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그저 그런 빨간 날 정도로만 여긴지도
20년 가까이 되었다.
하지만 이맘때가 되면 교회 건물의 반짝이는 전구들이
미소 지을 수밖에 없는 추억들을 떠오르게 한다.
3살 때 옆집 선교사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집에서 뒹굴기보다는 교회라도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부모님의 판단 덕분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핑계 삼아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지 꽤 되었지만,
종교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늘 기독교라고 답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들었던 성경과 기독교적 가치관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나의 청소년기에 스며있는 교회와의 추억 중
성탄 전야제를 준비하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틈틈이 친구들과 모여
연극이나 합창 등을 준비하며 놀았던 그 과정 자체가 좋았다.
평범하고, 지겹기 그지없는 학교 생활에 지칠 때쯤
교회에서 받는 칭찬과 관심은 나를 특별하다고 여기게끔 해 주었고,
방황하기 좋은 편모가정의 사춘기 남자아이가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며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도
시기마다 특별한 역할을 맡겨 주었던 교회 덕분이었다.
(학생부 인원이 많지 않아 모든 이가 특별했다.)
성탄 전야 예배가 진행되고
한 달 넘게 준비한 것들을 단 한 번으로 쏟아내고 나면, 그 아쉬움과 허탈감을 감출 길이 없었는데,
그럴 때마다 동일한 감정을 함께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던 친구들이 주변에 있었다.
신앙이라는 공동의 관심사로 엮인 또래집단에서
10대 청소년은 고립되지도,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었다.
교회라는 건물은 나에게 물리적으로 안전한 놀이터를 제공해 주었고,
함께하는 친구들은 심리적인 울타리가 되어주었으며,
신앙의 선배인 어른들은 무한한 지원과 관심으로
도전하고 깨지며, 나아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다.
첫사랑의 설렘도 교회였고,
첫 이별 아픔도 교회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 해준 전도사님을
만난 곳도 교회였고,
집을 나와 갈 곳 없던 나를 위해
항상 열려있던 곳도 교회였다.
이렇듯 교회는 나의 사춘기를 지켜주었고,
나를 비뚤어지지 않게 잡아준 고마운 곳이다.
일부 교회의 기이한 행동으로
한국교회 전체가 욕먹는 현실이 슬프고,
더 나가 기독교 전체가 비난받는 것은
가슴이 아프다.
교회를 떠난이가 교회를 대변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겨질 것이나
바라기는
미디어에 비치는 일부 교회가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되길 바라본다.
3명 중 한 명이 기독교인이니
굶어 죽는 이웃이 생기지도 않을 것이고,
이웃의 고통을 남일처럼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나에게 피해가 생기는 법이라도
이웃을 위해 지지하게 될 것이고,
당장의 편의나 이득을 위해
이웃에게 피해 가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2000만 명은 그렇게 할 것이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