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불의, 그리고 평범한 시민-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태복음 11장 16, 17절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옆에서 사람들이 애곡하며 슬퍼하여도 함께 가슴을 치며 울어주지 않는 세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2천년 전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그러한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나오는 세 사람은 세 가지 유형의 인생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선한 싸움을 벌여야 하고, 악한 자들로부터 약자들을 지켜내야 하지만 이미 늙어 힘이 빠져 현실 속에서 무기력한 보안관이 첫번째 유형의 인생이다.
두 번째 유형은 막강한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규범을 무시하는 악인이다. 청부 살인업자 “쉬거”는 악의 화신처럼 등장한다. 영화 속 그의 첫 번째 살인은 자신을 연행한 보안관을 수갑으로 목졸라 죽이면서 일어난다. 범죄자를 제압해야 하는 보안관은 자신이 연행한 범인에게 죽임 당한다. 쉬거는 가는 곳곳마다 자신만의 원칙으로 사람들을 죽인다. 그 원칙은 합리적인 상식이 아닌 그의 마음이 정한 그만의 방식이다. 악인인 쉬거는 이 사회의 규칙과 법률을 간단히 무시하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나 도무지 그를 막을 수 없다. 악인은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선을 다해 마음껏 사용한다.
세 번째 유형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나 자기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쫓다가 파멸에 이르는 보통의 사람이다. “모스”는 우연히 총격전이 벌어진 사막을 지나다 240만불이 든 돈가방을 얻게 된다. 횡재하였지만 그 댓가는 잔인하였다. 벨과 같은 텍사스 남자로 자신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고, 돈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자신도, 아내도 모두 쉬거에게 목숨을 잃는다. 악인의 편에 선 것도 아니면서 악인으로부터 공격 당하지만 의인의 편에도 결코 서지 못하다 인생을 마감한다.
악을 제압하고 선을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벨은 무기력했고, 악의 화신인 쉬거는 강력하고 치밀하고 집요했다. 그렇게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모스는 돈에 대한 욕심으로 자신과 가족 모두를 지키지 못하고 죽고 만다.
벨의 마지막 독백은 꿈 속에서 만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꿈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자신보다 앞서 가서 온통 깜깜하고 추운 곳에서 불을 피워 주었다. 아버지는 항상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 주셨다는 것을 그는 꿈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감당했던 역할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
이 영화의 감독인 코언형제는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코언형제의 말처럼 세상은 점점 나빠지는데, 이것에 대항해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하는 선인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소극적으로 은퇴 후 가족들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코엔 형제가 나와 같은 해석을 의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이 영화가 오늘날 우리 세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탁월한 비유인 것 같다. 약자들의 눈물에 함께 눈물 흘리지 못하는 보통의 사람들이 다함께 악인의 공격을 받아 파멸에 이르는 구조는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며 영화와 오늘날의 현실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러면 누가 제일 나쁜 놈인가? 제일 나쁜 놈은 제일 나쁜 짓을 한 악인이 될 것이다. 그러면 누가 제일 원망스러울까? 보통의 사람들일까? 무기력한 선인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