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열한백구 Dec 28. 2019

크리스마스 추억 더듬기

나의 청소년기.

크리스마스를 그저 그런 빨간 날 정도로만 여긴지도

20년 가까이 되었다.

하지만 이맘때가 되면 교회 건물의 반짝이는 전구들이

미소 지을 수밖에 없는 추억들을 떠오르게 한다.


3살 때 옆집 선교사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집에서 뒹굴기보다는 교회라도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부모님의 판단 덕분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핑계 삼아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지 꽤 되었지만,

종교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늘 기독교라고 답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들었던 성경과 기독교적 가치관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나의 청소년기에 스며있는 교회의 추억 중

성탄 전야제를 준비하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틈틈이 친구들과 모여

연극이나 합창 등을 준비하며 놀았던 그 과정 자체가 좋았다.


평범하고, 지겹기 그지없는 학교 생활에 지칠 때쯤

교회에서 받는 칭찬과 관심은 나를 특별하다고 여기게끔 해 주었고,

방황하기 좋은 편모가정의 사춘기 남자아이가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며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도

시기마다 특별한 역할을 맡겨 주었던 교회 덕분이었다.

(학생부 인원이 많지 않아 모든 이가 특별했다.)


성탄 전야 예배가 진행되고

한 달 넘게 준비한 것들을 단 한 번으로 쏟아고 나면, 그 아쉬움과 허탈을 감출 길이 없었는데,

그럴 때마다 동일한 감정을 함께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던 친구들이 주변에 있었다.

신앙이라는 공동의 관심사로 엮인 또래집단에서

10대 청소년 고립되지도, 외로움을 느낄 틈 없었다.


교회라는 건물은 나에게 물리적으로 안전한 놀이터를 제공해 주었고,

함께하는 친구들은 심리적인 울타리가 되어주었으며,

신앙의 선배인 어른들은 무한한 지원과 관심으로

도전하고 깨지며, 나아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다.


첫사랑의 설렘도 교회였고,

첫 이별 아픔교회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 해준 전도사님을

만난 곳도 교회였고,

집을 나와 갈 곳 없던 나를 위해

항상 열려있던 곳도 교회였다.


이렇듯 교회는 나의 사춘기를 지켜주었고,

나를 비뚤어지지 않게 잡아준 고마운 곳이다.

일부 교회의 기이한 행동으로

한국교회 전체가 욕먹는 현실이 슬프고,

더 나가 기독교 전체가 비난받는 것

가슴이 아프다.

교회를 떠난이가 교회를 대변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겨질 것이나 

바라기는

미디어에 비치는 일부 교회가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되길 바라본다.

3명 중 한 명이 기독교인이니

굶어 죽는 이웃이 생기지도 않을 것이고,

이웃의 고통을 남일처럼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나에게 피해가 생기는 법이라도

이웃을 위해 지지하게 될 것이고,

당장의 편의나 이득을 위해

이웃에게 피해 가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2000만 명은 그렇게 할 것이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다면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