개념에 집중하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는 개념에서부터 기쁨을 취하는 다른 사람들을 고발하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유감입니다(죄송합니다). 프랜시스 쉐퍼가 말하기를 좋아했던 방식처럼, 우리는 항상 우리의 눈물을 통해서 지옥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그와 같이 정당하게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generous orthodoxy"(관대한 정통기독교)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신학 전통들을 함께 가지고 있는 복음주의권 신학교의 총장이라는 제 역할로는, 그와 같은 역할로는- 저는 하나의 넓은 개념의 정통기독교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역사적으로 정통기독교는 (초대교회 시기에는) 초대교회 교부들을, 중세에는 사상가들을, 그 폭넓은 종교개혁운동을, 그리고 최근의 다양한 부흥과 쇄신 운동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적절한 예

주를 여전히 사랑하고 부활날에 올려질 어떤 사람들처럼, 죽음 이후에 신자들이 주와 함께 있는 상태로 계속되지만 죽음과 부활 중간의 시간은 계속되는 의식의 상태 중의 하나는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중간기"(죽음과 부활 이전의 상태) 교리를 부인하는 어떤 사람이 풀러 신학교에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저 생각은 정통기독교입니까? 저는 넓은 관점의 정통기독교라는 의미에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많은 재세례파 사상가들처럼 사람들을 저 관점을 지지하는 루터를 인용할 수 있습니다. 더 최근에는 "soul sleep"이 다양한 그리스도 재림론자들로부터 유지되어 왔습니다. 중간기를 부인하는 것이 하나의 미래의 부활에 대한 강력한 옹호와 결합하면서 역사적인 복음주의권 정통기독교의 범주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칼빈파 크리스찬으로서, 저는 제 자신의 신학 기준을(직역: 제 고유한 신학 안에서 제 자신을) , 제가 기술하고 있는, 개혁파 신앙고백들의 더 엄격한 기준들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들은 중간기를 하나의 의식적인 상태라고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으며 저도 그 교리를 부인하는 사람은 그가 어떤 칼빈주의자일지라도도 개혁파 교리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주장합니다.


또는 하나의 단순한 예

침례에 의한 어른들의 세례를 주장하는 것은 복음주의권 정통기독교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혁파 정통기독교의 범주 안에 있지는 않습니다.


랍 벨로 돌아가서. 저는 그의 책, 사랑이 이긴다에서, 하나의 넓은 복음주의권 정통기독교의 기준들을 어기는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불신자들이 직면해야 하는 끝없는 고통의 영원성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하나의 정당한 대안으로서 영혼소멸 사상을 옹호하는 존 스토트의 주장에 대해서도 저는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마도 벨과 스토트 두 사람 모두와 함께 특정한 논점들에서 동의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역사적으로 정통기독교의 범주 안에 있을 것입니다.


이제, 지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뤄보겠습니다).

저는 지옥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히 분리되는 하나의 거주하는 영역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르치고,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가 그것을 가르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지옥의 실재(의 문제)와 신학적으로 고심하면서-특별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있을지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저는 칼빈주의 정통기독교의 나의 전통 안에서 가이드라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은 제게 천국과 지옥의 인구에 대한, 두 가지 이치에 맞을 것 같은(적절해 보이는) 원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원리: 결함 있는 신학들을 가진 사람들도 천국에 갈 수 있다. 

여기서 저는 어떤 정통 칼빈주의자 누구라도 자유주의로 고발할 수 없는, 최소한 두 사상가들에게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19세기 "구 프린스톤"의 위대한 신학자, 찰스 핫지입니다. 핫지가 정규적으로 그의 세 권의 조직신학 책에서 특수 비평으로 뽑아낸 한 사상가는 독일 신학자인 프레드릭 슐라이어마허였습니다. 핫지가 젊은 시기 독일에서 공부했을 때, 그는 슐라이어마허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았습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합리주의자들의 비평에 대해 독일신학자들이 포용하는 것 때문에 핫지는 깊은 마음의 동요를 받았고, 핫지에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포함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 교리들을 침식시키는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핫지가 슐라이어마허 - 이 시점 이전에 수 십 년 전에 죽은- 에 대한 그의 비판을 두고 있는 그 지점에서, 핫지는, 한 각주에서, 그가 비판하고 있는 그 신학자에 대해서 짧은 코멘트를 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학생으로서, 그가 어떻게 슐라이어마허의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여 왔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항상 우리의 구속자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채워진, 탁월한 정도의 복음적이며 영적인" 찬송들이 그 예배들 안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는 그 사실들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핫지는 슐라이어마허의 동료들 중 한 명이 자신에게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신학자(슐라이어마허)가 자주 저녁에 그의 가족들을 다 모으고서 "서둘러라, 애들아, 우리 모두 그리스도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자"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핫지는 이 찬사를 슐라이어마허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 우리가 그가 이제 이러한 찬송들을 부르고 있다는 점을 의심할 수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며,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보장하듯이,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십니다."


두 번째 강력한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오랜 기간 변증학 교수를 했던 고(故) 코넬리우스 반 틸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짧게 그의 고향 필라델피아에서 그를 한 번 방문했고 그에게 칼 바르트 신학에 대한 단호한 거부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당대 신학 흐름을) 전통적인 정통기독교 쪽으로 되돌아오는 명백한 한 걸음을 내딛게한  바르트의 기여들 중의 많은 부분에 대해서, 복음주의권에 다른 사람들이 환영했었던  것과는 달리, 반 틸은 바르트의 신학은 변장한 "새로운 모더니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반틸에게 하나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와 같은 말들을 시작하였습니다. " 칼 바르트를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보지 않는 어떤 사람으로서, 무엇이....?" 그러자 반 틸은 내 말을 바로 그 부분에서 호되게 자르고서, 흥분된 목소리로, 그는 말했습니다. "아니오! 아니오! 나는 결코 바르트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결코!! 내가 말했던 것은 그의 신/학/이 진정한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복음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이 그들이(누구 지칭하는지 명확하지 않음) 그의 신학에서부터 배운 것이라면, 그들은 그리스도께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


반 틸은 여기서 단순하면서 직접적인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고도로 문제 있는 신학을 가질 수 있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에 의해 변화된 심장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반 틸의 관점에서보면, 바르트는 성경적인 충실도에 있어서 훨씬 못 미치는 신학체계를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핫지가 슐라이어마허에게 동일한 지점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핫지는 그(슐라이어마허)가 나쁜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그(슐라이어마허)가 천국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소망하며 부른 찬송을 (그의 신학과) 구분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원리: 우리는  마지막 날에 누가 (천국)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을 지에 대하여는 신비한 영역으로 두어도 될 좋은(직역: 어떤 신비를 허용할 좋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서 또 다른 엄격한 19세기 칼빈주의 사상가인 화란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가 있습니다. 바빙크가 말하기를, 우리는 "타락한 자들의 영원의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를 배타적으로 드러내며, 선택 받은 자의 영원한 상태에 대해 하나님의 긍휼을 배타적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성자의 피 값으로 사신(피로 사신) 교회에 하나님의 정의가 계시되고 있다; // 그리고 지옥의 자리에 징계의 정도가 있고 하나님의 자비의 불꽃들이 있다.//"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 //는 마우의 첨가부분) 저는 바빙크가 이 말을 할 때에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명백하게 받아들이지 않고서 죽은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모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차단된다고 단순하게 가정하는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칼빈주의 정통기독교에 대한 의문들에 대한 하나의 시금석인, 종교개혁 시대의 공식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있습니다. "유아기에 죽은, 선택받은 유아"들- 따라서 의식적인 행위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기회를 갖지 못한 자들-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중생하고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규정한 후에, 그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습니다: "물론 외견상 복음 사역에 의해 불려질 능력이 없는 모든 다른 선택된 사람들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이 판단에 대한 근거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령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어떻게든지 일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심지어 제 자신이 설명할 수 있는 칼빈주의 정통기독교의 가장 엄격한 기준들에 의해서도, 저는 천국과 지옥의 정확한 인구에 대해서 약간의 느슨함을 둘 수 있는 얼마 간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의 지옥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역하며 살고 있는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악한 방향을 돌이키기 전에는 그곳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 우리는 만물이 마지막 날에 어떻게 판명될지를 (감춘 채로) 비밀이라는 좋은 약을 가지고 살아가는 각각의 이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랍 벨은 아마도 간디가 최종 판단이 드러날 때 (천국)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만큼 간디의 팬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1960년 후반에 칼빈 칼리지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천국에 나타날 것이라는 윌리엄 해리 젤리마의 주장- 초기 그 학교에서 존경 받은 철학 교사-을 대체하려는 하나의 논쟁을 여전히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CRC 교회는 이단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CRC 교회는 결코 그의 견해들에 대해 책임을 지우기 위해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은 소크라테스 경우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 다시 (인용하자면), “언제 그리고 어디서나 그리고 어떻게든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에 대해 그와 같은 경우들을 남겨 두는 것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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